“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선생이 그토록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너는 부디 한 고을을 다스릴 벼슬에만 머무르라’는
어머님의 간곡한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평생을 경(敬)과 신(愼)으로 단련한 몸가짐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으로 절제된 군자의 참 모습을 제자들과 후세에 보여 주었다.”
이황(李滉, 1501~1570)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1501년(연산군 7)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7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가문이긴 하나 풍족하지 못한 집안이었고 진사였던 아버지 이식(李埴)은 퇴계가 출생한지 7개월만에 별세하였기에 퇴계는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엄한 어머니 밑에서 여섯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숙부로부터 초보적인 학습지도만을 받았을 뿐 그 이후로는 스승없이 독학하였다. 또한 20세 때에는 잠 자는 것, 밥 먹는 것도 잊고 「주역」을 읽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성리학 탐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퇴계 이황 영정, 玄艸 이유태 그림)
21세에 결혼하여 27세 되던 가을에 향시를 비롯하여 진사 회시(28세), 문과 별시(32세), 경상도 향시(33세)등을 거쳐 34세 때(중종 29년) 대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때는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조정을 떠난지 오래되고 바른 말 하는 관료들도 드물었으나 이황은 43세까지 관직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중종이 죽고 인종도 죽어 명종이 즉위하며 문정왕후가 8년 동안 대신 정치하면서도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았고, 이황도 이에 연루되어 여러 번 관직을 내놓았던 복잡한 사회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는 관리보다는 참다운 학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 짐작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 당시로 되돌아가 퇴계선생의 일생을 편린(片鱗)이나마 다시 한번 느끼고 공감해 보고자 한다.
(사진 ↑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조선후기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이 1751년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부탁으로 그린 그림이다.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cm로 서원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에 위치한 탁영담, 애일당, 분천서원 등을 자세히 그리고 그 이름까지 밝혔다.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퇴계선생을 못 잊어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사연이 화제에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522호)
(사진↑ 도산서원 전경,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사적 170호)출처: lemone12)
☞ 퇴계의 생애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李)씨,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성(眞城, 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와 춘천박씨(春川朴氏) 두 분이다. 김씨는 잠(潛), 하(河),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과 의(의), 해(瀣), 징(澄), 황(滉)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선생은 그 막내아들이었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마을에 서당을 짓고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차별하지 않고 정성껏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고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操身)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家法)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낙향해 있던 숙부 송재공(松齋公: 李우, 戶曹參判, 號 松齋)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숙부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옳은 것이 이(理)가 아니옵니까?”하고 물었다. 송재공은 이 말을 듣고 퇴계의 총명함에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공자가 말한 “자식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을 공경하며, 행동을 조심하고 널리 여러 사람을 사귀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하여야 한다”라는 대목을 익히고는 “사람된 도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하고 12세 때 이미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우쳤다 한다.
그리고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6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갖추곤 하였다고 한다.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하였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였다. 한밤중에 깊이 잠을 자다가도 윗사람이 부르면 즉각 응대할 만큼 조심성이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특히 형 해(瀣)는 퇴계와 더불어 집안을 빛낼 아이로 일찍부터 촉망받고 있었다. 퇴계와 해는 숙부 송재공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송재공이 퇴계의 관상을 보고 이마가 넓어서 ‘이마가 넓은 아이’라 하여 ‘광상(廣像)’이라 불렀다. 그래서 어린 퇴계를 보고는 늘 “광상이야말로 반드시 우리 가문을 지키고 빛낼 아이니라” 하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넷째 형인 해도 역시 영민하고 똑똑한 것을 꿰뚫어 보고 말하기를, “우리 형님(퇴계의 아버지)께서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영민한 아들들을 두셨으니 결코 세상을 아주 떠나신 것은 아니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집에서 가까운 봉화 청량사(淸凉寺)에 들어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이제는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 성리학설을 집대성한 책. 명나라 永樂帝의 명을 받아 胡廣 등 42명의 학자가 편집하였다.)의 첫 권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마지막 권 ‘시·찬·잠·명·부(詩贊箴銘賦)’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라고 후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周易)'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許氏)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사진→ 퇴계가 소년시절 형들과 함께 공부하던 봉화 청량사의 겨울 정경)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 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후 52세 때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호를 퇴계(退溪)라 하여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중기 문신·학자)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부인과 재혼하였으나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고 만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과 계상서당(溪上書堂)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저 유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 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 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돌아가시기 한달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출처: 권오봉 지음 “이퇴계의 실행유학”, 금장태 지음 “퇴계의 삶과 철학”, 윤사순 역주 “퇴계선집”)
☞ 퇴계의 학문과 사상
1. 사상적 원류: 퇴계의 사상적 입장은 정주학(程朱學) 계통에 두어지고 있다. 그는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입장을 바탕에 깔고 그의 성리학을 구축해 간다. 그리하여 그 기초 작업인 유학 고전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학설을 정리하면서 그는 일단 정주의 견해를 근간으로 하여 고전을 해석하고 과거의 성리학설을 정리한다.
2.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구인성성(求仁成聖): 퇴계는 인간고유의 가치와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추구를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학문은 ‘위기지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仁)을 추구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구인성성’의 학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이란 자기를 위하는 것일 따름이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장경부의 이른바 함이 없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은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수풀 속에 한떨기의 난초가 있어서 종일토록 향기를 내면서도 스스로는 향기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그의 학문적 본령은 우주론적 탐색이나 진리에 대한 개념적 인식에 있기보다는 인간 자신의 주체적 성찰과 실천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은 인간됨과 최고선(最高善)을 추구하는 가치체계의 문제로서,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진→ 조선후기 관아재 조영석 그림, ‘雪中訪友圖’)
퇴계가 추구한 것은 ‘인(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나의 심덕(心德)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리(天理)가 인간에 내재한 것이 인성이다. 인이라는 본성이 어떻게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드러나 사람을 사랑하고 물(物)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결국 심(心)의 체(體)와 용(用)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심덕(心德)'의 성취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의 2원적 특징: 퇴계의 이기론을 살펴보기 전에 이기의 의미부터 간략히 소개하겠다.‘이’는 ‘표준’(極)의 뜻을 전제함으로써 ‘사물의 형식’ 또는 ‘본질’의 뜻을 가진다. 이같은 ‘이’의 총화(總和), 즉 만물을 이루는 ‘이’의 전체가 곧 태극(太極)이라는 것이다. ‘이’의 특성은, 물론 초경험적(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는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지칭되며, 흔히 도(道)로도 대용된다.
