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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그리운 선조] 5. 고종황제의 꿈이 서린 원구단(圓丘壇)

잠용(潛蓉) 2012. 10. 22. 11:03

“고종황제의 꿈이 서린 원구단(圓丘壇)”

 

“원구단은 고종 황제의 자주 독립국가에 대한 꿈으로 이룩된‘ 민족의 성지’다.
국가에서 천제(天帝: 애국가의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던 거룩하고 성스런 장소였다.
이런 소중한 문화유산을 국가가 보호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남의 문화를 따르기 위해 자기의 소중한 문화를 버릴 것인가?..-


[사진 ↑] 즉위식에서 대 황제복장으로

위의(威儀)를 갖추신 고종황제의 당당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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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울시의 발표에 의하면 2009년 7월 말까지원구단의 정문을우이동에서 옮겨오고 부속유물도모아서 옛 원구단의 모습을 되찾아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원래 원구단은 개천절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고, 한말 개항의 거센 역풍과 온갖 국난을 몸소 정면으로 겪어야 했던 고종황제의 자주독립국에 대한 간절한 염원의 결실로 이룩된 원구단이,일제에 의해 악의적으로 파괴되고 훼손된지 어언 100여년... 조국이해방되고 다시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가 파괴해 팽개친그대로 마치 남의 일처럼 방치해 두어일반 국민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지금이라도 버려진 민족의 성지, ‘제천(祭天)의 성지(聖地)’를 다시되찾고 복원시켜 고종황제께서 미쳐완성하지못한 원대한 꿈을 이루어 드리고, 우리의 소중한 민족혼과 자존심을 일깨워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참고] 일부에서 ‘원구단(?丘壇)’을 ‘환구단’이라고 발음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자로 10환(환), 100환으로 사용할 때는 ‘환’으로 발음하지만, 원구단만은 환구단이라고 하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도 천자(天子)가 동짓날 언덕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원구’(한자로는 ?丘, 또는 圓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민중서림 한한대자전, 이상은 감수)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 즉위식을 올리다]


 

[사진 ↑] 대한제국 출범후 4인교를 타고 경운궁으로 환궁하시는 고종황제 (1907년, 사진-테오도르 잔더)

이 날의 감격을 <독립신문>은 아래와 같이 전하였다. “십월 십이일(광무 원년 1897년 10월 12일) 황제폐하끠오셔 오뎐 두시에 장엄한 위의(威儀)를 베프시고 황단에 임하샤 하느님끠 제사하고 황제 위(位)에 나아가심을 고하고 오뎐 4시반에 환어(還御)하셧스며, 동일 졍오 십이시에 만죠백관이 례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뎨 폐하끠와 황태후 폐하끠와 황태자 전하끠와 황태비 전하끠 크게 하례를 올니며 백관이 즐거워하더라.”(중략)

“원구단은 이전에난 남별궁 터뎐에 단을 모앗난데 일홈은 원구단(?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난데 역군(役軍, 일꾼)과 쟝색(匠色, 공인) 쳔여명이 한달이 못되야 이 단을 거진다 건츅을 하얏난데 단이 삼층이라. 맨 밋해 층은 쟝광(長廣, 길이)이 영척(營尺)으로 일백사십사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노 싸셔 석자 길억지 놉히를 싸았고, 뎨 이층은 쟝광이 칠십이쳑인데 밋층과 가치 돌노 셕자 놉히를 싸앗고, 맨 웃층은 쟝광이 삼십륙척인데 셕자 놉히를 돌노 둥글게 싸서 올녓고, 바닥에난 모도(모두) 벽돌을 깔고 맨 밋층 가(邊)으로는 둥글게 석츅을 모으고 돌과 별돌노 담을 싸앗스며 동셔남북으로 황살문을 하여 셋난데 남문은 문이 셋이라.”(중략)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

“전날밤 쟝안의 샤사집과 각 시전(市廛)에서 색등을 밝게 달아 쟝안의 길들이 낫과가치 밝으며 가을달이 또한 밝은 빗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빗치더라.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놉히 걸어 인민의 애국지심을 표하며 각 대대병뎡(大隊兵丁)들과 슌검(巡檢)들이 규칙 잇고 례절 잇게 파슈하야 분란한 일이 업시하며, 길에 다니난 사람들도 얼골에 즐거운 빗이 낫하 나더라.”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자)

