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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그리운 선조] 3. 퇴계 이황(退溪 李滉)

잠용(潛蓉) 2012. 10. 21. 20:37
[그리운 선조 3]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선생이 그토록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너는 부디 한 고을을 다스릴 벼슬에만 머무르라’는
어머님의 간곡한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 한 것이기도 하였다.
평생을 경(敬)과 신(愼)으로 단련한 몸가짐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으로 절제된 군자의 참 모습을 제자들과 후세에 보여 주었다.”


이황(李滉, 1501~1570)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1501년(연산군 7)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7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가문이긴 하나 풍족하지 못한 집안이었고 진사였던 아버지 이식(李埴)은 퇴계가 출생한지 7개월만에 별세하였기에 퇴계는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엄한 어머니 밑에서 여섯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숙부로부터 초보적인 학습지도만을 받았을 뿐 그 이후로는 스승없이 독학하였다. 또한 20세 때에는 잠 자는 것, 밥 먹는 것도 잊고 「주역」을 읽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성리학 탐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진→퇴계 이황 영정, 玄艸 이유태 그림)

21세에 결혼하여 27세 되던 가을에 향시를 비롯하여 진사 회시(28세), 문과 별시(32세), 경상도 향시(33세)등을 거쳐 34세 때(중종 29년) 대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관직에 나가게 된다. 이때는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조정을 떠난지 오래되고 바른 말 하는 관료들도 드물었으나 이황은 43세까지 관직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중종이 죽고 인종도 죽어 명종이 즉위하며 문정왕후가 8년 동안 대신 정치하면서도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았고, 이황도 이에 연루되어 여러 번 관직을 내놓았던 복잡한 사회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는 관리보다는 참다운 학자로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 짐작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 당시로 되돌아가 퇴계선생의 일생을 편린(片鱗)이나마 다시 한번 느끼고 공감해 보고자 한다.



(사진 ↑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조선후기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이 1751년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부탁으로 그린 그림이다.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cm로 서원을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에 위치한 탁영담, 애일당, 분천서원 등을 자세히 그리고 그 이름까지 밝혔다.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퇴계선생을 못 잊어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사연이 화제에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522호)


(사진↑ 도산서원 전경,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사적 170호)출처: lemone12)


☞ 퇴계의 생애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李)씨,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성(眞城, 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와 춘천박씨(春川朴氏) 두 분이다. 김씨는 잠(潛), 하(河),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과 의(의), 해(瀣), 징(澄), 황(滉)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선생은 그 막내아들이었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마을에 서당을 짓고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차별하지 않고 정성껏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고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操身)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家法)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낙향해 있던 숙부 송재공(松齋公: 李우, 戶曹參判, 號 松齋)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숙부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옳은 것이 이(理)가 아니옵니까?”하고 물었다. 송재공은 이 말을 듣고 퇴계의 총명함에 크게 놀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공자가 말한 “자식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을 공경하며, 행동을 조심하고 널리 여러 사람을 사귀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하여야 한다”라는 대목을 익히고는 “사람된 도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하고 12세 때 이미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우쳤다 한다.

그리고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6살 때 이미 학자의 법도를 갖추어 매일 아침 자기 혼자서 머리를 빗질하고 몸을 단정히 갖추곤 하였다고 한다. 손윗사람에게는 태도가 공손하였고, 누구에게든 늘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였다. 한밤중에 깊이 잠을 자다가도 윗사람이 부르면 즉각 응대할 만큼 조심성이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특히 형 해(瀣)는 퇴계와 더불어 집안을 빛낼 아이로 일찍부터 촉망받고 있었다. 퇴계와 해는 숙부 송재공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송재공이 퇴계의 관상을 보고 이마가 넓어서 ‘이마가 넓은 아이’라 하여 ‘광상(廣像)’이라 불렀다. 그래서 어린 퇴계를 보고는 늘 “광상이야말로 반드시 우리 가문을 지키고 빛낼 아이니라” 하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넷째 형인 해도 역시 영민하고 똑똑한 것을 꿰뚫어 보고 말하기를, “우리 형님(퇴계의 아버지)께서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영민한 아들들을 두셨으니 결코 세상을 아주 떠나신 것은 아니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집에서 가까운 봉화 청량사(淸凉寺)에 들어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이제는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 성리학설을 집대성한 책. 명나라 永樂帝의 명을 받아 胡廣 등 42명의 학자가 편집하였다.)의 첫 권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마지막 권 ‘시·찬·잠·명·부(詩贊箴銘賦)’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라고 후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周易)'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許氏)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사진→ 퇴계가 소년시절 형들과 함께 공부하던 봉화 청량사의 겨울 정경)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 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후 52세 때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호를 퇴계(退溪)라 하여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조선중기 문신·학자)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부인과 재혼하였으나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고 만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과 계상서당(溪上書堂)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저 유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 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 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돌아가시기 한달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출처: 권오봉 지음 “이퇴계의 실행유학”, 금장태 지음 “퇴계의 삶과 철학”, 윤사순 역주 “퇴계선집”)

☞ 퇴계의 학문과 사상
1. 사상적 원류: 퇴계의 사상적 입장은 정주학(程朱學) 계통에 두어지고 있다. 그는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입장을 바탕에 깔고 그의 성리학을 구축해 간다. 그리하여 그 기초 작업인 유학 고전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학설을 정리하면서 그는 일단 정주의 견해를 근간으로 하여 고전을 해석하고 과거의 성리학설을 정리한다.

2.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구인성성(求仁成聖): 퇴계는 인간고유의 가치와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추구를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학문은 ‘위기지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인(仁)을 추구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구인성성’의 학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이란 자기를 위하는 것일 따름이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장경부의 이른바 함이 없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은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수풀 속에 한떨기의 난초가 있어서 종일토록 향기를 내면서도 스스로는 향기로움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그의 학문적 본령은 우주론적 탐색이나 진리에 대한 개념적 인식에 있기보다는 인간 자신의 주체적 성찰과 실천을 기본으로 한다. 그것은 인간됨과 최고선(最高善)을 추구하는 가치체계의 문제로서,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진→ 조선후기 관아재 조영석 그림, ‘雪中訪友圖’)

퇴계가 추구한 것은 ‘인(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천지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나의 심덕(心德)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리(天理)가 인간에 내재한 것이 인성이다. 인이라는 본성이 어떻게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드러나 사람을 사랑하고 물(物)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결국 심(心)의 체(體)와 용(用)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심덕(心德)'의 성취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의 2원적 특징: 퇴계의 이기론을 살펴보기 전에 이기의 의미부터 간략히 소개하겠다.‘이’는 ‘표준’(極)의 뜻을 전제함으로써 ‘사물의 형식’ 또는 ‘본질’의 뜻을 가진다. 이같은 ‘이’의 총화(總和), 즉 만물을 이루는 ‘이’의 전체가 곧 태극(太極)이라는 것이다. ‘이’의 특성은, 물론 초경험적(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는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지칭되며, 흔히 도(道)로도 대용된다.

반면, ‘기’는 ‘이’와 대조·대비되는 일체의 것을 의미하게 된다. 기는 현상·사물이 실제로 드러나게 되는 ‘존재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질료’(재료)가 기라고 하겠다. ‘이’는 ‘무작위(無作爲)’한 것인데 반하여 기는 ‘유위(有爲)’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는 감각이 가능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라 한다. 가치상으로는 그 자체가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는 가치 중립의 것임은 물론이다. ‘이’와 ‘기’는 사물의 생성,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 뿐,어느 것 한가지만으로는아직 구체적인 사물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론상 서로 떨어져 생각할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떨어져 있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의 사물상으로는 둘이서 함께 하나의 구체적인 사물을 이루며, 어디까지나 함께 있다는 것이다.
(사진↑ 퇴계의 「성학십도」 중 ‘동양 철학의 근원’을 설명하는 ‘太極圖’)

이상과 같은 것이 이기(理氣)에 대한 퇴계의 기초적인 견해이다. 일찍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기(氣)에 치중함으로써 때로는 ‘기’ 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는 기를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기의 작용에 따라 생각될 수 있는, 기 작용의 ‘조리(條理)’ 또는 ‘질서(秩序)’라고밖에 보지 않았다.

화담은 ‘이’를 기 작용의 질서나 조리, 즉 기의 한 가지 속성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기와 대비시키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기를 이원화(二元化) 하지 않았다. 그를 기일원론자(氣一元論者)라 하는 것도 그가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 밖에 ‘이’가 있지 않으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기(氣) 뿐이다. 화담의 경우는 “오직 ‘하나의 기’가 시종도 생사도 없는 상태로 항존(恒存)한다(一氣長存)”는 것이다.

퇴계는 이와 같은 화담의 이기설을 평하여, “기 한편에서만 익숙하여 그 이론이 어쩔 수 없이 ‘이’를 ‘기’인줄 알게 되었다. 또한 때로는 ‘기’를 ‘이’로 말하게 된 것도 있다” 고 설명한다. 화담을 가리켜 이와 기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기 한편에 치우쳤다고 한 것을 본다면 퇴계는 화담보다 ‘이’에 더 치중하는 태도를 취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기’가 어디까지나 두 가지이지 한 가지(一物)가 아님을 주장하여 이기를 이원화 하는 퇴계는 기 자체에 대하여서도 기는 결코 상존·불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가 생멸(生滅)의 성질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퇴계의 경우에는 기는 생멸하는 것이고 ‘이’만이 항존하므로 ‘이’야말로 실재(實在)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기와 관련없는 ‘이’를 상정하게 되었고 그 ‘이’에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4.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 방법론 : 거경과 궁리는 두 가지 공부이면서 호진(互進)하는 관계에 있다. 퇴계가 구하는 것은 한갓 대상적인 지식이 아니며 자기의 성장과 관계되고 또한 자기의 성장과 더불어 알려지는 것이니만큼 진리를 일시에 깨쳐버리겠다는 것은 잘못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조급하게 서두르고 기필(期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마음의 병(心氣之患)을 낳을 뿐이라고 한다.