반면, ‘기’는 ‘이’와 대조·대비되는 일체의 것을 의미하게 된다. 기는 현상·사물이 실제로 드러나게 되는 ‘존재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질료’(재료)가 기라고 하겠다. ‘이’는 ‘무작위(無作爲)’한 것인데 반하여 기는 ‘유위(有爲)’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는 감각이 가능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 한다. 가치상으로는 그 자체가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는 가치 중립의 것임은 물론이다. ‘이’와 ‘기’는 사물의 생성,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어느 것 한가지만으로는아직 구체적인 사물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론상 서로 떨어져 생각할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의 사물상으로는 둘이서 함께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며, 어디까지나 함께 있다는 것이다.
(사진↑ 퇴계의 「성학십도」 중 ‘동양 철학의 근원’을 설명하는 ‘太極圖’)
이상과 같은 것이 이기(理氣)에 대한 퇴계의 기초적인 견해이다.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기(氣)에 치중함으로써 때로는 ‘기’ 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는 기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기의 작용에 따라 생각될 수 있는, 기 작용의 ‘조리(條理)’ 또는 ‘질서(秩序)’라고밖에 보지 않았다.
화담은 ‘이’를 기 작용의 질서나 조리, 즉 기의 한 가지 속성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기와 대비시키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기를 이원화(二元化) 하지 않았다. 그를 기일원론자(氣一元論者)라 하는 것도 그가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 밖에 ‘이’가 있지 않으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기(氣) 뿐이다. 화담의 경우는 “오직 ‘하나의 기’가 시종도 생사도 없는 상태로 항존(恒存)한다(一氣長存)”는 것이다.
퇴계는 이와 같은 화담의 이기설을 평하여, “기 한편에서만 익숙하여 그 이론이 어쩔 수 없이 ‘이’를 ‘기’인줄 알게 되었다. 또한 때로는 ‘기’를 ‘이’로 말하게 된 것도 있다” 고 설명한다. 화담을 가리켜 이와 기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기 한편에 치우쳤다고 한 것을 본다면 퇴계는 화담보다 ‘이’에 더 치중하는 태도를 취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기’가 어디까지나 두 가지이지 한 가지(一物)가 아님을 주장하여 이기를 이원화 하는 퇴계는 기 자체에 대하여서도 기는 결코 상존·불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가 생멸(生滅)의 성질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경우에는 기는 생멸하는 것이고 ‘이’만이 항존하므로 ‘이’야말로 실재(實在)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기와 관련없는 ‘이’를 상정하게 되었고 그 ‘이’에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4.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 방법론 : 거경과 궁리는 두 가지 공부이면서 호진(互進)하는 관계에 있다. 퇴계가 구하는 것은 한갓 대상적인 지식이 아니며 자기의 성장과 관계되고 또한 자기의 성장과 더불어 알려지는 것이니만큼 진리를 일시에 깨쳐버리겠다는 것은 잘못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조급하게 서두르고 기필(期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마음의 병(心氣之患)을 낳을 뿐이라고 한다.
“마음의 병은 이(理)를 살핌에 투철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에서 억지로 찾으려 하며,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에 어두워 ‘보리싹을 뽑아올려 자라기를 도우려 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괴롭게 하고 정력을 극도로 소모하여 이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처음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自省錄」 卷1, 1면)
퇴계는 이러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도서(圖書)와 화초(花草)의 완상(玩賞)이나 산수(山水)·어조(魚鳥)의 즐거움과도 같이 진실로 정의(情意)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늘 접촉하여 마음을 항상 화순한 상태에 있게 할 것을 권유하였다. 퇴계에 의하면 거경과 궁리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맥락과 단서를 알았으면 억지 탐색과 불필요한 안배(按排)를 가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학문이란 빨리 나아가면 물러서기도 빨리 하는 것이다. 그는 사의(私意)를 가지고 억지로 탐색하고 모색하며 안배하는 습관을 버리고 인지(仁智)에 입각하여 마음을 평탄히 한 다음에 숙독하고 정사(精思)하며, 반복 체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그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계속하여 기질이 변하고 인(仁)이 무르익으면 일생일대의 환희사(歡喜事)를 맛볼 것이라고 하였다. (사진↑ 조선중기 김명국 그림, ‘探梅圖’)
5. 결 론: 퇴계에 의하면 사칠론(四七論) 등 심성에 관한 이론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 목적은 단 하나, “감성적인 욕구(人慾)를 막고, 이성[天理]에 따라 행위하려는”(알人慾存天理)데 있다. 이 ‘알인욕존천리’는 ‘경’의 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경의 태도를 취하면 천리가 무엇인지 마음 속으로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퇴계가 말하는 예란 이미 삼강오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에서는 물론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효와 충의 당위론이었고, 부계사회의 질서 및 유지 발전에 대한 옹호를 의미하게도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발설(理發說)을 중심으로 한 그의 심성설(心性說)은 결과적으로 당시의 체제에 대한 합리화의 의미를 지닌것이며 이상이 퇴계 철학의 성격이라고 하겠다. 살인·강도·성범죄의 증가 등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강력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물질 만능주의가 그 원인이며, 그것은 정보화 사회에 도달한 지금 인터넷 사용의 증가와 함께 날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진→ 퇴계의 「성학십도」 중 ‘인간의 마음(心)이 人性과 感情을 통제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心統性情圖’)
이것은 사상적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켜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사용될 뿐, 그 이상의 작용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퇴계의 학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지금에 와서 ‘이’가 어떻고 ‘기’가 어떻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퇴계의 그러한 순수한 마음을 본 받아 풍부한 물질에 뒤지지 않는 정서적·육체적 안정을 찾고 더욱 발전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 하겠다.
(출처: 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02-2/p6.htm)
☞ 영남학파의 두 거두-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예로부터 영남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 오현(五賢) 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4명이 영남 출신이고,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돼 우리의 사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曹植) 두 사람은 당대의 사표(師表)로서 늘 병칭됐으며, 각기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종사(宗師)로서 후학들로부터 극도의 추앙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퇴계와 남명은 1501년 동갑내기다. 퇴계는 조선시대 지명으로 경상도 예안현 청량산 자락의 토계리(兎溪里)에서 출생했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昌寧曺氏 1501~1572)은 경상도 지리산 기슭의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동(兎洞)에서 태어났다. 둘 다 영남 출신이며 나이도 동갑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라고 했다. (사진←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그러나 두 사람은 학자로서의 지향점이나 선비로서의 출처관(出處觀)에서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다.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를 중시한 기상의 소유자였다. 도산서원의 퇴계사당이 상덕사(尙德祠)로 명명되고, 덕천서원의 동서재에 걸린 경재(敬齋)-의재(義齋)라는 편액은 바로 이들 두 사람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화(梅花)를 사랑했던 퇴계의 심성(心性)과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남명의 성정(性情)은 우연한 대비가 아니다.