 

이날 고종(高宗, 1852.7.25~1919.1.21, 조선 제 26대왕)은 서울 소공동에 새로 낙성한 ‘원구단(?丘壇)’에서 황제(皇帝)로 즉위한다는 사실을 하늘에 알리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올렸다. 다음날 13일에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제위(帝位)에 오른 것과 국호를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남의 나라(청나라) 연호를 쓰던 것을 우리 연호인 광무(光武)로 정했음을 선포했으며, 이어 14일에는 이 모든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 참으로 놀라운 개혁이었고 오천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역사 개국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고명사신을 보내어 천자(중국 국왕)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우리 황제가 스스로 하늘에 고하고 제위에 올랐다. 우리도 이제는 명실상부한 자주 독립국가임을 당당히 내외에 선포한 쾌거였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도 조선은 중국 천자의 일개 제후국으로서 조선국왕은 종묘와 사직에 대한 것 이외에는 마음대로 하늘에 제사조차 지낼 수가 없었다.

고천의식(告天儀式)에 앞서 고종은 길지(吉地)를 골라 원구단을 쌓을 것을 지시했다. 지관이 찾아낸 해좌사향(亥坐巳向)의 길지가 바로 오늘의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일대였다. 이곳은 원래 태종(太宗)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집터로, 뒷날 선조(宣祖)의 셋째 아들 의안군의 별궁이 들어섰던 곳이다. 또 임진왜란 뒤 한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거처가 되었었는데 이런 계기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남별궁(南別宮)을 두었던 자리가 됐다.

이 명당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칙에 따라 둥근 원단을 쌓고 12층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세겹으로 토담으로 둘러쳤다. 그리고 윗단에는 가장 상위에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를 모시고 이어서 황지기위(皇地祗位), 태조 고황제위(太祖高皇帝位)의 3위를 모시고 두번째 단에는 태명위(太明位: 해)와 야명위(夜明位: 달), 셋째단에는 사독(四瀆, 조선시대 제사를 지낸 네개의 큰 강, 즉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한강, 서쪽의 대동강, 북쪽의 용흥강), 대천(大川), 사토(司土)까지 12위를 모셨다. 그뒤 1902년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서 돌북(石鼓) 3개로 된 석고단도 만들었다. 이 원구단은 공적인 국가의 제단이며 대한제국이 자주국임을 나타내는 가장 신성한 성지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내린
“대황제 조서(大皇帝 詔書)”

광무 원년 십월 십삼일에 하느님을 받드시고 국운을 이으신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가라사데,
“짐이 생각컨데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로 강토가 나누어져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다투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마한과 진한과 변한을 합쳐 아울렀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함이라.

 

우리 태조(太祖)께서 용흥(龍興)하시는 처음에 이르러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 넓어 북으로는 말갈(靺鞨)의 국경을 다 차지하심에 그 치적과 염사가 나고, 남으로는 탐라국을 거두심에 귤유(橘柚)와 해착(海錯)을 공물로 바치는지라 4천리의 땅에 하나로 다스리는 치적을 세우시며, 예악과 법도는 당우(唐虞)를 조술(祖述)하시고 산하가 공고함에 복을 우리 자손 만세 반석의 종에 드리우셨거늘 오직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시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군신과 백성과 군대와 시정(市井)이 하나의 말과 하나의 소리로 규혼 제유(규혼제유)하여 장계를 수십번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짐이 사양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어 음력으로 금년 구월 십칠일에 백악산(白岳山) 남쪽에서 천지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을 삼고,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을 고쳐 쓰고 왕후민씨(王后閔氏)를 책봉하여 황후(皇后)를 삼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삼아 오직 이에 경명을 비이하고 비로소 거전을 칭하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하셨더라.