“마음의 병은 이(理)를 살핌에 투철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에서 억지로 찾으려 하며,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에 어두워 ‘보리싹을 뽑아올려 자라기를 도우려 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괴롭게 하고 정력을 극도로 소모하여 이에 이르게 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처음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自省錄」 卷1, 1면)

퇴계는 이러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도서(圖書)와 화초(花草)의 완상(玩賞)이나 산수(山水)·어조(魚鳥)의 즐거움과도 같이 진실로 정의(情意)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늘 접촉하여 마음을 항상 화순한 상태에 있게 할 것을 권유하였다. 퇴계에 의하면 거경과 궁리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맥락과 단서를 알았으면 억지 탐색과 불필요한 안배(按排)를 가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학문이란 빨리 나아가면 물러서기도 빨리 하는 것이다. 그는 사의(私意)를 가지고 억지로 탐색하고 모색하며 안배하는 습관을 버리고 인지(仁智)에 입각하여 마음을 평탄히 한 다음에 숙독하고 정사(精思)하며, 반복 체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그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계속하여 기질이 변하고 인(仁)이 무르익으면 일생일대의 환희사(歡喜事)를 맛볼 것이라고 하였다. (사진↑ 조선중기 김명국 그림, ‘探梅圖’)

5. 결 론: 퇴계에 의하면 사칠론(四七論) 등 심성에 관한 이론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 목적은 단 하나, “감성적인 욕구(人慾)를 막고, 이성[天理]에 따라 행위하려는”(알人慾存天理)데 있다. 이 ‘알인욕존천리’는 ‘경’의 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경의 태도를 취하면 천리가 무엇인지 마음 속으로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퇴계가 말하는 예란 이미 삼강오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에서는 물론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효와 충의 당위론이었고, 부계사회의 질서 및 유지 발전에 대한 옹호를 의미하게도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발설(理發說)을 중심으로 한 그의 심성설(心性說)은 결과적으로 당시의 체제에 대한 합리화의 의미를 지닌것이며 이상이 퇴계 철학의 성격이라고 하겠다. 살인·강도·성범죄의 증가 등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강력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물질 만능주의가 그 원인이며, 그것은 정보화 사회에 도달한 지금 인터넷 사용의 증가와 함께 날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진→ 퇴계의 「성학십도」 중 ‘인간의 마음(心)이 人性과 感情을 통제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心統性情圖’)

이것은 사상적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순화시켜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사용될 뿐, 그 이상의 작용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신적·육체적으로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퇴계의 학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지금에 와서 ‘이’가 어떻고 ‘기’가 어떻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퇴계의 그러한 순수한 마음을 본 받아 풍부한 물질에 뒤지지 않는 정서적·육체적 안정을 찾고 더욱 발전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 하겠다.

(출처: 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02-2/p6.htm)

영남학파의 두 거두- 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예로부터 영남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했다. 조선시대 사림(士林) 오현(五賢) 중에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4명이 영남 출신이고,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이 배출돼 우리의 사상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曹植) 두 사람은 당대의 사표(師表)로서 늘 병칭됐으며, 각기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종사(宗師)로서 후학들로부터 극도의 추앙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퇴계와 남명은 1501년 동갑내기다. 퇴계는 조선시대 지명으로 경상도 예안현 청량산 자락의 토계리(兎溪里)에서 출생했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昌寧曺氏 1501~1572)은 경상도 지리산 기슭의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동(兎洞)에서 태어났다. 둘 다 영남 출신이며 나이도 동갑이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라고 했다. (사진←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그러나 두 사람은 학자로서의 지향점이나 선비로서의 출처관(出處觀)에서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다. 퇴계가 인의(仁義)를 숭상한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면, 남명은 경의(敬義)를 중시한 기상의 소유자였다. 도산서원의 퇴계사당이 상덕사(尙德祠)로 명명되고, 덕천서원의 동서재에 걸린 경재(敬齋)-의재(義齋)라는 편액은 바로 이들 두 사람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화(梅花)를 사랑했던 퇴계의 심성(心性)과 시퍼렇게 날이 선 패도(佩刀)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남명의 성정(性情)은 우연한 대비가 아니다.

퇴계가 학자로서 그리고 관료로서의 삶을 병행했다면, 남명은 초야에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처사형 선비였다. 퇴계가 마지못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라는 고위직에 오를 때, 남명은 지리산의 암혈에서 고결한 선비의 풍모를 지키려 노력했다. 두 사람의 삶의 지향은 이렇게 서로 달랐다.

영남출신, 동갑 뗄 수 없는 인연
그리고 학문 본연에 있어서도 퇴계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에 일생을 바친 반면, 남명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이론적 탐구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열중했고, 윤리와 강상(綱常: 삼강과 오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여기서 남명의 명분주의(名分主義)를 말해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남명에게는 애첩(愛妾)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남명의 임종시 그 애첩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간청했으나 남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여기에 비해 퇴계는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중도에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었고, 비록 신분이 하찮은 가문의 자제일지라도 배움을 청하면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지극히 순후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했고, 행검(行檢)에 독실하여 스승으로서의 위엄이 충만했다. 이러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도산 문하에는 유수한 인재들이 운집하게 됐다. 제자들은 그를 두고 “선생의 학문은 평이명백(平易明白)하고, 선생의 도(道)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와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석학이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퇴계가 도산에 삼간 초당을 짓자 도산서당에는 배움을 청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 점에서 도산서당은 퇴계학의 본산이며 퇴계학파 형성의 근원이 되었다.

남명은 1560년에 수십년 간 독서하고 가르치던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지리산 아래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정했다. 이를 계기로 진주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됐다. 산해정에서 산천재로 이어지는 남명의 행보는 남명학파 중심지의 이동인 동시에 학파의 거대한 확장 과정이었다.

성주(星州)를 기준으로 하는 상도(上道)의 준재들은 퇴계 문하로 흡수되어 갔고, 하도(下道)의 영재들은 남명 문하로 규합되어 갔다. 물론 정구(鄭逑) 정탁(鄭琢) 김우옹(金宇옹) 등과 같이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형성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생전에 단 한번도 만난 적은 없어
퇴계와 남명도 학자요 지성인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었다. 이들에게도 상대를 의식하는 경쟁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은 동도동경의 인연과 양대 학파의 종사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에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1569년 서울 장의동(壯義洞)에서 열린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돼 수연첩(壽宴帖)에 이름이 올라 있으므로 이때 혹시 상면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경쟁심은 각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종사로서 이미지가 강화되던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양인은 평소 서로를 북두성에 비기며 예우와 존경의 마음을 다하였고, 편지를 통해 ‘천리신교’(千里神交)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태도와 삶의 방식이 달랐다. 이것이 두 사람의 자존심 또는 라이벌 의식과 접합되면서 서로에 대한 비난과 풍자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남명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특립독행’(特立獨行: 혼자 자립하여 고고히 실천함)일 것이다. 퇴계는 바로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남명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고, 학문적으로도 찬성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그는 남명을 두고,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의 학문)에 물든 병통이 있다”는 말로써 그의 삶의 자세와 학문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 말을 들은 남명 역시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는 말로써 퇴계를 비꼬았다.

이런 와중에 두 사람의 불화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정(李楨)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천 사람인 이정은 남명의 지우였으나 이른바 ‘음부사건’(淫婦事件)을 통해 남명과 결별하고 퇴계 문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음부사건이란 진주의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후처가 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서 윤리와 강상을 중시했던 남명에게는 결코 묵인될 수 없는 ‘강상(綱常)의 변(變)’이었다. 남명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정에게 여러 차례 자문했다. 그러나 이정의 태도가 불분명할 뿐더러 여러 번 입장을 번복하자 남명은 특유의 강단이 발동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당황한 이정은 퇴계 문하에 나아가 문인을 자처하고, 퇴계 역시 이정을 두둔해 퇴계와 남명 사이의 불화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퇴계가 이언적(李彦迪)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를 매우 추앙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앙금을 만들게 됐다. 남명은 평소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의 처신을 보고 그를 진정한 선비로 대하지 않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선생으로 칭하면서 극도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퇴계와 남명 사이에는 때로는 가시적이고 때로는 내재적인 불만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자잘한 비난을 삼가며 거유(巨儒)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퇴계-남명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가지는 학문적 포용성과 유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1570년 퇴계의 부음을 접한 남명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았구나!” 하는 말로써 자신의 말년을 예언하기까지 했다. 이런 예언은 어긋나지 않아 남명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571년 만년의 강학처인 산천재에서 고종명(告終命)함으로써 16세기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두 석학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한 해 차이를 두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의 죽음이 학파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사후에 문인-제자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형성돼 스승의 학문을 계승-발전시키면서 이 시기의 사상계를 주도하게 됐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분열되면서 영남학파는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원래 역사적 용어로서의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칭하는 말이었고, 그 종사는 바로 퇴계와 남명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한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하여 1585년 동서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유성룡 김성일 우성전은 퇴계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고, 정인홍 김우옹 정탁 오건 등은 남명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 중에는 퇴계 문인들이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은 남명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퇴계 문하의 학술적 분위기가 고급 관료의 양산으로 나타나고, 남명 문하의 실천적 성향이 의병활동의 적극성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서분당 이래 동인으로 활동하던 두 문인들은 1591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서게 됐다. 정쟁의 와중에서 남인-북인으로 갈라진 문인들은 각기 유성룡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치열한 대립을 벌이면서, 스승들의 문집 간행과 서원 건립을 통해 퇴계와 남명의 현양사업(顯揚事業)에 서로가 박차를 가하게 된다.

 

남인-북인으로 나뉘어 學脈 이어가
이러한 경쟁의식은 두 문하의 수제자격인 유성룡과 정인홍의 대립으로 심화됐고, 급기야 1610년 사림 오현의 문묘종사를 계기로 극도에 달하게 됐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사림 오현의 이름으로 문묘에 종사되고 남명이 여기서 제외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의 허물을 비방한 이른바 ‘회퇴논척’(晦退論斥)을 단행하여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청금록에서 삭제됐지만, 대북 정권의 당국자로서 정치적 타격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정권이 몰락하고 정인홍이 처형되자 남명학파는 존립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정인홍의 잔당’이라는 비난을 우려한 남명학파의 상당수 인사들은 정인홍과의 사제관계를 부정하고 정구(鄭逑)를 매개로 퇴계학파에 연원을 붙이는 현상이 속출했다. 후일 영남학파가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진양하씨 창주파(晉陽河氏 滄洲派), 해주정씨 농포파(海州鄭氏 農圃派), 청주한씨 조은파(淸州韓氏 釣隱派), 창녕성씨 부사당파(昌寧成氏 浮査堂派)처럼 서인으로 전향한 계열도 적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으로 남인을 표방한 안동 지방의 퇴계학파와는 달리 진주지역에 남인과 노론이 병존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퇴계와 남명은 영남이라는 동일한 지역에서 활동했고, 그리고 16세기라는 동일한 시대를 살며 각기 도덕과 경의를 학문의 모토로 삼아 영남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를고조시킨 영남학파의 양대 준령이었다. 한 사람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를 추구했고, 한 사람은 지행합일에 바탕을 둔실천성을 중시했다. 그들은 학문적 지향점이 서로 달랐지만, 본령에 충실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는 퇴계와 남명이 살았던 당대에는 규모와 비중이 대등했으며, 퇴계-남명 사이의 약간의 불화에도 상호간의 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사후, 정쟁의 와중에서 문인들이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됐고, 퇴계-남명에 대한 문인 상호간의 비방이 격화되면서 점차 화합할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어 갔다. 여기에 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생기면서 남명학파는 심하게 분열하여 현격히 위축되었으며, 이런 연장선상에서 남명학파의 본거지인 진주 일대에는 17세기 후반 이래 남인-노론이 병존하며 갈등과 반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남인이든 노론이든 남명 자신에 대한 극도의 추앙과 존경심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물론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http://www.hisplace.co.kr/ )

선생의 최후

선비의 인품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가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부터 병환으로 강학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趙穆) 등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하였다. 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책을 모두 돌려보내게 했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했다.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늦게 도산으로 돌아와 은거한 진성이씨의 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히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전적을 맡게 하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일생은 오직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러한 생활이 그대로 죽음의 순간까지한치의 허트러짐이 없이계속된 것이다.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시고, 학문을 논할 기력이 다했을 때에는 마지막으로사랑하고 아끼던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이제 선생에게 더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종기(考終記)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의 병이 위독했을 때 가족들이 조상과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는데 선생이 이것를 아시고 그러지 말라고 중단을 시켰다고 한다.