퇴계가 학자로서 그리고 관료로서의 삶을 병행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처사형 선비였다. 퇴계가 마지못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라는 고위직에 오를 때, 남명은 지리산의 암혈에서 고결한 선비의 풍모를 지키려 노력했다. 두 사람의 삶의 지향은 이렇게 서로 달랐다.
영남출신, 동갑 뗄 수 없는 인연
그리고 학문 본연에 있어서도 퇴계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에 일생을 바친 반면, 남명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이론적 탐구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열중했고, 윤리와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여기서 남명의 명분주의(名分主義)를 말해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남명에게는 애첩(愛妾)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남명의 임종시 그 애첩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간청했으나 남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여기에 비해 퇴계는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중도에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었고, 비록 신분이 하찮은 가문의 자제일지라도 배움을 청하면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지극히 순후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했고, 행검(行檢)에 독실하여 스승으로서의 위엄이 충만했다. 이러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도산 문하에는 유수한 인재들이 운집하게 됐다. 제자들은 그를 두고 “선생의 학문은 평이명백(平易明白)하고, 선생의 도(道)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와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석학이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퇴계가 도산에 삼간 초당을 짓자 도산서당에는 배움을 청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 점에서 도산서당은 퇴계학의 본산이며 퇴계학파 형성의 근원이 되었다.
남명은 1560년에 수십년 간 독서하고 가르치던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지리산 아래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정했다. 이를 계기로 진주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됐다. 산해정에서 산천재로 이어지는 남명의 행보는 남명학파 중심지의 이동인 동시에 학파의 거대한 확장 과정이었다.
성주(星州)를 기준으로 하는 상도(上道)의 준재들은 퇴계 문하로 흡수되어 갔고, 하도(下道)의 영재들은 남명 문하로 규합되어 갔다. 물론 정구(鄭逑) 정탁(鄭琢) 김우옹(金宇옹) 등과 같이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형성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생전에 단 한번도 만난 적은 없어
퇴계와 남명도 학자요 지성인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었다. 이들에게도 상대를 의식하는 경쟁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은 동도동경의 인연과 양대 학파의 종사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에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1569년 서울 장의동(壯義洞)에서 열린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돼 수연첩(壽宴帖)에 이름이 올라 있으므로 이때 혹시 상면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경쟁심은 각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종사로서 이미지가 강화되던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양인은 평소 서로를 북두성에 비기며 예우와 존경의 마음을 다하였고, 편지를 통해 ‘천리신교’(千里神交)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태도와 삶의 방식이 달랐다. 이것이 두 사람의 자존심 또는 라이벌 의식과 접합되면서 서로에 대한 비난과 풍자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남명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특립독행’(特立獨行: 혼자 자립하여 고고히 실천함)일 것이다. 퇴계는 바로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남명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고, 학문적으로도 찬성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그는 남명을 두고,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의 학문)에 물든 병통이 있다”는 말로써 그의 삶의 자세와 학문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 말을 들은 남명 역시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는 말로써 퇴계를 비꼬았다.
이런 와중에 두 사람의 불화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정(李楨)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천 사람인 이정은 남명의 지우였으나 이른바 ‘음부사건’(淫婦事件)을 통해 남명과 결별하고 퇴계 문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음부사건이란 진주의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후처가 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서 윤리와 강상을 중시했던 남명에게는 결코 묵인될 수 없는 ‘강상(綱常)의 변(變)’이었다. 남명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정에게 여러 차례 자문했다. 그러나 이정의 태도가 불분명할 뿐더러 여러 번 입장을 번복하자 남명은 특유의 강단이 발동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당황한 이정은 퇴계 문하에 나아가 문인을 자처하고, 퇴계 역시 이정을 두둔해 퇴계와 남명 사이의 불화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퇴계가 이언적(李彦迪)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를 매우 추앙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앙금을 만들게 됐다. 남명은 평소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의 처신을 보고 그를 진정한 선비로 대하지 않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선생으로 칭하면서 극도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퇴계와 남명 사이에는 때로는 가시적이고 때로는 내재적인 불만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자잘한 비난을 삼가며 거유(巨儒)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퇴계-남명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가지는 학문적 포용성과 유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1570년 퇴계의 부음을 접한 남명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았구나!” 하는 말로써 자신의 말년을 예언하기까지 했다. 이런 예언은 어긋나지 않아 남명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571년 만년의 강학처인 산천재에서 고종명(告終命)함으로써 16세기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두 석학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한 해 차이를 두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의 죽음이 학파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사후에 문인-제자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형성돼 스승의 학문을 계승-발전시키면서 이 시기의 사상계를 주도하게 됐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분열되면서 영남학파는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원래 역사적 용어로서의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칭하는 말이었고, 그 종사는 바로 퇴계와 남명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한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하여 1585년 동서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유성룡 김성일 우성전은 퇴계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고, 정인홍 김우옹 정탁 오건 등은 남명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 중에는 퇴계 문인들이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은 남명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퇴계 문하의 학술적 분위기가 고급 관료의 양산으로 나타나고, 남명 문하의 실천적 성향이 의병활동의 적극성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서분당 이래 동인으로 활동하던 두 문인들은 1591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서게 됐다. 정쟁의 와중에서 남인-북인으로 갈라진 문인들은 각기 유성룡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치열한 대립을 벌이면서, 스승들의 문집 간행과 서원 건립을 통해 퇴계와 남명의 현양사업(顯揚事業)에 서로가 박차를 가하게 된다.