“하나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과 넉넉한 녹봉으로 신하를 기르는 것은 원래 그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하게 하고자 함이니 나라가 편안하고 위태로움은 전적으로 관료의 탐학하고 청렴한 데 달렸는지라, 만약 관리가 간사하고 탐학하면 뇌물이 횡행하고 용열하고 사나운 자들이 요행으로 출세하여 공이 없어도 상을 받으려 무릅쓰고 이서(吏胥)가 무문(舞文)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니 정사의 문란함이 사실은 여기에서 비롯할 것이다. 금년 십월 십이일 이후로는 서울에 있는 대소 각 아문과 지방에 있는 관찰사와 부윤과 군수와 진위대장과 이서, 조역 등이 다만 뇌물을 탐하고 법을 어겨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죄를 지사(指使)려 사전에 발생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는, 조정관리는 나이 팔십 이상과 사서인으로 나이 구십 이상인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하나는, 출중(出衆)한 병정을 고하면 그 집 식구는 해당 부(部)에서 후하게 대우하고,
하나는, 옛날 과오를 가지고 초라한 집에 은거하고 있는 선비가 찾아내고, 쓸만 하며 무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자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의 관찰사가 사실을 적어 천거하면 해당 부에서 복해하여 불러 채용함을 편리하게 하고...,
하나는, 각처에 주인이 없는 땅은 해당 지방관이 사세히 살펴 보고하면 관찰사가 두번 더 살펴서 마감하여 과연 허날(虛捏)이 없거든 바로 전령을 제면하고 그 땅은 백성을 불러 개간케 하고,
하나는, 무음 무조관의 7품 이하는 각각 한 계급을 더하고,
하나는,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지라 역대에 세번 복(服)하여 아뢰는 조목이 있는데 실출지 벌이 경어실입하니 무릇 문형 관원은 자기의 소견만 고집하지 말고, 뇌물과 청촉을 따르지 말고 힘써서 독정을 하고,
하나는, 모반 강도 살인 간통 편재 절도등 육범(六犯) 외에는 각기 한 등을 감해주고,
하나는, 각도 민인이 고혈하고 간난하고 피잔하고 병이 있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자는 그 지방관이 뜻을 더하여 어루만져 구완하여 때를 잃지 말게 하고,
하나는, 무릇 산과 해변에 있는 당집이 기우러지고 무너진 것이 있으면 그 지방관이 경비를 계산하여 해당 부에 보고하고, 때를 맞추어 수리하여 정성과 공경함을 밝히고,
하나는, 각도에 도로와 교량이 헐어지고 무너진 것이 있으면 지방관이 실상을 조사하여 밝혀 수리하여 다니는 데 이롭게 하고,
하나는, 조서 내에 각 관청을 그 지방의 관원이 모두 실상 마음으로 받드러 행하여 힘써 짐의 은덕이 백성에게 고루 미치게 하여 짐이 민망히 생각하는 원원(源源)한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 옛날의 버릇에 연연하여 한갓 헛된 문구로 조칙을 해석하는 것는 해당 관찰사가 능히 깨닫고 살펴서 참주치 못하거든 내부에서 일병 규참하여 엄중하게 처리하라.

아, 기쁘도다. 하느님께서 도우심을 입음이라. 대호를 환함은 이로써 솔토의 마음을 믿게 함이라. 옛 것을 개혁하고 새로움을 도모하며 덕화를 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고자 하여 천하에 폐여 고하니 모두 듣고 알라.”고 하셨더라. (<독립신문> 광무 원년 11월 19일자, * 현대 표기법으로 고침)

 

 

[대한제국을 선포한 뜻]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부터 고쳐 공식적인 칭호에서 군주(君主)를 대군주(大君主)로, 전하를 폐하(陛下)로 높여서 불렀으며, 황제의 명령을 칙(勅), 황제 자신의 호칭을 짐(朕)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함으로써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그뒤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같은 해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丘壇)을 세웠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898년 절영도(絶影島: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租借)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는 외국이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절영도 조차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韓露銀行)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趙秉式)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하고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싸움은 일단 수구파의 승리로 끝났다.


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하고, 정체는 전제군주제이다. 수구파 정부는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실력을 기르는 데 힘쓰기보다는 친러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이를 지켜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안 정부도 1904년 1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

 


[사진 ↑] (위) 새로 조직된 대한제국 초대 조정대신들(사진: 키위블로그). (아래)4인교로 행차하시는 모습.

이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은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았고,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외교권까지 강탈하여 갔다.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문을 닫고 말았다. (출처: 오현승)

[원구단 시련의 역사 시작]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일어나 1986년 7월 2일 창립된 개화파의 정치단체인 독립협회와 자주적 수구파들이 연합하여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고, 황제존칭운동이 일어났다. [사진→] 천제(天帝)와 지기(地祇) 등 12신위를 모시고 천제(天祭)를 올리던 황궁우가 지금은 호텔 뒤편에 방치되어 있다.