평생을 올바르게 살고 이제 하실 일 다 하였으니 더 바랄 것도 더 구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은 생전에도 남의 비웃음을 살 일이라곤 아예 없었거니와 돌아가신 후에까지도 행여나 잘못됨이 있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까지도 스스로 마련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유언에서 밝혔듯 돌아가신 후 비문의 기록이 혹 자신을 과장표현할까 저어하여 손수 비문까지 미리 마련해두려고 했으나 미처 못하고 명문(銘文: 自銘)만을 남기셨다. 선생이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손수 지으신 “자명(自銘)”은 이러하다.

“나면서부터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았는데.
중년에는 어찌해 배우기를 좋아하고 다늦게 벼슬을 탐했던고.
학문의 길은 갈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마다해도 자꾸만 내려지네.
나아가기 어려워 물러나 지냈었네.

나라 은혜 생각하면 부끄럽고 성현 말씀은 두려웁네.
산은 높디 높고 물은 흐르고 흐르는구나.

모든 것 다 떨쳐버리고 노니니 세상비난도 벗어났네.
내 생각 남 모르는데 내 뜻 누가 즐기랴?

옛 분들 생각하니 내 마음 꿰뚫었네.
오는 세상엔들 오늘을 알리 없으랴?

근심 가운데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조화따라 돌아가리니다시 바랄 것이 무엇이랴? ”

生而大癡 壯而多疾(생이대치 장이다질)
中何嗜學 晩何?爵(중하기학 만하도작)

學求愈邈 爵辭愈?(학구유막 작사유영)
進行之겁 退藏之貞(진행지겁 퇴장지정)

深?國恩 亶畏聖言(심참국은 단외성언)
有山억억 有水源源(유산억억 유수원원)

婆娑初服 脫略衆?(파사초복 탈략중산)
我懷伊阻 我佩誰玩(아회이조 아패수완)

我思古人 實獲我心(아사고인 실획아심)
寧知來世 不獲今兮(영지내세 불획금혜)

憂中有樂 樂中有憂(우중유락 낙중유우)
乘化歸盡 復何求兮(승화귀진 복하구혜)

퇴계선생은 마치 우리 선조들이 당신이 입고 갈 수의(壽衣)를 손수 한땀한땀 지어 놓고 떠나시듯,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차근차근 이루어 놓으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진 ↑ ‘雪嶽峰頂秋氣淸’ 玄艸 이유태 그림)


(사진 ↑최근 퇴계선생 묘역에 세운 자명시)


영남 유학의 산실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닦으시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선생은 중종, 명종, 선조 세 임금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계의 부흥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尙德祠)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典敎堂)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서원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진↑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는 농운정사)

안동을 떠나 봉화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도산면 토계리(陶山面 兎溪里)에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을 모신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나타난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일컫는 말)이라고 전서체(篆書體)로 새긴 까만 비석과 만나게 되는데 이 지방 사람들의 자부심을 짐작케 하는 표석이다.

퇴계는 본래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뒤 그가 61세 되던 1561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세 칸 한옥이었다. 온돌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었는데 공부하는 유생들이 몰려들자 그들을 위해 선생이 직접 설계하시고, 공부하라는 뜻이 담긴 "工" 자형의 독특한 건물 여덟 칸을 지어서 농운정사(壟雲精舍)라고 이름하였다.



농운정사 앞쪽 한켠에는 정사성(鄭士誠)이라는 선비가 입학할 때 그 아버지가 지어서 기탁했다는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다.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배워서 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樂乎)라고 한 공자의 말씀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진↑ 역락서재)

퇴계의 생존시에 있었던 건물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 위로 올라가서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典敎堂)과 유생(儒生)들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東齋, 西齋)가 있고, 그 위쪽 높은 곳에 상덕사(尙德祠)라고 이름한 퇴계의 사당이 있어서 전형적인 서원의 구도를 이루었으며, 이 도산서원이 뒤에 모든 서원의 모본(模本)이 되었다고 하는데 선생이 70세에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난 1575년, 제자들이 선조(宣祖)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아 서원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전교당에는 선조가 지켜 보는 앞에서 당시의 명필 한석봉(韓石峯, 조선 중기 명필)이 썼다는 ‘도산서원(陶山書院)’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 글씨의 한 두 획이 좀 떨린듯 싶은 부분이 있어 “명필도 임금 앞에서는 긴장해서 글씨가 약간 떨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도산서원에는 그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지어진 부속 건물들이좁은 공간에 들어 차 있다. 향사에 쓰일 제수를 장만하는 등 이를 주관하는 전사청(典祀廳)과 퇴계에 관련된 각종 서적 4,000여 권을 보관하고 있는 서고(書庫), 서적을 찍어낸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을 관리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장만하던 고직사(庫直舍), 최근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유적 정비사업을 전개하면서 지은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등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도산서원이 갖추고 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서원의 역할과 기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현(先賢)의 향사(享祀)를 받드는 종교적인 전당(殿堂)이요, 후학을 길러내는 사립학교(私立學校)이며, 각종 도서를 수집, 보관, 관리하는 도서관(圖書館)이었고, 서책을 찍어 내는 인쇄소(印刷所)이기도 하였다.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돋자리, 명아주대로 만든 청려장(靑藜杖), 매화문 벼루와 서궤(書机) 등 선생의 손때가 묻은 유물들이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의 대표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그리고 쓴 병풍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매화음주시(梅花飮酒詩) 등의 족자가 걸려 있다. 퇴계선생의 매화사랑은 너무도 각별해서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 남기신 말이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는 말이라고 한다.



서원을 나와 안동호(安東湖)를 내려다 보면 호수 가운데 섬처럼 솟은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고, 그 위에 정자가 서 있는데 이곳이 시사단(試士壇)이다. 이 시사단은 뒷날 정조(正祖)가 영남 선비들을 위해 이곳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베풀었는데 응시자가 너무도 많아서 서원에서 과거를 다 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 강변에서 과거를 치렀고,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전각을 지은 것이 이 시사단이라고 한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물 가운데 분리되어 있어서 이곳에 가려면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사진↑ 도산서원 앞에 인공으로 쌓은 시사단)

이 도산서원 전체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사당인 상덕사와 태극마크가 선명한 전교당 정문은 보물 제211호이다.
(출처: http://pwj32.com.ne.kr/4/4_2_5.htm)

도산서원 부속 건물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광명실, 전교당(보물 제210호), 상덕사(보물 제211호), 장판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0년에는 서원을 보수하였고, 이 때 옥진각을 건립하고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였다. 서원의 맞은 편에는 시사단이 있고(유형문화재 제33호), 근처에는 퇴계선생의 종택(기념물 제42호)과 선생의 태실(민속자료 제60호) 그리고 묘소가 있다.

도산서원은 경관이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고 최근에는 안동댐 물이 서원 바로 밑까지 들어차 앞에는 푸른 안동호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어서 멋과 서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탐구와 인재 양성에 힘써 한국 유학사상의 큰 줄기를 이룩한 대학자이다. 주요 저서로는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등이 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유생들을 모아 교육하던 곳으로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작은 건물이며 선생의 실천적 학문과 검소함이 잘 나타나 있다. 이곳은 도산서원의 바탕이 되는 곳으로 퇴계 선생이 4년여에 걸쳐 지은 건물이다. 선생은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몸소 거처하기도 했는데, 선생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던 방을 '완락재(玩樂齋)'라 부르고,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하였다.

농운정사는 선생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일종의 기숙사이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자 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전교당(典敎堂)은 진도문(進道門) 안 정면에 위치하며 도산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데, 각종 행사시 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전면에는 당대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글씨인 ‘陶山書院’(도산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동·서재(東·西齋)는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전교당 앞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똑같은 건물로 동쪽이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이 홍의재(弘毅齋)이다. 광명실(光明室)은 도산서원 정문인 진도문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좌우대칭으로 서 있는 장서고이다. 이곳에는 역대왕의 내사서적과 선생께서 친히 보시던 수택본, 퇴계서초, 기타 서책 등 1,300여 종 5,000여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藏版閣)은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출판소로서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퇴계의 문집, 유묵, 언행론, 도산십이곡, 선조어필 등 2,790여 장의 병서(屛書), 액자(額字), 책(冊)의 판각(板刻)이 소장되어 있다. 상덕사(尙德祠)는 건물 가장 뒤쪽에 있으며,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위패를 봉안한 신성한 장소로, 매년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례가 엄숙히 거행된다. (사진→ 선생이 즐겨 다니시던 천연대 위의 산책길)

전사청(典祀廳)은 상덕사 서편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물로 향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던 곳으로, 평소에는 사당(祠堂)지기가 수직(守直)하는 곳이며, 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가 있다. 옥진각(玉振閣)은 고직사 아래에 있는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건립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 건물이다. 청려장(靑藜杖), 매화등(梅花燈), 투호(投壺), 혼천의(渾天儀), 그리고 성학십도(聖學十圖),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선생문집, 심경후론, 계몽전의 등의 서적류와 실내비품, 문방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역락서재(亦樂書齋)는 서원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건물로 선생의 제자 정지헌(鄭芝軒:士誠)을 선생에게 취학시킬 때 지헌의 부친이 지어준 집으로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시사단(試士壇)은 도산서원의 맞은 편에 안동호를 배경으로 떠 있는 곳인데, 평소 퇴계 이황의 학덕을 흠모하던 정조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유림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이다. 그 외에도 선생이 산책하던 천연대와 운영대, 석간대 등이 둘러볼 만하다. (관리인 전화번호: 054) 856-1073 위치: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산 61)
(출처: http://www.gbtour.net/Nadri/EsResource_view?p_resource_no=6071)


(사진↑ 도산서원 원경)



(사진↑ 소박한 모습의 도산서당)



(사진↑ ‘陶山書院’이라 쓴 사액현판이 걸린 전교당)



<퇴계선생 일화>


1. 어머님의 엄격한 가르침과 퇴계의 순종
진성이씨(眞城李氏)의 500여년 세거지(世居地)인 안동군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는 퇴계선생의 조부이신 이계양(李繼陽, 호는 老松亭, 1428~1488)공이 부라촌(浮羅村, 浮浦)에 살면서 서촌(西村, 祿轉面 사신리)에 거주하는 영양김씨(英陽金氏) 김유용(金有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이식(李埴), 이우(李우) 등 두 아들을 두고, 봉화훈도(奉化訓導)로 있을 때 고향을 왕래하면서 어떤 스님으로부터 점지받고 정착하게 된 곳이라 한다.