남인-북인으로 나뉘어 學脈 이어가
이러한 경쟁의식은 두 문하의 수제자격인 유성룡과 정인홍의 대립으로 심화됐고, 급기야 1610년 사림 오현의 문묘종사를 계기로 극도에 달하게 됐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사림 오현의 이름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남명이 여기서 제외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의 허물을 비방한 이른바 ‘회퇴논척’(晦退論斥)을 단행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청금록에서 삭제됐지만, 대북 정권의 당국자로서 정치적 타격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이 몰락하고 정인홍이 처형되자 남명학파는 존립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정인홍의 잔당’이라는 비난을 우려한 남명학파의 상당수 인사들은 정인홍과의 사제관계를 부정하고 정구(鄭逑)를 매개로 퇴계학파에 연원을 붙이는 현상이 속출했다. 후일 영남학파가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진양하씨 창주파(晉陽河氏 滄洲派), 해주정씨 농포파(海州鄭氏 農圃派), 청주한씨 조은파(淸州韓氏 釣隱派), 창녕성씨 부사당파(昌寧成氏 浮査堂派)처럼 서인으로 전향한 계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한 안동 지방의 퇴계학파와는 달리 진주지역에 남인과 노론이 병존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퇴계와 남명은 영남이라는 동일한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리고 16세기라는 동일한 시대를 살며 각기 도덕과 경의를 학문의 모토로 삼아 영남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고조시킨 영남학파의 양대 준령이었다. 한 사람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를 추구했고, 한 사람은 지행합일에 바탕을 둔실천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학문적 지향점이 서로 달랐지만, 본령에 충실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는 퇴계와 남명이 살았던 당대에는 규모와 비중이 대등했으며, 퇴계-남명 사이의 약간의 불화에도 상호간의 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사후, 정쟁의 와중에서 문인들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됐고, 퇴계-남명에 대한 문인 상호간의 비방이 격화되면서 점차 화합할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어 갔다. 여기에 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생기면서 남명학파는 심하게 분열하여 현격히 위축되었으며, 이런 연장선상에서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진주 일대에는 17세기 후반 이래 남인-노론이 병존하며 갈등과 반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남인이든 노론이든 남명 자신에 대한 극도의 추앙과 존경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물론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http://www.hisplace.co.kr/ )
☞ 선생의 최후
선비의 인품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부터 병환으로 강학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趙穆) 등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하였다.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책을 모두 돌려보내게 했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했다.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늦게 도산으로 돌아와 은거한 진성이씨의 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히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전적을 맡게 하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일생은 오직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러한 생활이 그대로 죽음의 순간까지한치의 허트러짐이 없이계속된 것이다.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시고, 학문을 논할 기력이 다했을 때에는 마지막으로사랑하고 아끼던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이제 선생에게 더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종기(考終記)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의 병이 위독했을 때 가족들이 조상과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는데 선생이 이것를 아시고 그러지 말라고 중단을 시켰다고 한다.
평생을 올바르게 살고 이제 하실 일 다 하였으니 더 바랄 것도 더 구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은 생전에도 남의 비웃음을 살 일이라곤 아예 없었거니와 돌아가신 후에까지도 행여나 잘못됨이 있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까지도 스스로 마련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유언에서 밝혔듯 돌아가신 후 비문의 기록이 혹 자신을 과장표현할까 저어하여 손수 비문까지 미리 마련해두려고 했으나 미처 못하고 명문(銘文: 自銘)만을 남기셨다. 선생이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손수 지으신 “자명(自銘)”은 이러하다.
“나면서부터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았는데.
중년에는 어찌해 배우기를 좋아하고 다늦게 벼슬을 탐했던고.
학문의 길은 갈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마다해도 자꾸만 내려지네.
나아가기 어려워 물러나 지냈었네.
나라 은혜 생각하면 부끄럽고 성현 말씀은 두려웁네.
산은 높디 높고 물은 흐르고 흐르는구나.
모든 것 다 떨쳐버리고 노니니 세상비난도 벗어났네.
내 생각 남 모르는데 내 뜻 누가 즐기랴?
옛 분들 생각하니 내 마음 꿰뚫었네.
오는 세상엔들 오늘을 알리 없으랴?
근심 가운데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조화따라 돌아가리니다시 바랄 것이 무엇이랴? ”
生而大癡 壯而多疾(생이대치 장이다질)
中何嗜學 晩何?爵(중하기학 만하도작)
學求愈邈 爵辭愈?(학구유막 작사유영)
進行之겁 退藏之貞(진행지겁 퇴장지정)
深?國恩 亶畏聖言(심참국은 단외성언)
有山억억 有水源源(유산억억 유수원원)
婆娑初服 脫略衆?(파사초복 탈략중산)
我懷伊阻 我佩誰玩(아회이조 아패수완)
我思古人 實獲我心(아사고인 실획아심)
寧知來世 不獲今兮(영지내세 불획금혜)
憂中有樂 樂中有憂(우중유락 낙중유우)
乘化歸盡 復何求兮(승화귀진 복하구혜)
퇴계선생은 마치 우리 선조들이 당신이 입고 갈 수의(壽衣)를 손수 한땀한땀 지어 놓고 떠나시듯,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차근차근 이루어 놓으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진 ↑ ‘雪嶽峰頂秋氣淸’ 玄艸 이유태 그림)
(사진 ↑최근 퇴계선생 묘역에 세운 자명시)
☞ 영남 유학의 산실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닦으시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선생은 중종, 명종, 선조 세 임금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계의 부흥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尙德祠)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典敎堂)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서원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진↑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는 농운정사)
안동을 떠나 봉화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도산면 토계리(陶山面 兎溪里)에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을 모신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나타난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일컫는 말)이라고 전서체(篆書體)로 새긴 까만 비석과 만나게 되는데 이 지방 사람들의 자부심을 짐작케 하는 표석이다.
퇴계는 본래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뒤 그가 61세 되던 1561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세 칸 한옥이었다. 온돌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었는데 공부하는 유생들이 몰려들자 그들을 위해 선생이 직접 설계하시고, 공부하라는 뜻이 담긴 "工" 자형의 독특한 건물 여덟 칸을 지어서 농운정사(壟雲精舍)라고 이름하였다.