당시 열강들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고,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는 러시아와 밀착되어 갔으며, 미국과 독일은 실리를 추구하는 행보를 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꾀하기 위한 세력균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1897년 2월 20일 고종의 경운궁(慶運宮) 환궁으로 일단 정국은 정상을 되찾았고, 고종 환궁 뒤 개화파와 수구파들은 함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황제위에 오르는 것을 러시아가 강경히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고종은 대책을 마련하여 관료들에게 밀지를 내리고 여론을 조성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1897년 5월부터 고종이 황제의 제위에 오를 것을 바라는 독립협회 등 각계각층의 빗발치는 상소가 있었다. 위로는 의정대신 심순택으로부터 아래로는 시정 상인들까지 제위에 오를 것을 강력 주청하는 상소가 연일 빗발치자 조정에서는 제위에 오를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여 갔다.

이에 고종과 대신들은 칭제를 뒤로 미루고, 우선 연호를 정하는 건원을 하기로 하여 1897년 8월 16일 '건양(建陽)'을 '광무(光武)'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하여 조서로 반포하였으며, 외부(外部)에서 새 연호를 각국 공사관에 통고하였다. 그러면서 칭제운동이 계속 전개되어 그해 9월 21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 명령이 내려졌으며, 장소는 서울 남서쪽 회현방 소공동으로 자리를 정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9월 25일 독립협회 회원인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은 "황제의 위에 오른다 할지라도 만국공법상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므로 정부와 협의하여 그 방책을 정해서 조속히 보호(寶號, 황제)를 올림으로써 임금을 높이는 여론에 부응하라"고 칭제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9월 27일부터 칭제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을 시작하여 의식장소로 원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10월에 들면서 의정대신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등의 제위에 오를 것을 요구하는 또 한 차례의 정청(庭請, 세자나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서 왕에게 보고하거나 명령을 기다림)이 계속되었고, 이에 마지못해 따르는 면종(勉從) 형식을 취하여 10월 12일에 즉위식을 거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이 원구단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경운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길가에는 축하 깃발을 들고 환호하는 백성들로 꽉 메워졌다. 고종이 원구단에서 하늘의 천제(天帝)와 땅의 지기(地祇)에게 황제에 즉위한 것을 알리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올리고, 의정대신 이하 백관이 시립하는 가운데 즉위단 금의상좌(황금 의자)에 오름으로써 의식은 끝이 났다. 다음날 13일에는 조서를 내려 고종황제가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새로 대한(大韓)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고, 14일에는 이 사실들을 외부에서 각국 공사관에 통보하였다. 이로써 실질적인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독립신문> 기사를 보면 “황제 즉위식이 있던 전날밤은 장안의 사사집과 각 시전에서 색등불을 밝게 달아 장안의 길들이 낮처럼 밝았으며,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심을 표시하였으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얼굴에 즐거운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고 보도하였다.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애국심과 자주독립을 갈구하던 백성들의 희망이 분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그 여파로 진행된 아관파천을 겪은 국민들은 우리 힘으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기대하며 새로운 제국의 탄생을 바라보고 이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원래 원구단이 지어진 서울 소공동 87번지 일대는 조선 태종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부마 조대림(趙大臨)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공주댁’, ‘소공주댁’이라 불렀다. 선조 16년(1583)에는 이 집을 화려하게 보수하여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성(珹)에게 주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주둔하였으며, 이듬해 이를 쫓아낸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거처하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후 이곳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됨에 따라 남별궁(南別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의 의논으로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奎弘)과 영선사장(營繕司長) 이근명(李根命)이 지관을 데리고 현재의 조선호텔 자리인 남부 회현방 소공동계에 원구단 터를 잡았다. 그리고 역대의 ≪禮典≫을 참고하여 원구단을 건립하였다. 이어 원구단에서 동지와 설날에 기곡제(祈穀祭)를 행하게 하였으며, 종래 남단(南壇)에서 제사를 지내오던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도 원구단으로 옮겨 모셨다.