퇴계의 아버지 이식은 처음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낸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영명(金永命)의 차자(次子) 김한철(金漢哲)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잠(潛), 하(河)와 딸 하나를 낳고 일찍 사별하였으며,재취(再娶)로춘천박씨(春川朴氏, 朴緇의 딸)를 맞아 의(의), 해(瀣), 징(澄), 황(滉)을 두었다. 그러나아버지 이식은 퇴계가 태어난지 7달만에돌아가셨다.그래서어머니는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유별나게 엄격하였다고 한다.

“남들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행실을 삼가하라”는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모두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하여 충과 효를 실천하는 지도자로서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장자인 잠(潛)은 충순위(忠順衛)로서 그의 딸은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의 어머니이며, 차자 하(河)는 훈도(訓導)로서 노송정(老松亭) 종파를 이어 받았다. 춘천박씨(春川朴氏) 소생인 3자 의(의)는 외가가 있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로 이거하여 외가의 봉제사(奉祭祀)를 잇는 등 효행을 다하였으며, 4자 해(瀣)는 문과급제로 황해, 충청관찰사, 대사헌, 예조참판을 역임하면서 과환(科宦)으로 가문을 빛냈고, 5자 징(澄)은 찰방(察訪)인데 효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6자 황(滉)은 문과급제 후 수없이 주어지는 벼슬을 마다하고학문과 후진 양성에 정진하여 370여명의 제자를 배출하는 등도학(道學)과 덕행(德行)으로 우리의 영원한 사표(師表)가 되었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친어머니 박씨부인이 퇴계 선생을 낳을 때 공자(孔子)가 방문 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던 까닭에 그 집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문은 지금도 태실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생후 일곱 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며, 여러 자녀들을 학업에 정진토록 하였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자식들을 앞에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해도 안된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행실을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행실이 방정(方正)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이기 때문에 옳게 가르치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터인즉, 너희들은 그 점에 각별히 명심하여 훌륭하신 조상님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게 하여라.” 하고 수없이 타일렀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고, 동무들을 항상 온순하고 겸손하게 대했다. 그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워본 후에야집에 들어갔고,스승의 집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려 스승에 대한 인사를 반듯하게 올렸다. 이처럼 퇴계는 글을 배우기 시작할 초기부터 그 실천에 성실했던 까닭에 그의 학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2. 천성이 인자함
퇴계가 8살 때 일이다. 바로 위의 형인 해(瀣)가 칼에 손을 베어 피가 흐르는 것을 보자 퇴계는 얼른 달려와 상처난 형의 손을 붙잡고 소리내어 울었다. 어머니 박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하고 물었다.

퇴계는 여전히 울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 아니하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이로써 퇴계의 성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인자했던가를알고도 남음이 있다.

3. 퇴계의 독서법
퇴계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하루도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꼿꼿이 앉아서 온갖 정성을모두 기우렸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누워서 책을 읽거나 흐트러진 자세로 읽는 법이 한번도 없었다.

이처럼 엄격한 독서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한번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연거퍼 읽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려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퇴계가 서울에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 朱子全書>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 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번씩 끼니 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그 책 한 질을 수 없이 되풀이하여 읽었다. 때 마침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 커녕 서늘한 나무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퇴계는 그와 같은 폭서도 아랑곳하지 않고방문을 굳게 닫은채 독서만 줄곧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더운여름을 꼬박 <주자전서> 읽는 일로 보냈던 것이다. 친구가 퇴계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한번은 퇴계를 찾아 와서는,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 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에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 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 좋은 곳으로 피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를 하였다. 그러자 퇴계는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은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를 뿐이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책의 원주(原注)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사서(四書)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 말씀 한 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으이.”

19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의 첫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잠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주자대전>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의서신을 통해 도학의 학문 방법을 깨달았고, 학문방법에서 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편지는 사람의 자질이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옅음에 따라 병에 맞추어 약을 주고 물건에 상응하여 저울추를 올려 놓는 방법을 쓴다. 혹은 누르고 혹은 부추키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조하며, 혹은 격려하여 나아가게 하고 혹은 물리쳐 경고해 주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퇴계의 학문 방법이 추상적인 관념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의 만남 속에서 개개인의 절실한 상황에 따라 감동과 분발을 시킴으로써 학문을 심화시키고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다시 말해진리의 인격적인 실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주자학에 대해그만큼 심취했었고, 주자학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광범하고 산만하기만 하던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여 마침내는 ‘퇴계학(退溪學)’ 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퇴계는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남달리 정밀하게 읽었으니, 그것은 퇴계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 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가 없게 된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 몸에 배도록 공부를 더 해야만 비로소 마음 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금언(金言)이라 하겠다.

4. 엄격한 자기 성찰(自己省察)- 퇴계선생의 좌우명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다행히 <퇴계언행록 退溪言行錄>에일기를 보충할만한 자기반성에 대한고백이있다.

(1) 내가 한번은 금문원의 집에 갔는데, 산기슭이 매우 가파라서 갈 때는 말고삐를 꽉 잡고 조심조심 하였으나, 돌아올 때는 얼큰하게 취하여 길이 험한 것을 깜빡잊고 탄탄대로인양 안심하고 왔다. 마음을 채근하고 버림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2) 나는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처음에는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24살 때에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였으나 역시 큰 상심은 아니 하였는데, 하루는 집에 있자니까 누군가 “이서방, 이서방”하고 부르는데 나가보니 늙은 종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탄식하기를 내가 아직도 이름 밑에 아무런 호칭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욕을 보는구나 생각하고 갑자기 과거 시험에 합격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바뀌니 두렵지 아니한가?
(3) 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날마다 술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밤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 그러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4) 번잡하고 흥겨운 데서 사람의 성정이 바뀐다. 내가 사인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들이 눈 앞에 가득이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은 면하였으나 이러한 기회가 바로 살고 죽는 갈림길인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손가. [사진↑ 친필 좌우명: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毋不敬), 혼자일 때도 조심하라(愼其獨),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毋自欺), 사악한 생각을 하지 말라(思無邪)]

5. 장애를 가진 부인에 대한 관용(寬容)
퇴계는 21살 되던 해에 김해허씨(金海許氏, 進士 許瓚 따님)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둘째 아들 채(寀)를 낳은 후유증으로 결혼 5년만에 사별하였다. 3년 뒤인 1530년 안동군 풍천면 가곡리(豊川面 佳谷里)에 사는 안동권씨 사락정 권질(安東權氏 四樂亭 權질) 소생으로 정신이 혼미한 딸을 부인으로 재취(再娶)하게 되는데 이는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사락정(四樂亭)이 일찍이 퇴계의 사람됨을 알고,

“경호(景浩, 퇴계의 字), 자네는 내 집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한 내 여식(女息)을 누가 데려가겠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를 해봐도 자네밖에는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처녀를 면하도록 하여 이 죄인의 원을 풀어주게나.”

하는 간절한 청을 퇴계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권씨부인은 혼인 전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賜死)을 내릴 때 그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할아버지(花山 權柱)가 화를 입고, 아버지(四樂亭 權질)는 귀양갔으며, 숙부(己卯名賢 權전)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와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 때 비참하게 죽었고, 숙모는 관비(官婢)로 끌려가는 등 무서운 참극을 겪으면서 정신이 혼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씨부인은 정신이 맑지 못해 늘 선생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하루는 선생이 이웃 상가(喪家)에 조문을 가려다 도포자락이 헤어진 것을 보고 부인에게 꿰매어 달라고 했더니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 기워 가지고 왔다. 선생은 말없이 그 옷을 받아입고 문상을 갔다.

사람들이 퇴계선생의 옷차림 모습을 보고 “흰 도포는 빨간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농담으로 물어왔다. 예학에 정통한 퇴계가 그렇게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있는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도포(道袍)를 빨간 헝겊으로 기웠느니, 제사상(祭祀床)에 차려진 음식을 집어 먹었느니 하는 권씨부인과 관련된 여러가지 일화가 지금까지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퇴계선생의 결혼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권씨부인과 관련하여 퇴계는 제자 중에 완주출신(現 全州) 천산재 이함형(天山齋 李咸亨)이라는 선비가 부인과 금슬이 좋지 않아 부인을 소박(疏薄)한다기에 선생은속으로 걱정을 하면서도 한번도 직접 꾸짖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함형이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자 퇴계는 “자네, 잊지 말고 내일 조반은 우리 집에 와서 먹고 떠나도록 하시게.” 라고 하였다. 이틋날 아침 이함형은 선생 댁에서 아침상을 받게 되었는데 반찬은 산나물과 가지나물, 그리고 된장 한 종지뿐 손님을 초대한 음식으로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정신이 혼미하다고 들은 권씨부인에 대한 선생님의 말씨와 태도였다. 선생은 그런 부인에게 깎듯이 공대말을 쓰시고 배려를 극진히 하였다. 아무리 성인같은 선생님이지만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인을 어쩌면 저토록 소중히 여기고 아껴줄 수 있을까? 그는 불현듯 자신의 부인을 연상하고 크게 뉘우치면서 길을 떠나려고 하자, 선생은 겉봉에 ‘路次勿開看’(노차물개간: 도중에 뜯어보지 말 것)이라 적은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네가 부인과 금슬이 좋지 않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예문(禮文)에 ‘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불하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부의 근본도리를 잊고 글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또한, 천하의 이치는,
夫者倡 婦者隨(부자창 부자수)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 하고
牡者馳 牝者逐(모자치 빈자축) 수소가 내달으면 암소가 뒤를 쫓고
雄者鳴 雌者應(웅자명 자자응) 수탉이 울어대면 암탉이 순응하니
是以聖人制言行(시이성인제언행)이로써 성인이 언행을 다스렸으니
而 賢人拘之(이현인구지) 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따라야할 바이로다.