농운정사 앞쪽 한켠에는 정사성(鄭士誠)이라는 선비가 입학할 때 그 아버지가 지어서 기탁했다는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다.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배워서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樂乎)라고 한 공자의 말씀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진↑ 역락서재)
퇴계의 생존시에 있었던 건물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 위로 올라가서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典敎堂)과 유생(儒生)들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東齋, 西齋)가 있고, 그 위쪽 높은 곳에 상덕사(尙德祠)라고 이름한 퇴계의 사당이 있어서 전형적인 서원의 구도를 이루었으며, 이 도산서원이 뒤에 모든 서원의 모본(模本)이 되었다고 하는데 선생이 70세에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난 1575년, 제자들이 선조(宣祖)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전교당에는 선조가 지켜 보는 앞에서 당시의 명필 한석봉(韓石峯, 조선 중기 명필)이 썼다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 글씨의 한 두 획이 좀 떨린듯 싶은 부분이 있어 “명필도 임금 앞에서는 긴장해서 글씨가 약간 떨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도산서원에는 그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지어진 부속 건물들이좁은 공간에 들어 차 있다. 향사에 쓰일 제수를 장만하는 등 이를 주관하는 전사청(典祀廳)과 퇴계에 관련된 각종 서적 4,000여 권을 보관하고 있는 서고(書庫), 서적을 찍어낸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을 관리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장만하던 고직사(庫直舍), 최근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적 정비사업을 전개하면서 지은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등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도산서원이 갖추고 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서원의 역할과 기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현(先賢)의 향사(享祀)를 받드는 종교적인 전당(殿堂)이요, 후학을 길러내는 사립학교(私立學校)이며, 각종 도서를 수집, 보관, 관리하는 도서관(圖書館)이었고, 서책을 찍어 내는 인쇄소(印刷所)이기도 하였다.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돋자리, 명아주대로 만든 청려장(靑藜杖), 매화문 벼루와 서궤(書机) 등 선생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이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의 대표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그리고 쓴 병풍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매화음주시(梅花飮酒詩) 등의 족자가 걸려 있다. 퇴계선생의 매화사랑은 너무도 각별해서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 남기신 말이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는 말이라고 한다.
서원을 나와 안동호(安東湖)를 내려다 보면 호수 가운데 섬처럼 솟은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고, 그 위에 정자가 서 있는데 이곳이 시사단(試士壇)이다. 이 시사단은 뒷날 정조(正祖)가 영남 선비들을 위해 이곳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베풀었는데 응시자가 너무도 많아서 서원에서 과거를 다 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 강변에서 과거를 치렀고,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전각을 지은 것이 이 시사단이라고 한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물 가운데 분리되어 있어서 이곳에 가려면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사진↑ 도산서원 앞에 인공으로 쌓은 시사단)
이 도산서원 전체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사당인 상덕사와 태극마크가 선명한 전교당 정문은 보물 제211호이다.
(출처: http://pwj32.com.ne.kr/4/4_2_5.htm)
☞ 도산서원 부속 건물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광명실, 전교당(보물 제210호), 상덕사(보물 제211호), 장판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0년에는 서원을 보수하였고, 이 때 옥진각을 건립하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였다. 서원의 맞은 편에는 시사단이 있고(유형문화재 제33호), 근처에는 퇴계선생의 종택(기념물 제42호)과 선생의 태실(민속자료 제60호) 그리고 묘소가 있다.
도산서원은 경관이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고 최근에는 안동댐 물이 서원 바로 밑까지 들어차 앞에는 푸른 안동호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어서 멋과 서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탐구와 인재 양성에 힘써 한국 유학사상의 큰 줄기를 이룩한 대학자이다. 주요 저서로는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등이 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유생들을 모아 교육하던 곳으로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작은 건물이며 선생의 실천적 학문과 검소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이곳은 도산서원의 바탕이 되는 곳으로 퇴계 선생이 4년여에 걸쳐 지은 건물이다. 선생은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몸소 거처하기도 했는데, 선생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던 방을 '완락재(玩樂齋)'라 부르고,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하였다.
농운정사는 선생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일종의 기숙사이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자 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전교당(典敎堂)은 진도문(進道門) 안 정면에 위치하며 도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데, 각종 행사시 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전면에는 당대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글씨인 ‘陶山書院’(도산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동·서재(東·西齋)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전교당 앞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똑같은 건물로 동쪽이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이 홍의재(弘毅齋)이다. 광명실(光明室)은 도산서원 정문인 진도문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장서고이다. 이곳에는 역대왕의 내사서적과 선생께서 친히 보시던 수택본, 퇴계서초, 기타 서책 등 1,300여 종 5,000여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藏版閣)은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출판소로서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퇴계의 문집, 유묵, 언행론, 도산십이곡, 선조어필 등 2,790여 장의 병서(屛書), 액자(額字), 책(冊)의 판각(板刻)이 소장되어 있다. 상덕사(尙德祠)는 건물 가장 뒤쪽에 있으며,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위패를 봉안한 신성한 장소로,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례가 엄숙히 거행된다. (사진→ 선생이 즐겨 다니시던 천연대 위의 산책길)