원구단의 제례도 역대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천자국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종묘 사직보다 우선하는 대사(大祀)의 첫머리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곧 나라를 상징하는 신전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원구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화강석으로 된 3층의 원단이며, 중앙 상부에 황색으로 칠한 원추형의 지붕을 얹었으며,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의 3층 담장을 마련하였다.

광무 3년(1899)에 원구단 북쪽에 팔각3층 목탑 형식의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여 황천상제(皇天上帝) 이하 여러 신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그 상량문은 광무 2년 8월 30일에 올린 것인데, 글은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글씨는 서정순(徐正淳)이 썼다. 이어 광무 5년(1891) 12월에는 관민 유지의 발의로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세우기로 결의하여, 이듬해 준공하였다. 석고는 하늘의 소리를 지상에 전하는 임무를 가진 것으로 3개의 석고에 용무늬를 새기고 있다. 이 석고의 건립은 중국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돌비에 새겨 열 곳에 세웠다는 고사를 본뜬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과 경운궁은 여지없이 훼손되었다. 융희 2년(1908) 7월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으로 원구단 일대의 땅이 국유지로 편입되었으며, 1911년 2월 일제는 원구단과 그 주변 지역을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편입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1913년 4월에는 이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평의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착공하여 이듬해 9월 완공되었다. 나라의 혼이 깃든 가장 신성한 공간에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친일세력들이 먹고 자고 배설하는 호텔을 지었으니, 나라 잃은 민족의 치욕의 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조선호텔이니 철도호텔 건물은 1968년 헐리고 지금의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다행히 황궁우와 석고단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상으로 볼 때 '팔각당'이라는 의미 없는 이름으로 남은 황궁우가 있는 곳은 조선호텔 커피숍의 후원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나마 고층 빌딩에 가려져 대한제국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과 역사의 계승은 복잡하고 바쁜 일과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일제의 만행과 더불어 근대화의 미명 아래 우리나라의 국운을 건 역사의 현장이 의미 없이 변질되고 있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황궁우 삼문의 계단석과 경운궁 중화문·중화전의 용(龍) 문양이 새겨진 답도(踏道)를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희궁 숭정전의 답도에 새겨진 봉황(鳳凰) 문양과 비교하여 그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글: 나각순/ 두레 문화기행 연구위원, 한국사) [사진 ↑] 만년의 고종황제

[원구단의 본래 모습]

 



 

[사진↑] (위) 준공 당시 황궁우와 원구단의 웅장한 모습. (아래) 당시의 원구단 주변 풍경.


○ 원구단의 구조
서울특별시 중구(中區) 소공동(小公洞)에 있는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둥근 단으로서 조선 초기에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알 수 없고, 이 원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만들어졌다. 그 뒤 1899년 원구의 북쪽에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고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추존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삼았다. 1913년 일본에 의하여 원구단이 헐리고 그 터에 지금의 조선호텔이 세워졌지만,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정의 황궁우는 지금도 남아 있다.(사적 제157호)

원래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데, 일명 원구단 (圓丘壇) 또는 줄여서 원단(窩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 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사각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은 둥글게 쌓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진↑] 단군이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참성단. 강화도 마니산 위에 있다.(사적 136호)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되었다.《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 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는데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 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그 전부터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왕이 원구(圓丘)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적전(籍田)을 경작하였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그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 없는 제도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내부의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 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되었다.

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는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게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 실시된 원구제(圓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에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圓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는데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오늘날 서울 한남동과 보광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건립지를 선정한 후 단(壇)을 건립하였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은 백관을 데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 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는데, 만행을 부려 1913년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현재의 조선호텔)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 자리에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과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만 남아 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태조 고황제(이성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사진↑] (위) 황궁우로 올라가는 답도(계단)의 용두 조각(사진: suk77sung). (아래) 천제를 드릴 때 제례 절차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3개의 돌북(石鼓). 둘레에는 정교한 용무늬 조각이 있다.