라고 하였는데 한 집안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성인의 말씀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깊이 명심하여 공규(空閨, 남편 없이 아내 혼자 사는 방)를 알뜰히 지키는 부인 곁으로 기꺼이 돌아가 주기를 이 노부는 간곡히 바라네.(중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 뒤로 그는 아내를 소중히 여겨 후손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이 50세 되던 무렵에 생활이 궁하여 아들을 처가살이를 시켜 놓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도 너의 처가살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아비가 궁하니 자식이 궁한 것은 아무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고 아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들에게도 일방적이고 권위적으로 무엇을 명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처가와 친가, 친손과 외손을 똑같이 고르게 돌보고, 아들이 없는 처가의 제사를 평생토록 받들었던 퇴계의 면모는 오늘날에도 남기는 바 교훈이 크다고 하겠다.

선생의 이러한 면모가 5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인의 마음 속에 남아서 저절로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아니겠는가? 새로 만든 1천원권 지폐의 도안이 모두 바뀌어도 퇴계 선생의 영정은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지폐에 선생의 영정이 들어 있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출처: 부산일보)

6. 퇴계의 며느리 사랑
퇴계선생의 맏며느리 봉화금씨(奉化琴氏)는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烏川 君子里)에 사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 입향조(禮安 入鄕祖)인 참판공(參判公) 농수 이효로(聾수 金孝盧)의 사위인 봉화금씨 장사공파 훈도(訓導) 금재(琴재)의 맏딸로서 퇴계의 장자 이준(李寯)의 아내이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上客)으로 사돈댁에 가게 되었는데 사돈댁(査頓宅)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微賤)한 가문의 사람이라 하여 외면(外面)하는 등 홀대(忽待)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과환(科宦, 生員.進士,文科)이 이어진 명성이 드높은 집안으로 혼례를 끝내고 퇴계가 떠나자 일가의 친척들이 몰려와 “우리 가문의 규수라면 어느 명문가엔들 시집 못 보낼가봐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하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퇴계문중에서 크게 분노하여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으나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거나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문이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아오는 터인데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 두시지요.”

하면서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이로써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넓은 도량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받들어 모셨으며,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묘소 아래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현재 금씨의 묘는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며느리 봉화금씨는 슬하에 안도(安道), 순도(純道), 영도(詠道)와 따님 한 분을 두었는데, 그녀의 맏며느리 안동권씨도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남편(安道)이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임진왜란을 당하자 온몸을 던져 퇴계선생이 남기신 서책과 유물들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가문을 굳건하게 지켜 훗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둘째며느리는 영남 사림학파의 종조(宗祖)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등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선산김씨(善山金氏)의 후손으로 지금의 진성이씨 선인파(眞城李氏 宜仁派)가 바로 선산김씨 부인의 후손들이다. 셋째며느리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수졸당 기(守拙堂 岐)와 맏집으로 출계(出系)한 억(억)의 어머니로서 의인파(宜仁派)를 제외한 상계파(上溪派)와 하계파(下溪派) 진성이씨(眞城李氏)는 모두 이 분의 후손들이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恝視)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신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명 받은 봉화금씨는 내조(內助)의 적덕(積德)과 효행의 실천으로 한 가문의 영화를 누리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선생의 비문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지낸 안동군 풍산읍 소산(素山)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영수(金永銖)공의 외손자이자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奉化琴氏) 집안의 매헌 금보(梅軒 琴輔, 퇴계선생의 백형 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후 더욱 돈독하게 되었으며, 퇴계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재)의 두 아들 일휴당 금응협((日休堂 琴應夾)과 면진재 금응훈(勉進齋 琴應壎)은 오천리(烏川里)의 광산김씨(光山金氏) 입향조(入鄕祖) 참판공 김효로(參判公 金孝盧)의 다섯 손자(後凋堂 金富弼, 읍淸亭 金富儀, 山南 金富仁, 養正堂 金富信, 雪月堂 金富倫)과 함께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어 소위 선성칠군자(宣城七君子)로 유명하다.

퇴계의 둘째 아들 寀(채)는 태어난지 한달 만에 친어머니 김해허씨를 잃고 주로 외가(의령)에서 성장하면서 건강이 나빠 퇴계가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있던 때(48세 2월)에 정혼만 해놓은 상태에서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무덤은 지금도 경남 의령읍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 외할아버지 선선에 묻혀 있다. 채가 세상을 떠난 그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전임한 퇴계는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홀로된 며느리가 남편을 잊지 못해 방안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남편인양 “이 음식도 좀 자셔 보세요. 이것도 당신을 위해 제가 만든 음식이니 한번 잡숴 보세요.”하는 광경을 우연히 엿보게 되었다.

‘열녀불갱이부(烈女不更二夫)’의 관념이 확고하던 시절이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 광경이 너무나 가슴아파 며칠 뒤 퇴계는, 사돈에게 딸을 재혼을 시키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뜻을 담아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가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년 뒤 퇴계가 조정의 일로 상경하는 길에 어느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 집 음식과 반찬이 어쩐 일인지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입맛에 딱 맞는 것들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로다, 남의음식이 이렇게도 내 입맛에 맞을 수가 있을까?”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튿날 아침 길을 떠나려는데안주인이 하인을 시켜 보낸 버선이 신기할 정도로 퇴계의 발에 꼭 맞는 것이었다. 그 순간 퇴계는 “아, 내 둘째 며느리가 이 집으로 개가(改嫁)를 온 모양이구나.”하고 속으로생각하였다.

퇴계가 주인과 하직하고 길을 떠나려는데담 모퉁이에서 몸을 숨기고 눈물로 배웅하며 서 있는 안주인은 먼 빛으로 보아도 옛날 퇴계가 아껴주던 둘째 며느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행여 개가한 며느리의 시집 생활에 방해가 될가 저어하여 모른 체하며 길을 떠났지만 그날 이후로 늘 둘째 며느리를 잊지 못하고 두고두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7. 퇴계의 손자 사랑
조선시대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한 1567년이었다. 이 무렵 퇴계는 67세의 노구임에도 학문적 명성에 힘입어 조정으로부터 입궐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는 건강을 이유로 번번이 관직을 사양했다. 조정에서는 직위를 더욱 올려 다시 제안을 계속했지만 퇴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퇴계를 비난하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해 8월도산에 은거하던 퇴계는 서울에 있는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병이 중해 예조판서를 수행할 수 없다. 새 주상(선조)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녹봉만축낼 수 없었다. 또 추위가 닥치는데 객지에서 죽게 될까봐 두려워 너무나 급박해 곧바로 돌아왔다. 다시는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게 될까 두렵기 짝이 없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라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자신에 대한 비난이 가라앉지 않자 두달 뒤 10월에 다시 손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를 비방하거나 의심하거나 나에 대해 물으면 ‘제 조부께서는 그때 마침 병이 위중했기 때문에 하는 일 없이 녹봉이나 받아먹으면서 객지에서 죽고 싶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지,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어찌 이같이 하셨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잘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또 퇴계가 66세인 1566년 10월 초 과거를 치른 손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아직도 합격자 명단을 보지 못하고 있다. 누가 합격하고 누가 낙방하였느냐?”고 묻고 있다.그러나 자신의 이런 모습이 다소 쑥스러웠던지 10월 23일엔 낙방한 손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애초에 네가 높은 점수를 받는다면 요행이라 여겼으니 이제 또 무슨 아쉬움이 있겠느냐.” 애써 태연한 척하는 퇴계의 모습. 하지만 손자의 낙방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퇴계는 손자의 낙방 답안지를 구해서 검토한 뒤 그 내용을 담아 이듬해 4월 또다시 편지를 부쳤다.

“네가 과거에 응시해서 제출한 글을 보니 위쪽 4행과 5행은 의미가 너무도 보잘것 없구나. 그래서 등수에 들지 못한 것이니….”

대학자의 손자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애틋하게 다가온다. 퇴계가 44세 때부터 세상을 등질 때까지 16년 동안 손자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125통이나 된다. 편지에는 한결같이 퇴계의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배어 있다.
(출처: 정석태 지음 ‘안도에게 보낸다’)

8. 비천한 여종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우
퇴계가 증손자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장손인 안도(安道)는 성균관 유학생활 중에 아들 창양을 얻었다. 장손이 첫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뒤따르는 법. 증손자 창양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기 엄마가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임신으로 젖이 끊어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요즘 같으면 우유가 있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밥물로 젖을 대신해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었다. 영양실조로 병을 앓기 시작하자 별 수 없이 유모를 구하는 중에 마침 아기 엄마의 친정에 아기를 낳은 여종이 있었다. 친정에서 딸을 낳은 여종에게 아이를 떼어 놓고 한양으로 가서 창양의 유모 노릇을 하도록 했다. 물론 퇴계에게는 비밀로 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내 이 일을 알게 된 퇴계는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고 하여 여종을 돌려 보냈다.

별수 없이 증손자 창양은 계속 밥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겨울을 넘기고 봄을 어렵게 넘겼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퇴계는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가족들에게는 일체 내색하지 않고, 때때로 친구들에게만 이 일로 아픈 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당시 사회 상황으로 보아서 여종의 딸 하나쯤 잘못되는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세상이었지만 퇴계는 신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인간을 똑같이 모두 동등한 인격체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물론 역사 속의 인물이 된 지금까지도 퇴계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 여성인권문제, 아동학대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에 귀감이 되는 퇴계선생의 일화를 소개했다.
(출처: http://www.edumart.co.kr/letter/letter471.htm)

9. 대장장이 배순(裴純)과 퇴계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10월에 다시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에는 아우가 형 밑에서 근무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는데 대사헌으로 있던 넷째 형 온계가 충청감사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1년 동안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고,일체의 청탁을배제하는 등 공직기강을 확립하였으며, 서원에서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 중에서 계급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민인 배순(裵純)을 교육한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퇴계가 아니었으면할 수 없는 일로서,그의 인간됨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배점리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 대장쟁이)이었다.그는 신분이 비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여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주 뜰 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하기에 하루는 퇴계가 그의이해 정도를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겨 함께 가르쳤다고 한다. 배순은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선생의 철상(鐵像)을 주조하여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면서 경모하였다고 한다. 22년뒤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 소식을 듣고(퇴계가 풍기를 떠난 것은 1549년 11월이고, 돌아가신 것은 1570년 12월 8일이다) 3년 상복을 입었으며, 철상을 모시고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

10. 예법을 합리적으로 고쳐 시행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평소 퇴계의 예설(禮說, 예에 관한 이론)은 바로 예의 지침이고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1인자로 모시고 따랐다. 퇴계가 돌아가신 뒤 스승의 예설을 정리해서 <예설유편 禮說類篇>을 엮었다. 다음은 예설유편에 실린 퇴계선생의 예법들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 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喪)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하였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姪婦, 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從權, 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祭官)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陳設圖)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손녀를 출가시킬 때 세속을 따르지 않고 그 철에 입을 옷만을 베와 무명으로 짓게 하고, 중국의 혼례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서 시행하였다. 오늘날 전통혼례라 부르는 예식은 퇴계가 개정한 법인데, 조정 중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이 많았으나 국왕이 퇴계의 예가 우리 실정에 맞는다며 어명으로 시행케 하였다. 혼수함(婚需函)을 시종이나 남을 시켜 보내면 불경하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예절이라 하여 신랑의 형제들을 시켜보내되 양가 부모가 의논해서 하라고 하였다.