전사청(典祀廳)은 상덕사 서편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물로 향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던 곳으로, 평소에는 사당(祠堂)지기가 수직(守直)하는 곳이며, 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가 있다. 옥진각(玉振閣)은 고직사 아래에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건립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 건물이다. 청려장(靑藜杖), 매화등(梅花燈), 투호(投壺), 혼천의(渾天儀), 그리고 성학십도(聖學十圖),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선생문집, 심경후론, 계몽전의 등의 서적류와 실내비품, 문방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역락서재(亦樂書齋)는 서원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건물로 선생의 제자 정지헌(鄭芝軒:士誠)을 선생에게 취학시킬 때 지헌의 부친이 지어준 집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시사단(試士壇)은 도산서원의 맞은 편에 안동호를 배경으로 떠 있는 곳인데, 평소 퇴계 이황의 학덕을 흠모하던 정조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유림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이다. 그 외에도 선생이 산책하던 천연대와 운영대, 석간대 등이 둘러볼 만하다. (관리인 전화번호: 054) 856-1073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61)
(출처: http://www.gbtour.net/Nadri/EsResource_view?p_resource_no=6071)
(사진↑ 도산서원 원경)
1501년 1세 연산7년 辛酉 음11월 25일 진시(辰時, 아침 8시경)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溫溪里 ; 현재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나다. 1502년 2세 연산8년 壬戌 6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식(埴) 별세하다. 1506년 6세 중종원년 丙寅 이웃노인에게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등을 배우며 처음으로 글을 깨치다. 1512년 12세 중종7년 壬申 숙부 송재공(松齋公) 우(우)에게 「논어」를 배우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옳은 것이 '이(理)'가 아닙니까?"라고 물어 송재공을 크게 놀라게 했다. 송재공은 성격이 엄숙하여 칭찬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 선생이 형 대헌공(大憲公) 해(瀣)와 함께 글을 배울 때에 송재공은 늘 칭찬하여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1514년 14세 중종9년 甲戌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앉은 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책을 보다. 1520년 20세 중종15년 庚辰 「주역」을 읽고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먹고 자는 일을 잊다. 이때부터 늘 파리하고 초췌한 병을 지니게 되었다. 후에 「조사경(趙士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어린 나이로 일찍이 망령되게 큰 뜻을 두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라 각고가 너무 심해 파리하고 초췌해지는 병을 얻었다"라고 한 바 있다. 1521년 21세 중종16년 辛巳 진사(進士)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23년 23세 중종18년 癸未 10월에 아들 준(寯)이 태어나다. 이 해에 비로소 성균관에 유학(遊學)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친 이 시기,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던 터라 오히려 선생의 행동거지에 법도(法度)가 있음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다. 뜻을 알아준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뿐이다. 1527년 27세 중종22년 丁亥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生員) 제2위에 합격하다.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나다. 11월 7일 허씨 부인이 죽다. 1530년 30세 중종25년 庚寅 봉사(奉事) 권질(權질)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31년 31세 중종26년 辛卯 측실(側室)에서 아들 적(寂)이 태어나다. 1532년 32세 중종27년 壬辰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科擧)에 나가 문과(文科) 별거(別擧)의 초시(初試)에 2위로 합격하다. 1533년 33세 중종28년 癸巳 반궁(泮宮, 성균관)에 유학하다. 경상도 향시에 1위로 합격하다. 충재(충齋) 권벌(權벌)을 따라 여주(驪州) 이호촌(利湖村)에 살고 있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뵙다. 선생은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소 정인(正人) 군자(君子)의 언론(言論)을 들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詩 吉先生閭. 月影臺. 矗石樓. 1534년 34세 중종29년 甲午 3월에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임명되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등의 요직을 겸임하다. 1535년 35세 중종30년 乙未 6월에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인(倭人)을 동래(東來)로 보내다. 여주를 지나다 목사(牧使) 이순(李純)과 함께 신륵사(神勒寺)에 노닐면서 시를 짓고, 이 길에 고향에 들러 어머니 산소를 뵙고 돌아오다. 詩 驪州牧李公純. 訓導李. 遊神勒寺. 臨風樓. 嶺南樓 1536년 36세 중종31년 丙申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겸중학교수(成均館典籍兼中學敎授)를 거쳐 9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다. 詩 歲季得鄕書書懷. 感春. 安東愛蓮堂. 雨留新蕃縣 1537년 39세 중종34년 丁酉 선교랑(宣敎郞),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議郞)이 되었으나 10월15일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일시 물러나다. 1539년 39세 중종34년 己亥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修撰) 지제교(知濟敎)로 승진되고 경연(經筵) 검토관(檢討官)을 겸임하다. 1540년 40세 중종35년 庚子 1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오른 후 봉훈랑(奉訓郞) 봉직랑(奉直郞)을 거쳐 승문원 교검(校檢),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고 10월에 교리(校理), 11월에 통선랑(通善郞)이 되다. 1541년 41세 중종36년 辛丑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고, 10월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다. 6월 4일 손자 안도(安道) 출생. 詩 義州雜題十二絶. 聚勝亭韻奉別洪公. 平壤練光亭陪監司尙公震夜. 書堂次金應霖秋懷. 讀東國史用應霖韻. 夕霽舟上示應霖·景說. 南樓壁上有六言四韻 次韻 示二君. 九月七日午憩臨津亭. 1542년 42세 중종37년 壬寅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바로 어사(御使)로 임명되어 충청도 군읍(郡邑)의 흉년 구제사업을 순찰하고 상경하였다.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晦齋) 이선생을 전송하다. 통덕랑(通德郞)이 되어 사인(舍人)에 승진되다. 8월에는 고향에 돌아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을 전송하다. 12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다. 詩 玉堂春雪用歐公韻. 泰安曉行 憶景明兄. 宿淸風寒碧樓. 鎭川東軒. 蓮亭小集. 秋日南樓晩霽. 湖上園亭偶出效康節體. 與諸君同登狎鷗亭後岡. 原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 次樓韻留贈. 酒泉縣酒泉石姜晉山韻. 錦江亭. 洪川三馬峴用景明兄竹嶺途中韻. 過淸平山有感 1543년 43세 중종38년 癸卯 2월에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임하다. 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조봉대부(朝奉大夫), 승문원 교감(校勘), 시강원 필선(弼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 사간(司諫), 성균관 사성(司成) 등 여러 직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11월에 다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이 때의 일을 뒤에 남명(南冥) 조식(曹植)에게 보낸 편지에서 "벼슬자리를 피하여, 옛 서적을 안고 고향의 산중에 돌아가 미처 이르지 못한 공부를 매일 한치씩 쌓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詩 奉酬聾巖李先生靈芝精舍詩. 題林士遂關西行錄後 二首. 當軒綠叢花 四季. 九月獨登書堂後翠微寄林士遂 四首. 送金厚之修撰乞假歸觀 仍請外補養親 恩許之行. 