○ 원구단의 방위적 위치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지가 된 서울의 궁궐배치를 살펴보면 국정의 중심이 된 경복궁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내려온 평탄한 용의 중심맥 위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동쪽에는 종묘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함으로써 좌묘우사(左廟右社) 배치양식을 따랐으며 경복궁의 남쪽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원구단을 만들었다. 이렇듯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북악산,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남쪽에는 원구단이 사방 배치를 이루고 있어 평면상으로 경복궁이 십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공간은 모두 왕이 신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신성한 일이며, 이런 행사가 이루어지는 공간 역시 신성한 공간이다.따라서 왕이 나라를 대표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므로 가장 신성한 곳이다. http://myhome.naver.com/tambang/bb/bb5.htm)

○ 원구단의 건립 유래
원구단은 제왕이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으로서 이름 그대로 단을 둥근 언덕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 이렇게 원단(遝壇)을 쌓고, 그 위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고종이 황제위에 나아간 것은 건양 2년 10월의 일인데, 이에 앞서 황제 즉위의 의식 절차 등을 마련하면서 조정에서는 이 원구단(환丘壇) 축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즉 그 해 9월 21일에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圭弘)이,
“천지(天地)를 합제(合祭)하는 일은 사전(祀典)에 있어서 제일 큰 것인데 원구(환丘)의 의제(儀制)를 아직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증전(曾前) 남교(南郊)에서는 다만 풍운(風雲) 뇌우(雷雨)만을 향사하였는데 단유(壇유) 폐급(陛級)이 척도에 맞지 않으니, 제사 의식에 있어서 실지 미안한 일입니다. 동지절(冬至節) 향사에 있어서 그대로 일을 볼 수 없는 일이니 개축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 주상의 재가(裁可)를 바라옵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 · 황지기(皇地祇) 신위판(神位版) 및 종향(從享)하는 일월(日月) 성신(星辰) 풍우 뇌우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神牌) 조성과 생뢰(牲牢) 변두(邊豆)의 제반 의문(儀文)을 널리 역대의 예(禮)를 상고하여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하겠는데, 신원(臣院)으로부터 감히 편리할 대로 할 수 없아오니 시(時) · 원임(原任) 의정(議定)과 밖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심이 어떨가 하옵니다.”고 아뢰니 왕이, “천지를 합제하는 일이 막중하다. 경(卿)은 영선사장(營繕司長)으로 더불어 상지(相地) 택정(擇定)하여 복일(卜日) 축단(築壇)하며, 제반의문(諸般儀文)은 서울에 있는 원임의정에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따라서 원구단 축조의 준비는 진행되었으며, 왕명에 의하여 장례원경 김규홍(金圭弘)은 영선사장 이근명(李根命)과 함께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을 데리고 원구단 설치할 곳을 성심(省審)하여 남별궁(南別宮) 옛 터인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의 곳을 길지(吉地)로 정하고 경계를 정하였으며, 10월 1일에는 단을 쌓는 여러 가지 일을 영선사로 즉시 거행하게 하였다. 또 시역(始役)하는 날을 음력 9월 7일로 정하며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위(正位) 및 종향(從享)의 위판(位版)을 조성하게 하니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달 7일에는, 다른 종묘 · 사직의 경우와 같이,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제서(司祭署)를 설치하기로 하고 제조 1인, 영(令) 1인, 참봉 1인의 직제를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11일까지는 정위(正位) 서사관(書寫官) 민병석(閔丙奭), 종향위(從享位) 서사관(書寫官) 이범찬(李範贊) 및 영선사장(營繕司長) 이근명(李根命), 기사(技師) 김완식(金完植) 등에 의하여 위판(位版)과 단의 조성이 끝났으며, 12일(음 9월 17일)에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의(威儀)를 갖추어 새로 조성된 원구단에 나아가 친히 천지에 고제(告祭)한 다음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로부터 원구단은 국가에서 높여 받드는 중요한 시설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인 광무 2년에는 다시 이 원구단 경내 북쪽에 천 · 지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皇穹宇)를 짓기로 하였다. 따라서 8월에는 상량문(上樑文)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윤용선(尹容善: 의정부 참정)이, 서사관으로 서정순(徐正淳)(법부대신)이 임명되고, 음력 7월 18일(양 9월 2일)을 정초(定礎) 길일로 택정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공역비 32,875원을 예비비 중에서 지출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화강암으로 기단(基壇)과 난간을 축조하고 8각 3층의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진 이 황궁우의 건축은 이듬해까지 완공되었으며 그 해 즉 광무 3년 12월 22일에는 동지일 예제(例祭)를 겸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하늘의 배위로 모시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거행하고 대사(大赦)를 반포하니 근래에 있었던 한 성사(盛事)였다. 그리고 광무 6년(1902)에 고종황제의 망육(望六) 및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양대 행사가 진행됨과 함께 다시 황궁우 동쪽에 고종황제의 성덕(聖德)을 북 모양으로 된 돌에 새겨 송축(頌祝)하는 석고단(石鼓壇)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양위, 순종의 즉위와 함께 일제의 세력이 만연됨에 따라서 황제국(皇帝國)으로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원구단의 의례도 크게 간소화하였다. 융희 2년(1908) 1월에는 종묘 · 사직 대제(大祭)와 함께 원구단 대제시에도 3헌관(獻官)을 1인으로 겸행(兼行)하게 하고 그 아래의 제집사(諸執事)도 혹 겸행, 혹 감수(減數)하였으며 그 해 7월에는 다시 제사를 연 2차로 제한하였다. (서울600년사) 