퇴계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닌 까다로운 의례절차에 대해서 물어오면 자기 뜻대로 판단하지 않고 옛 성현의 말씀을 찾고 연구한 후에 그 근거에 따라 시행케 하였다. 선경후중(先輕後重, 부자를 매장할 때는 아들을 먼저 묻고 아버지는 나중에 묻음)과 후우경(後憂輕, 제사는 아버지를 먼저 지내고 아들은 나중에 지냄)의 절차는 증자가 공자에게 물어 시행한 것인데 퇴계가 찾아내어 보급하였다.

퇴계가 벼슬 때문에 객지에 가 있을 때는 제삿날 지방을 써 붙여 놓고 배례하였으며, 귀한 음식이 생기면 쉬 상하는 음식은 부모님의 지방을 써 붙이고 배례한 후에 먹었고, 마른 것은 두었다가 제사에 쓰도록 큰 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남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자기가 선생으로 사숙하는 주자가 그리 하였으므로 자기는 따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사람에 따라 성의와 경우가 다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퇴계는 유가(儒家)의 예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선구자였으나 제자 김취려(金就麗)가 예서(禮書)를 편찬하도록 부탁했을 때에는 학문과 덕이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기도 하였다.

11. 퇴계선생의 인간성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은 <학봉집 鶴峰集>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여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12. 멋과 풍류를 즐기는 여유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이를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옮겨서도 방당(方塘)을 만들어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松·竹·梅·菊·蓮)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節友社)의 단(壇)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安道)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가 가장 아끼는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서울에서 기르던 매분을 호사가 김이정이 손자 안도에게 부쳐 배로 싣고 왔기에 반가워 한 절을 지었다. 이르되,” (都下梅盆 好事金而精付 安道孫兒船載寄來 喜題一節云)

脫却紅塵一萬重(탈각홍진일만중)
來從物外伴瞿翁(내종물외반구옹)
不緣好事君思我(불연호사군사아)
那見年年氷雪容(나견년년빙설용)

“만겹 紅塵 다 털어 버리고
俗世 떠난 이 늙은이를 좇아왔구나.
알뜰한 그대가 내생각 해 주지 않았으면
어찌 氷雪같이 고운얼굴 해마다 다시보리.”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봉화 청량산(淸凉山)으로 도산(陶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小白山遊山錄)’을 지었으며, 홍응길(洪應吉)의 ‘금강산유산록(金剛山遊山錄)’에 서문(序文)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 ‘두류산유산록(頭流山遊山錄)’에 후지(後識)를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丹陽八景)을 선정했으며 죽계구곡(竹溪九谷)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사진↑ 퇴계가 손수 필사한 ‘梅花詩帖’ 맨 끝에실려 있다)





(사진↑ 퇴계가 소시적부터 즐겨 찾은 봉화 청량산의 빼어난 산수)

퇴계는 한시뿐만 아니라 한글로 쓴 시도 남겼는데 바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그것이다.

“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古人 못뵈
古人을 못 보아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고.”

“靑山은 어찌하여 萬古에 푸르르며
流水는 어찌하여 晝夜에 그치지 아니 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萬古常靑 하리라.”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李賢輔)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黃俊良)과 함께 구담(龜潭)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濯纓潭)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勝景)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출처: http://my.dreamwiz.com/ohjs7/iw/iw1st.htm)

13. 퇴계선생의 남다른 매화 사랑
선생은 일찍이 104수의 매화시로써 따로 <매화시첩 梅花詩帖>을 지은 바 있어, <퇴계문집 退溪文集)>에 실린 10여 수의 매화시를 합치면 모두 110여 수의 매화시를 지은 셈이다.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했고 사랑했다. 퇴계의 경물시(景物詩) 가운데매화시가 특히 눈에 띈다. 일찌기 매난국죽(梅蘭菊竹)은 군자의 사우(四友)로 의취(意趣)가 있어 선비들이 좋아했지만 선생의 경우 특히 그 중에서 매화를 좋아하였다. 그것은 매화가 추운 겨울 온갖 시련과 풍설을 겪으면서도 외로이 혼자 이겨내고,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옥설(玉雪)같이 새하얀 꽃을 어김없이 피우는 그 오상고절(傲尙高節)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진→ 분매: 퇴계는 매화를 병적으로 좋아했다)

예로부터 매화는 은사(隱士)나 절의(節義)의 지사로 등장하지만 선생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녀(仙女)나 애인으로, 드디어는 반려자와 같이 가까워지게 된다.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 것은 청정(淸淨)과 순수(純粹)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스스로도 ‘천향(天香)’ 이라 극찬한 향기도 있지만, 무엇보다 퇴계 자신의 환경과 그의 선천적 ‘천석고황(泉石膏황)’과 ‘조월운경(釣月雲耕)’ 을 즐기는 성품이 매화의 그 ‘속기(俗氣) 떠난 출세간(出世間)의 자태(姿態)’ 와 영합(靈合)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찌기 소동파(蘇東坡)가 매화의 자태를 두고 ‘고오청랭 빙청옥결(孤傲淸冷 氷淸玉潔)’ 이라 표현한 것에 공감했으며, 매화와 더불어 일생을 같이 하면서 일찍이 서한(西漢)의 시인 매복(梅福, 西漢 때의 詩人. 字가 子眞, 梅花를 지극히 사랑하여 梅仙이라 불렸다)과 같이, 매화와 더불어 높은 구도자(求道者)의 자세를 연마한 듯하다.

선생의 매화와의 인연(因緣)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사후에까지 이어진 듯하다. 고제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쓴 연보(年譜)에 의하면, 선생은 1570년(경오년) 12월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에 운명(殞命)하셨는데, 이날 아침에도옆에 있는시인(侍人)에게 “분매(盆梅)를 침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물을 주라” 고 일렸다고한다. 돌아가신 날까지 매화를 생각한 그 정성으로 매화와의 인연은 마침내 천상으로 이어졌으니 하찬은 꽃나무에까지 미친 선생의 지극한 성정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선생이짓고 손수 필사한 <매화시첩 梅花詩帖> 첫머리에 실린 ‘옥당억매(玉堂憶梅)’는 이렇게 되어 있다.

“옥당에서 매화를 그리워하다”
玉堂憶梅- 壬寅年(42세 때)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차지)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鴻?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뜰안의 한 그루 梅花, 가지마다 흰 눈 가득
너도 風塵과 江湖의 그리움이 어긋났구나,
玉堂에 앉아서 봄밤의 달을 대하니
기러기 울음소리에 생각나는 것이 있구나.”

제자 김성일(金誠一)의 ‘퇴계연보退溪年譜)’에 의하면, 그 해 2월에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었는데, 아마 그 무렵 어느날 밤 옥당(弘文館)에 숙직(宿直)하면서 뜰에 있는 매화를 보고, 고향집에 있는 매화가 그리워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매화시첩>의 첫머리에 실린 ‘옥당억매’ 시)

14. 명종(明宗)의 각별한 대우(명종은 퇴계의 은거지 도산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함)
1545년 7월에 인종(仁宗)이 갑자기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였다. 명종은동궁으로 있을 때 퇴계가 그의 사부(師傅)를 맡은 일이 있어서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조정에 중용하려고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퇴계는 원래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그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관직을 사양해 오다가 마침내 1565년 12월에 명종으로부터 특별 부름을 받았다.

왕이 보낸 전교(傳敎)에는 “과인이 총명하지 못하고 어진 분을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음과 병을 칭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노라.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안다면 조속히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퇴계는 명종의 각별한 소명을 거역할 수 없어 1566년 66세(명종 21년) 정월에 상경 길에 올랐으나 병환은 가볍지 않았다. 겨우 영주에 도착해서 사직소를 올리고 풍기에 가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유지와 함께 행로의 각 수령에게는 노신(老臣)을 잘 호송하라는 영까지 내렸다. 왕의 유지(諭旨)는 “경이 사직하고자 하는 글을 보니 과인의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다. 사퇴하려고만 하지 말라.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 버리지 말고 잘 조리해서 상경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명종은 내의에게 일러 약을 조제해 가지고 가서 문병하라고 명하였다. 퇴계는 유지를 받고도 나갈 몸이 못됨을 아뢰고, 눈 쌓인 죽령을 피해 조령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천에 이른 후 또 다시 부디 병든 몸을 놓아달라고 간절히 장계를 올렸다. 그래도 국왕은 윤허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퇴계에게 공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으로 승진시켜 소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번에도 사직소를 올려 나아가지 아니하고 절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왕은 윤허는 커녕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에다 경연관 춘추관 동지사까지 겸임시켜 상경하도록 독촉하였다.