湖堂梅花暮春始開 用東坡韻 二首. 1544년 44세 중종39년 甲辰 홍문관 교리와 응교(應敎), 사헌부 장령, 경연 시강관(侍講官),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승문원 교감 등 여러 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9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1월에 중종(中宗)이 승하(昇遐)하자 상경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부고(訃告)와 시호(諡號)의 두 표문(表文)을 지어 중국예부관원들을 감탄시키다. 詩 湖堂曉起 用東坡定惠院月夜偶出韻. 次韻答金應霖 林士遂在東湖見寄 二首. 七月望日 狎鷗亭卽事 四首. 晩步. 登狎鷗亭後岡 憶應霖 士遂 吉元 四首. 夜起有感. 大雷雨行. 剪開檻外樹作. 奉贈圭庵宋眉 以冬至副使赴京. 1545년 45세 인종원년 乙巳 정월에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다.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 봉정대부(奉正大夫),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 중훈대부(中訓大夫),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등을 지내다.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疏)를 올리다.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옹원정(司饔院正), 사복시정, 승문원 참교(參校) 등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많은 직을 사임하다가 11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영접도감(迎接都監) 낭청(郎廳)에 임명되다. 사림파(士林派)들을 몰아내려는 이기(李기)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교리(校理) 이원록(李元祿)의 간청으로 다시 첩지(牒旨)를 받다. 詩 送林士遂以迎詔使從事赴義州三首. 1546년 46세 명종원년 丙午 2월에 장인 권질(權질)의 장사를 지내다. 7월에 부인 권씨가 죽다. 8월에 교서관(校書館) 교리, 승문원 교리를 겸직하다. 11월에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곁에 작은 암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학문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다. 詩 望湖堂梅花. 再用前韻 答景說. 兜觀院溪上 奉懷家兄話別於東郊 二首. 寓月瀾僧舍書懷 二首. 以事當還鄕 至榮川病發輟行 留草谷田舍. 孟夏二十五日 入龍壽寺 馬上記黃敬甫. 晨至溪莊 偶記東坡新城途中詩 用其韻 二首. 聾巖先生愛日堂 用李復古先生韻. 士遂寄詩次韻. 東巖言志. 獨遊孤山 至月明潭 因 水循山而下 晩抵退溪 每得勝境 卽賦一絶 凡九首. 後又得二勝. 1547년 47세 명종2년 丁未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8월에 홍문관 응교(應敎)를 받아 부임,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자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에 다시 제수되다. 詩 踏靑登霞山. 淸吟石. 題黃仲擧方丈山遊錄. 和西林院詩韻 二首. 雨晴述懷. 戱作七臺三曲詩. 閒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古意. 玉堂宣 後 出書堂 馬上作. 次韻閔景說 景霖 二首. 雪竹歌. 冬日甚雨 已而大雪 喜而有作. 上聾巖李先生. 病中讀史有感 三首. 樂山南景霖在書堂 雪中寄松酒兼律詩 次韻 寄. 1548년 48세 명종3년 戊申 정월에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단양군수에 임명되다. 정사(政事)가 투명하고 간결하여, 아전들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다. 2월에 둘째아들 채(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되다. 詩 赴丹山書堂朴仲初左通禮閔景說正南景霖正尹士推典翰餞席留贈. 洛生驛樓次金應霖贈別韻 二首. 鄭吉元韻. 馬上次閔景說. 二月一日郡齋 雨中得洪退之見寄 次韻. 買浦滄賑給暮歸馬上. 島潭二絶. 仙巖. 馬上. 二樂樓 次東坡黃樓詩. 花灘. 舟中. 龜潭. 伏聞重新愛日堂 上聾巖先生. 1549년 49세 명종4년 己酉 4월에 소백산을 노닐고, 9월에 병으로 감사에 사직서를 올리다. 12월에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관내(管內) 백운동(白雲洞) 서원의 편액(扁額)과 필요한 서책을 조정에 청하였던 바, 조정에서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고, 「사서(四書)」·「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典)」등의 책을 보내왔다. 서원의 흥성(興盛)이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다.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감사의 허락도 없이 시골집으로 돌아와버렸다. 詩 白雲洞書院示諸生. 答周景遊見寄 二首. 石崙寺效周景遊次紫極宮感秋詩韻. 紫蓋峯. 國望峯 三首. 答尙牧金季珍. 郡齋 有感小白山之遊 追次景遊用昌黎衡岳詩韻. 郡齋移竹. 浮石寺聚遠樓 鄭湖陰贈僧韻. 八月十五日夜陰. 十月十日夜 大雷雨. 十一日曉地震 三首. 池方寺瀑布 二首. 1550년 50세 명종5년 庚戌 정월에 임소(任所)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고신(告身) 2등을 삭탈 당하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아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각지에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날로 늘어나다. 농암(聾巖) 이공(李公)을 분천(汾川)에 가 뵙다. 4월에 한서암 앞에 있는 광영당(光影塘) 연못을 파다. 8월에 형 좌윤공(左尹公) 해(瀣)의 부음(訃音)을 듣다. 詩 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 移草屋於溪西 名曰寒棲庵. 三月三日 雨中 寓感 用丁未踏晴韻. 拜聾巖先生 先生令侍兒 歌東坡月飮杏花下詩 次其韻詩之 滉亦奉和 呈上. 退溪. 寒棲. 溪居雜興 二首. 寒棲雨後書事. 和陶集移居韻 二首 五月十八日. 和陶集飮酒 二十首. 七月七日作 閒許南仲遷謫. 偶讀宋潛溪靜室詩 次韻示兒子寯閔生應祺 二首. 1551년 51세 명종6년 辛亥 벼슬하지 않고 집에 거처하며 여러 사람과 시를 주고받다. 詩 十六日雨 辛亥正月. 和老杜幽人. 十六日夜大風寒. 十八日朝晴 感興. 二十日 又雨夜大風. 閒居次趙士敬 具景瑞 金舜擧 權景受諸人 十四首. 有嘆. 淸明 溪上書堂 二首 撤寒棲 移構小堂於溪北 次老杜韻. 春日閒居 次老杜六絶句. 聾巖李先生來臨溪堂. 十一日夜 陪聾巖先生 月下飮酒杏花下 用東坡韻. 溪堂偶興 十絶. 次趙監司季任 上聾巖先生韻. 次季任 密陽嶺南樓 和朴昌世詩 二十二韻. 七月十三月夜. 次金惇 讀書有感韻. 次韻答新寧宰黃仲擧. 1552년 52세 명종7년 壬子 4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로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승문원 교리를 겸임하게 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다. 7월에 통정대부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11월에 병으로 사임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다. 詩 正月二日立春 壬子. 上元日 遇李庇遠於溪路 同行卽事. 上元夜 溪堂對月. 次韻 答李靑松公幹 二首. 滉將拜聾巖於臨江寺 其夜有雪 先生朝遺僧以一絶速之 謹奉和 先以呈上. 暮歸馬上. 李大成來訪溪堂. 淸吟石. 答友人 丁季晦時謫巨濟. 四月初一日溪上作. 答黃仲擧. 幽居 示李仁仲 金信仲. 溪堂前方塘 微雨後作. 四月八日感事 國俗 以是日釋迦生 稱爲節日. 次韻寄題黃仲擧新構竹閣 夏赴都後. 八月十五日夜 西軒對月 二首. 次韻友人 二首. 1553년 53세 명종8년 癸丑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7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다. 8월에 친시 대독관(親試對讀官)에 선출되다. 9월에 충무위(忠武衛) 상호군에 임명되다. 10월에 정지운(鄭之雲)의「천명도(天命圖)」를 개정하다. 1554년 54세 명종9년 甲寅 2월부터 동궁(東宮)과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진도(珍島)에 귀양가 있는 이재(伊齋) 노수신(盧守愼)과 편지로「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註解)를 논하다. 손자 순도(純道) 출생. 1555년 55세 명종10년 乙卯 2월에 강녕전(康寧殿)에 「7월편」을 써 올리다.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했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향리로 돌아오다. 6월에 농암(聾巖)이 별세하여 그의 행장을 짓다. 겨울에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산을 노닐며 여러 시를 짓고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다. 1556년 56세 명종11년 丙辰 5월에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부름을 받았으나 거듭 사표를 내다.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편차(編次)를 완성하다. 12월에 향약(鄕約)의 초안(草案)을 만들다. 향약모임에 귀천의 신분을 떠나 연령순으로 좌석을 정하기로 했는데 반대의견이 많았다. 선생은 자기 주장을 역설했으나 제자들마저 따르지 않자 거두어들이고 중론(衆論)에 따랐다. 1557년 57세 명종12년 丁巳 3월에 「수곡암기(樹谷庵記)」를 짓다. 