 

○ 원구단의 연혁
원구단은 이름 그대로 둥근 언덕같이 쌓은 단으로서 원단(圓壇)이라고도 호칭하였다. 옛날에는 ‘천원 지방(天圓 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을 둥글게, 땅에 제사드리는 단을 네모나게 쌓은 것이다. 국왕으로서 정결한 곳에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기원 ·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동양에서 오랜 옛날부터의 일이며, <고려사(高麗史)>에도 성종 2년(983) 정월에 왕이 원구단에 기곡(祈穀) 즉 풍년 기원제를 드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근세조선의 한양 천도와 함께 모든 국가적 시설을 갖출 때에 이 원단도 이루어졌다. 왕조실록에 보면 태조 7년(1398) 4월 가뭄이 심할 때에 종묘 · 사직 · 원단과 여러 용추(龍湫)에 비를 빌었다고 하였으며, 태종 4년(1404) 1월에는 원단의 기곡제를 한경(漢京)에서 거행하였다고 한 것으로서 고려를 계승하여 조선에서도 이 원단제천(환壇祭天)의 행사가 진작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위)건립 당시의 우아한 황궁우와 정문 모습. (아래) 답도(계단)도 없이 바닥에 아무렇게나벽돌로 복구해 놓은 현재의 원구단 출입문.

 