그러다가 4월이 되어 올린 퇴계의 장계를 조정대신들이 보고, 국왕에게 6경(六卿)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윤허를 주청하여 중추부 지사로 체직하게 되었다. 7월에 가서 퇴계는 자헌대부와 중추직도 해직하여 달라는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치 아니하고 병이 낫는대로 상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 후에도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하여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어진이를 불러도 오지 않음을 탄한다)이란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고, 유신(儒臣)과 조정 화공(畵工)을 도산에 내려 보내 퇴계가 살고 있는 ‘도산도(陶山圖)’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 위에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서 병풍을 만들게 하여 늘 곁에 두고 보면서 퇴계를 그리워 하였다. (출처: 권오봉저, ‘이퇴계의 실행유학’)

15. 퇴도만은(退陶晩隱) 청빈(淸貧)한 군자의 죽음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학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趙穆) 등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책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遺書)를 받아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은거한 진성이씨의 묘)라고만 새기고, 그 뒷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12월 8일 한서암에 앉아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떨어진 토계동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사진→묘비: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글씨는 琴輔가 썼다)

문인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선생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은 조정의 방침에 의하여 오늘날의 국장과 같은예장으로 치루어졌으나 성현의 묘소로서는 매우 초라한 편이다. 퇴계의 유언에 따라 묘비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써 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자명(自銘)과 문인 기고봉(奇高峰)이 지은 묘갈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통상 비석을 배치하는 방법과는 달리 특이하게 동쪽을 등에 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비석의 윗 부분에는 좌우대칭의 구름무늬 한가운데, 앞면에는 태양이 뒷면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비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190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관리인이 전한다. 그리고 묘소 앞으로는 동자석이 좌우로 자리잡고 있고, 멀리 망주가 벌려 서 있으며, 더 앞쪽으로 나아가서 문인석이 좌우로 서 있다.


(사진↑ 인품처럼 지극히 소박한 퇴계선생의 묘소)

 