도산(陶山)의 남쪽에 서당 자리를 마련하다. 7월에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다. 1558년 58세 명종13년 戊午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12월에 임금이 특별히 친필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에 제수하다. 세 차례에 걸쳐 사임의 뜻을 전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일단 상경하여 부임하다. 1559년 59세 명종14년 己未 2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병을 얻어 서장(書狀)을 올려 관직을 사임할 것을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동지 충주부사에 제수되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고, 편액을 쓰고 서원(書院)의 규약을 정하다. 12월에「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2월 26일 손자 영도(詠道) 출생. 1560년 60세 명종15년 庚申 정월에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발(跋)을 쓰다. 11월에「답기명언서(答奇明彦書)」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변론하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이루어지다. 이때부터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고, 서당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방은 '완락재(琓樂齋)'라 하였다. 1561년 61세 명종16년 辛酉 3월에 도산서당 왼쪽에 석축으로 절우사(節友社)를 만들다. 각처에서 모여든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연(自然) 속에 우유(優遊)하였다. 11월에 「도산기(陶山記)」를 짓다. 1562년 62세 명종17년 壬戌 3월 3일 도산에 나와 배를 타고, 청계(淸溪)에 이르러 시냇가에 대를 쌓고, '청계대(淸溪臺)'라 이름하다. 귀암(龜巖) 이정(李禎)이 방문하고 며칠 후에 돌아가는데, 석간대(石澗臺)에서 송별하다. 1563년 63세 명종18년 癸亥 3월에 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글을 지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그의 행장을 짓다. 1564년 64세 명종19년 甲子 4월에 여러 제자들과 시를 지으며 청량산을 노닐다. 9월에 정암(靜菴)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에 대한 변박(辨駁)의 글을 짓다. 1565년 65세 명종20년 乙丑 4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명(職名)을 사임하는 글을 올려 허락받다. 「경재잠도(敬齋箴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명당실어(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 위에 걸다. 8월에 제자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講論)하고, 『경현록(景賢錄)』을 개정하다. 12월에 특명으로 소환(召還)되어 동지충주부사로 다시 임명되다. 1566년 66세 명종21년 丙寅 여러 관직을 제수받고 왕으로부터 특명이 내려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서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다.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儒臣)들과 화공(畵工)을 내려보내 「도산기(陶山記)」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애완하였다. 10월에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의 행장을 짓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짓다. 1567년 67세 명종22년 丁卯 5월에 올라오라는 임금의 교지(敎旨)가 있었다. 6월에 부름에 응하여 서울에 들어가다. 명종이 승하하다. 7월에 예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퇴, 그밖에도 동지 경연 춘추관사, 동지 중추부사 등 수많은 관직의 제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사임을 간청하고 귀향하다. 9월에 기명언(奇明彦)의 편지에 답하다. 1568년 68세 선조원년 戊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다. 6월에 왕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면서, 길에서 잇달아 표문을 올려 다시 숭품을 사양하고 직품을 모두 개정해주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병인일(丙寅日)에 서울에 들어가다. 재임 중에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리다. 12월에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제왕학(帝王學)을 열 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가납(嘉納)하여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다. 1569년 69세 선조2년 己巳 정월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숙배(肅拜)하지 않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였더니 사면이 허락되었으나 다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다.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자 대궐로 들어가 성은(聖恩)에 감사하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뢰는 등 거듭거듭 차자(箚子)를 올리다. 1570년 70세 선조3년 戊午 9월에 도산에 나가 제생(諸生)과 『계몽(啓蒙)』·『심경(心經)』을 강론하다. 10월에 기명언(奇明彦)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심성정도(心性情圖)」를 논하다. 11월에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가 신병(身病)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제자들을 돌려보내다. 12월에는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있는 아들 준(寯)을 불러 장사 준비를 갖추게하고, 형의 아들 영(영)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유계(遺戒)를 쓰도록 명하고,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음 12월 8일 오후 6시경)에 정침실(正寢室)에서 고요히 세상을 떠나다. 부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영의정에 증직(贈職)을 명하다('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를 추증하다). 1571년 사후 1년 선조 4년 辛未 3월 임오일(壬午日)에 예안(禮安) 건지산(건芝山) 남쪽에 장사지내다. 1573년 사후 3년 선조 6년 癸酉 11월 초하루 위패(位牌)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奉安)하고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다. 1574년 사후 4년 선조 7년 甲戌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던 곳으로 서원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봄에 서원을 도산서당 뒤쪽에 세우기로 하다. 1575년 사후 5년 선조 8년 乙亥 여름에 도산서당 뒤에 서원이 낙성되니, 조정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다. 1576년 사후 6년 선조 9년 丙子 2월 정축일(丁丑日)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하다. 이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도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다. 11월에 문순(文純)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다. 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중정정수(中正精粹)를 순(純)이라고 하다. 1596년 사후 26년 선조29년 丙申 윤(閏) 8월 무인일(戊寅日)에 지석(誌石)을 묻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
☞ 참고자료
1. 퇴계 이황선생묘 답산기,2. 퇴계를 찾아서(묘소와 종택) 3.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사이트) 4. 진성이씨대종회(사이트) 5. 도산서원(陶山書院)(사진) 6. 도산서원의 도산매 7. 퇴계와 매화 8. 퇴계 이황의 글씨9. 묘갈명에 얽힌 퇴계 이황의 인격 10. 퇴계의 유언 11. 퇴계선생 묘소12. 퇴계 이황선생 자명시13. 현초 이유태 화백의 동양화14. 도산서원 사진
□ 배경 음악/ 김영동 작곡 ‘청초의 계곡’
□ 내용 구성, 한시 변역/ 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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