<퇴계선생 연보>

1501년 1세 연산7년 辛酉 음11월 25일 진시(辰時, 아침 8시경)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溫溪里 ; 현재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나다.
1502년 2세 연산8년 壬戌 6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식(埴) 별세하다.
1506년 6세 중종원년 丙寅 이웃노인에게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등을 배우며 처음으로 글을 깨치다.
1512년 12세 중종7년 壬申 숙부 송재공(松齋公) 우(우)에게 「논어」를 배우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옳은 것이 '이(理)'가 아닙니까?"라고 물어 송재공을 크게 놀라게 했다. 송재공은 성격이 엄숙하여 칭찬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 선생이 형 대헌공(大憲公) 해(瀣)와 함께 글을 배울 때에 송재공은 늘 칭찬하여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1514년 14세 중종9년 甲戌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앉은 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책을 보다.
1520년 20세 중종15년 庚辰 「주역」을 읽고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먹고 자는 일을 잊다. 이때부터 늘 파리하고 초췌한 병을 지니게 되었다. 후에 「조사경(趙士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어린 나이로 일찍이 망령되게 큰 뜻을 두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라 각고가 너무 심해 파리하고 초췌해지는 병을 얻었다"라고 한 바 있다.
1521년 21세 중종16년 辛巳 진사(進士)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23년 23세 중종18년 癸未 10월에 아들 준(寯)이 태어나다. 이 해에 비로소 성균관에 유학(遊學)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친 이 시기,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던 터라 오히려 선생의 행동거지에 법도(法度)가 있음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다. 뜻을 알아준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뿐이다.
1527년 27세 중종22년 丁亥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生員) 제2위에 합격하다.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나다. 11월 7일 허씨 부인이 죽다.
1530년 30세 중종25년 庚寅 봉사(奉事) 권질(權질)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31년 31세 중종26년 辛卯 측실(側室)에서 아들 적(寂)이 태어나다.
1532년 32세 중종27년 壬辰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科擧)에 나가 문과(文科) 별거(別擧)의 초시(初試)에 2위로 합격하다.
1533년 33세 중종28년 癸巳 반궁(泮宮, 성균관)에 유학하다. 경상도 향시에 1위로 합격하다. 충재(충齋) 권벌(權벌)을 따라 여주(驪州) 이호촌(利湖村)에 살고 있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뵙다. 선생은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소 정인(正人) 군자(君子)의 언론(言論)을 들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詩 吉先生閭. 月影臺. 矗石樓.
1534년 34세 중종29년 甲午 3월에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임명되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등의 요직을 겸임하다.
1535년 35세 중종30년 乙未 6월에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인(倭人)을 동래(東來)로 보내다. 여주를 지나다 목사(牧使) 이순(李純)과 함께 신륵사(神勒寺)에 노닐면서 시를 짓고, 이 길에 고향에 들러 어머니 산소를 뵙고 돌아오다. 詩 驪州牧李公純. 訓導李. 遊神勒寺. 臨風樓. 嶺南樓
1536년 36세 중종31년 丙申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겸중학교수(成均館典籍兼中學敎授)를 거쳐 9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다. 詩 歲季得鄕書書懷. 感春. 安東愛蓮堂. 雨留新蕃縣
1537년 39세 중종34년 丁酉 선교랑(宣敎郞),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議郞)이 되었으나 10월15일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일시 물러나다.
1539년 39세 중종34년 己亥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修撰) 지제교(知濟敎)로 승진되고 경연(經筵) 검토관(檢討官)을 겸임하다.
1540년 40세 중종35년 庚子 1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오른 후 봉훈랑(奉訓郞) 봉직랑(奉直郞)을 거쳐 승문원 교검(校檢),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고 10월에 교리(校理), 11월에 통선랑(通善郞)이 되다.
1541년 41세 중종36년 辛丑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고, 10월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다. 6월 4일 손자 안도(安道) 출생. 詩 義州雜題十二絶. 聚勝亭韻奉別洪公. 平壤練光亭陪監司尙公震夜. 書堂次金應霖秋懷. 讀東國史用應霖韻. 夕霽舟上示應霖·景說. 南樓壁上有六言四韻 次韻 示二君. 九月七日午憩臨津亭.
1542년 42세 중종37년 壬寅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바로 어사(御使)로 임명되어 충청도 군읍(郡邑)의 흉년 구제사업을 순찰하고 상경하였다.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晦齋) 이선생을 전송하다. 통덕랑(通德郞)이 되어 사인(舍人)에 승진되다. 8월에는 고향에 돌아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을 전송하다. 12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다. 詩 玉堂春雪用歐公韻. 泰安曉行 憶景明兄. 宿淸風寒碧樓. 鎭川東軒. 蓮亭小集. 秋日南樓晩霽. 湖上園亭偶出效康節體. 與諸君同登狎鷗亭後岡. 原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 次樓韻留贈. 酒泉縣酒泉石姜晉山韻. 錦江亭. 洪川三馬峴用景明兄竹嶺途中韻. 過淸平山有感
1543년 43세 중종38년 癸卯 2월에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임하다. 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조봉대부(朝奉大夫), 승문원 교감(校勘), 시강원 필선(弼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 사간(司諫), 성균관 사성(司成) 등 여러 직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11월에 다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이 때의 일을 뒤에 남명(南冥) 조식(曹植)에게 보낸 편지에서 "벼슬자리를 피하여, 옛 서적을 안고 고향의 산중에 돌아가 미처 이르지 못한 공부를 매일 한치씩 쌓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詩 奉酬聾巖李先生靈芝精舍詩. 題林士遂關西行錄後 二首. 當軒綠叢花 四季. 九月獨登書堂後翠微寄林士遂 四首. 送金厚之修撰乞假歸觀 仍請外補養親 恩許之行. 湖堂梅花暮春始開 用東坡韻 二首.
1544년 44세 중종39년 甲辰 홍문관 교리와 응교(應敎), 사헌부 장령, 경연 시강관(侍講官),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승문원 교감 등 여러 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9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1월에 중종(中宗)이 승하(昇遐)하자 상경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부고(訃告)와 시호(諡號)의 두 표문(表文)을 지어 중국예부관원들을 감탄시키다. 詩 湖堂曉起 用東坡定惠院月夜偶出韻. 次韻答金應霖 林士遂在東湖見寄 二首. 七月望日 狎鷗亭卽事 四首. 晩步. 登狎鷗亭後岡 憶應霖 士遂 吉元 四首. 夜起有感. 大雷雨行. 剪開檻外樹作. 奉贈圭庵宋眉 以冬至副使赴京.
1545년 45세 인종원년 乙巳 정월에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다.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 봉정대부(奉正大夫),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 중훈대부(中訓大夫),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등을 지내다.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疏)를 올리다.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옹원정(司饔院正), 사복시정, 승문원 참교(參校) 등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많은 직을 사임하다가 11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영접도감(迎接都監) 낭청(郎廳)에 임명되다. 사림파(士林派)들을 몰아내려는 이기(李기)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교리(校理) 이원록(李元祿)의 간청으로 다시 첩지(牒旨)를 받다. 詩 送林士遂以迎詔使從事赴義州三首.
1546년 46세 명종원년 丙午 2월에 장인 권질(權질)의 장사를 지내다. 7월에 부인 권씨가 죽다. 8월에 교서관(校書館) 교리, 승문원 교리를 겸직하다. 11월에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곁에 작은 암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학문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다. 詩 望湖堂梅花. 再用前韻 答景說. 兜觀院溪上 奉懷家兄話別於東郊 二首. 寓月瀾僧舍書懷 二首. 以事當還鄕 至榮川病發輟行 留草谷田舍. 孟夏二十五日 入龍壽寺 馬上記黃敬甫. 晨至溪莊 偶記東坡新城途中詩 用其韻 二首. 聾巖先生愛日堂 用李復古先生韻. 士遂寄詩次韻. 東巖言志. 獨遊孤山 至月明潭 因 水循山而下 晩抵退溪 每得勝境 卽賦一絶 凡九首. 後又得二勝.
1547년 47세 명종2년 丁未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8월에 홍문관 응교(應敎)를 받아 부임,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자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에 다시 제수되다. 詩 踏靑登霞山. 淸吟石. 題黃仲擧方丈山遊錄. 和西林院詩韻 二首. 雨晴述懷. 戱作七臺三曲詩. 閒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古意. 玉堂宣 後 出書堂 馬上作. 次韻閔景說 景霖 二首. 雪竹歌. 冬日甚雨 已而大雪 喜而有作. 上聾巖李先生. 病中讀史有感 三首. 樂山南景霖在書堂 雪中寄松酒兼律詩 次韻 寄.
1548년 48세 명종3년 戊申 정월에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단양군수에 임명되다. 정사(政事)가 투명하고 간결하여, 아전들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다. 2월에 둘째아들 채(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되다. 詩 赴丹山書堂朴仲初左通禮閔景說正南景霖正尹士推典翰餞席留贈. 洛生驛樓次金應霖贈別韻 二首. 鄭吉元韻. 馬上次閔景說. 二月一日郡齋 雨中得洪退之見寄 次韻. 買浦滄賑給暮歸馬上. 島潭二絶. 仙巖. 馬上. 二樂樓 次東坡黃樓詩. 花灘. 舟中. 龜潭. 伏聞重新愛日堂 上聾巖先生.
1549년 49세 명종4년 己酉 4월에 소백산을 노닐고, 9월에 병으로 감사에 사직서를 올리다. 12월에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관내(管內) 백운동(白雲洞) 서원의 편액(扁額)과 필요한 서책을 조정에 청하였던 바, 조정에서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고, 「사서(四書)」·「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典)」등의 책을 보내왔다. 서원의 흥성(興盛)이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다.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감사의 허락도 없이 시골집으로 돌아와버렸다. 詩 白雲洞書院示諸生. 答周景遊見寄 二首. 石崙寺效周景遊次紫極宮感秋詩韻. 紫蓋峯. 國望峯 三首. 答尙牧金季珍. 郡齋 有感小白山之遊 追次景遊用昌黎衡岳詩韻. 郡齋移竹. 浮石寺聚遠樓 鄭湖陰贈僧韻. 八月十五日夜陰. 十月十日夜 大雷雨. 十一日曉地震 三首. 池方寺瀑布 二首.
1550년 50세 명종5년 庚戌 정월에 임소(任所)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고신(告身) 2등을 삭탈 당하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아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각지에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날로 늘어나다. 농암(聾巖) 이공(李公)을 분천(汾川)에 가 뵙다. 4월에 한서암 앞에 있는 광영당(光影塘) 연못을 파다. 8월에 형 좌윤공(左尹公) 해(瀣)의 부음(訃音)을 듣다. 詩 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 移草屋於溪西 名曰寒棲庵. 三月三日 雨中 寓感 用丁未踏晴韻. 拜聾巖先生 先生令侍兒 歌東坡月飮杏花下詩 次其韻詩之 滉亦奉和 呈上. 退溪. 寒棲. 溪居雜興 二首. 寒棲雨後書事. 和陶集移居韻 二首 五月十八日. 和陶集飮酒 二十首. 七月七日作 閒許南仲遷謫. 偶讀宋潛溪靜室詩 次韻示兒子寯閔生應祺 二首.
1551년 51세 명종6년 辛亥 벼슬하지 않고 집에 거처하며 여러 사람과 시를 주고받다.
詩 十六日雨 辛亥正月. 和老杜幽人. 十六日夜大風寒. 十八日朝晴 感興. 二十日 又雨夜大風. 閒居次趙士敬 具景瑞 金舜擧 權景受諸人 十四首. 有嘆. 淸明 溪上書堂 二首 撤寒棲 移構小堂於溪北 次老杜韻. 春日閒居 次老杜六絶句. 聾巖李先生來臨溪堂. 十一日夜 陪聾巖先生 月下飮酒杏花下 用東坡韻. 溪堂偶興 十絶. 次趙監司季任 上聾巖先生韻. 次季任 密陽嶺南樓 和朴昌世詩 二十二韻. 七月十三月夜. 次金惇 讀書有感韻. 次韻答新寧宰黃仲擧.
1552년 52세 명종7년 壬子 4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로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승문원 교리를 겸임하게 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다. 7월에 통정대부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11월에 병으로 사임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다. 詩 正月二日立春 壬子. 上元日 遇李庇遠於溪路 同行卽事. 上元夜 溪堂對月. 次韻 答李靑松公幹 二首. 滉將拜聾巖於臨江寺 其夜有雪 先生朝遺僧以一絶速之 謹奉和 先以呈上. 暮歸馬上. 李大成來訪溪堂. 淸吟石. 答友人 丁季晦時謫巨濟. 四月初一日溪上作. 答黃仲擧. 幽居 示李仁仲 金信仲. 溪堂前方塘 微雨後作. 四月八日感事 國俗 以是日釋迦生 稱爲節日. 次韻寄題黃仲擧新構竹閣 夏赴都後. 八月十五日夜 西軒對月 二首. 次韻友人 二首.
1553년 53세 명종8년 癸丑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7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다. 8월에 친시 대독관(親試對讀官)에 선출되다. 9월에 충무위(忠武衛) 상호군에 임명되다. 10월에 정지운(鄭之雲)의「천명도(天命圖)」를 개정하다.
1554년 54세 명종9년 甲寅 2월부터 동궁(東宮)과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진도(珍島)에 귀양가 있는 이재(伊齋) 노수신(盧守愼)과 편지로「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註解)를 논하다. 손자 순도(純道) 출생.
1555년 55세 명종10년 乙卯 2월에 강녕전(康寧殿)에 「7월편」을 써 올리다.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했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향리로 돌아오다. 6월에 농암(聾巖)이 별세하여 그의 행장을 짓다. 겨울에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산을 노닐며 여러 시를 짓고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다.
1556년 56세 명종11년 丙辰 5월에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부름을 받았으나 거듭 사표를 내다.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편차(編次)를 완성하다. 12월에 향약(鄕約)의 초안(草案)을 만들다. 향약모임에 귀천의 신분을 떠나 연령순으로 좌석을 정하기로 했는데 반대의견이 많았다. 선생은 자기 주장을 역설했으나 제자들마저 따르지 않자 거두어들이고 중론(衆論)에 따랐다.
1557년 57세 명종12년 丁巳 3월에 「수곡암기(樹谷庵記)」를 짓다. 도산(陶山)의 남쪽에 서당 자리를 마련하다. 7월에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다.
1558년 58세 명종13년 戊午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12월에 임금이 특별히 친필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에 제수하다. 세 차례에 걸쳐 사임의 뜻을 전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일단 상경하여 부임하다.
1559년 59세 명종14년 己未 2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병을 얻어 서장(書狀)을 올려 관직을 사임할 것을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동지 충주부사에 제수되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고, 편액을 쓰고 서원(書院)의 규약을 정하다. 12월에「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2월 26일 손자 영도(詠道) 출생.
1560년 60세 명종15년 庚申 정월에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발(跋)을 쓰다. 11월에「답기명언서(答奇明彦書)」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변론하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이루어지다. 이때부터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고, 서당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방은 '완락재(琓樂齋)'라 하였다.
1561년 61세 명종16년 辛酉 3월에 도산서당 왼쪽에 석축으로 절우사(節友社)를 만들다. 각처에서 모여든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연(自然) 속에 우유(優遊)하였다. 11월에 「도산기(陶山記)」를 짓다.
1562년 62세 명종17년 壬戌 3월 3일 도산에 나와 배를 타고, 청계(淸溪)에 이르러 시냇가에 대를 쌓고, '청계대(淸溪臺)'라 이름하다. 귀암(龜巖) 이정(李禎)이 방문하고 며칠 후에 돌아가는데, 석간대(石澗臺)에서 송별하다.
1563년 63세 명종18년 癸亥 3월에 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글을 지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그의 행장을 짓다.
1564년 64세 명종19년 甲子 4월에 여러 제자들과 시를 지으며 청량산을 노닐다. 9월에 정암(靜菴)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에 대한 변박(辨駁)의 글을 짓다.
1565년 65세 명종20년 乙丑 4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명(職名)을 사임하는 글을 올려 허락받다. 「경재잠도(敬齋箴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명당실어(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 위에 걸다. 8월에 제자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講論)하고, 『경현록(景賢錄)』을 개정하다. 12월에 특명으로 소환(召還)되어 동지충주부사로 다시 임명되다.
1566년 66세 명종21년 丙寅 여러 관직을 제수받고 왕으로부터 특명이 내려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서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다.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儒臣)들과 화공(畵工)을 내려보내 「도산기(陶山記)」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애완하였다. 10월에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의 행장을 짓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짓다.
1567년 67세 명종22년 丁卯 5월에 올라오라는 임금의 교지(敎旨)가 있었다. 6월에 부름에 응하여 서울에 들어가다. 명종이 승하하다. 7월에 예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퇴, 그밖에도 동지 경연 춘추관사, 동지 중추부사 등 수많은 관직의 제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사임을 간청하고 귀향하다. 9월에 기명언(奇明彦)의 편지에 답하다.
1568년 68세 선조원년 戊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다. 6월에 왕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면서, 길에서 잇달아 표문을 올려 다시 숭품을 사양하고 직품을 모두 개정해주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병인일(丙寅日)에 서울에 들어가다. 재임 중에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리다. 12월에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제왕학(帝王學)을 열 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가납(嘉納)하여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다.
1569년 69세 선조2년 己巳 정월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숙배(肅拜)하지 않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였더니 사면이 허락되었으나 다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다.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자 대궐로 들어가 성은(聖恩)에 감사하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뢰는 등 거듭거듭 차자(箚子)를 올리다.
1570년 70세 선조3년 戊午 9월에 도산에 나가 제생(諸生)과 『계몽(啓蒙)』·『심경(心經)』을 강론하다. 10월에 기명언(奇明彦)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심성정도(心性情圖)」를 논하다. 11월에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가 신병(身病)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제자들을 돌려보내다. 12월에는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있는 아들 준(寯)을 불러 장사 준비를 갖추게하고, 형의 아들 영(영)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유계(遺戒)를 쓰도록 명하고,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음 12월 8일 오후 6시경)에 정침실(正寢室)에서 고요히 세상을 떠나다. 부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영의정에 증직(贈職)을 명하다('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를 추증하다).
1571년 사후 1년 선조 4년 辛未 3월 임오일(壬午日)에 예안(禮安) 건지산(건芝山) 남쪽에 장사지내다.
1573년 사후 3년 선조 6년 癸酉 11월 초하루 위패(位牌)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奉安)하고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다.
1574년 사후 4년 선조 7년 甲戌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던 곳으로 서원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봄에 서원을 도산서당 뒤쪽에 세우기로 하다.
1575년 사후 5년 선조 8년 乙亥 여름에 도산서당 뒤에 서원이 낙성되니, 조정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다.
1576년 사후 6년 선조 9년 丙子 2월 정축일(丁丑日)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하다. 이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도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다. 11월에 문순(文純)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다. 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중정정수(中正精粹)를 순(純)이라고 하다.
1596년 사후 26년 선조29년 丙申 윤(閏) 8월 무인일(戊寅日)에 지석(誌石)을 묻다.
(출처: 진성이씨대종회)


 

참고자료

1. 퇴계 이황선생묘 답산기,2. 퇴계를 찾아서(묘소와 종택) 3.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사이트) 4. 진성이씨대종회(사이트) 5. 도산서원(陶山書院)(사진) 6. 도산서원의 도산매 7. 퇴계와 매화 8. 퇴계 이황의 글씨9. 묘갈명에 얽힌 퇴계 이황의 인격 10. 퇴계의 유언 11. 퇴계선생 묘소12. 퇴계 이황선생 자명시13. 현초 이유태 화백의 동양화14. 도산서원 사진



□ 배경 음악/ 김영동 작곡 ‘청초의 계곡’ 
□ 내용 구성, 한시 변역/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