이 원단의 위치는 몇곳 문헌에 한강 서동(西洞) 또는 남교(南郊)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한남동 부근으로 생각된다. 또 세종 20년(1438) 12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박연(朴堧)의 상소 중에 풍사(風師) · 우사단(雨師壇)을 방위에 구애(拘壞)할 것 없이 원단이 있는 동학(洞壑)에 수목이 총무(叢茂)하고 인거(人居) 격절(隔絶)하며 동부(洞府)가 넓고 깊어서 단을 쌓을 곳이 많으니 제천지동(祭天之洞)에 천신지단을 쌓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을 보면 처음 이 부근은 동학이 넓고 깊으며, 수림이 울창하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원단의 구조는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단의 주위를 6장(丈)으로 하고 단 위에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오방(五方) 오제(五帝)의 신위(동쪽에는 靑帝, 중앙에는 黃帝, 남쪽에는 赤帝, 서쪽에는 白帝, 북쪽의 黑帝를 말함)를 봉안하였는데 단상에 자리가 좁아서 제향시에는 진설 헌작(陳設 獻酌)과 주선 진퇴(周旋 進退)에 불편이 많았다. 때문에 태종 11년(1411) 3월에는 예조에서 그 확충 정비를 건의하였으며, 이 건의에 따라 그 해 10월에는 남교에 원단을 다시 쌓되 단의 높이와 주위를 다 함께 7장으로 늘리고 올라가는데 12층계를 만들며 단 아래에는 세 개의 토담(獗)을 만들고 주위 담장에는 네 개의 문을 내었다. 그리고 단 남쪽에는 다시 넓이 1장, 높이 1장 2척, 창호방(窓戶方) 6척의 요단(燎壇)을 쌓으며 또 신주(神廚)와 재궁(齋宮)을 지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런데 이 원단 제사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말썽이 있었다. 즉 고려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왕이 원단에 친제(親祭)하고 또 천제(天帝) 옆에는 고려의 태조를 봉안하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건국과 함께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념에서 제천(祭天)은 천자(天子)의 할 일이니 국왕으로서는 거행함이 비례(非禮)라는 일부 중신들의 의견이 있었다. 따라서 태종 6년에는 왕이 원구단에 나가 친히 기우제를 행하려다 중지하고, 옥천군 유창(劉敞)을 보내어 거행하였으며, 11년 원단을 남교에 다시 쌓은 후에는 또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 하륜(河崙) · 예조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 등이 “제후국(諸侯國)으로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위치가 동방인즉 동방 청제(靑帝)에만 제사드려야 한다”는 주청에 대해서, 국왕은 “우리나라에서 원단에 제사드리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어찌 오제(五帝) 외에 육제(六帝)가 있을 것이냐? 예의상으로 제사드릴 것이며, 호천상제(昊天上帝)께 제사드릴 것이요, 불가한 일이라면 어찌 청제(靑帝)에만 제사를 드릴 것이랴?” 하며 의견이 대립되어 원단제의(환壇祭儀)를 일시 중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15년에는 다시 예문제학(藝文提學) 변계량(卞季良)이 “우리 동방은 단군이 하늘에서 하강하시었고, 천자(天子)가 분봉(分封)한 땅이 아닙니다. 명나라 황제의 조서(詔書)에서도 아조(我朝)의 일들을 두루 말하였으니 제천(祭天)의 사실도 반드시 알았을 것이지만 본국의 풍속과 예법을 존행하게 한 것이니 그 뜻이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 하늘에 명을 받았으며 하늘에 제사드리는 예속(禮俗)이 매우 오래니 거스를 수 없습니다. 남교에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상소에 의하여 변계량으로하여금 제문을 짓게 하고 영상(領相) 유정현(柳廷顯)을 보내어 원단에서 비를 빌게 하였으며, 그 후에는 원단에서 기우(祈雨)는 물론 기곡(祈穀), 보비(報丕)의 제사를 드리고 재실과 난간 · 담장 등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조에 또 원단 제사를 폐지함에 따라 단과 주위는 황폐하게 되었는데 세조의 즉위와 함께 다시 원단의 수축과 제향(祭享)을 실시하였다. 즉 세조 2년(1456) 12월에는 예조(禮曹)로 <고금예문(古今禮文)>을 상정하여 원구단을 쌓게 하였는데 그 규모는 단의 높이 5척, 주위 6장 3척, 유(獗)는 3처(處), 각 25보, 신단(神壇)의 남쪽 요단(燎壇)은 넓이 1장, 높이 1장 2척이며 방(方) 6척의 호(戶)를 남쪽 위로 내었다. 주원(周垣)의 사문(四門)은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14일에는 왕이 원유관(遠遊冠) · 강사포(絳紗袍)로 대가(大駕) 노부(鹵簿)에 시위(侍衛)를 갖추고 백관과 함께 장사진의 행렬로 원구 재소(齋所)에 나가 재계하고 15일에 면복(冕服)으로 단상에 올라 의식 절차에 따르는 제사를 거행한 후 돌아와 근정전에서 세자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으니 이는 개국 이래의 처음 있는 성사(盛事)였다.

또 세조는 이렇게 제천 원단의 수축, 제천행사의 거행과 함께 사직서의 예에 의하여 원구서(?丘署)를 설치하고 권무 녹사(權務 綠事) 2인과 예조 전향사 좌랑(典享司 佐郞)으로 겸임하는 승(丞) 1인을 두어 원구단의 수호 관리를 맡게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20여 년을 지나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원구단, 원구서의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서울600년사)

[일제의 조선 침략]
일본은 러시아의 세력에 밀려 자국세력이 퇴조하게 되자,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해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군은 2월 23일 대한제국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협조하고 일본군이 한국내의 군사전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부터 대한제국의 주권은 일본에 의하여 심하게 침해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04년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대한제국의 치안은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통고함으로써 치안권을 빼앗는 한편, 친일파 양성을 위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였다.

같은해 10월에 일본인 메가타 슈타로(目賀田種太郎)를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파견하여 재정권을 침탈했으며, 12월에는 친일분자 D.W.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그 밖의 일본인들을 군사고문·경무고문·학부고문 등에 임명하여 대한제국의 행정을 일본인들의 지배하에 두고, 국내외의 통신권과 외교권도 박탈하여 우리나라의 식민지화 작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905년 <러·일강화조약>을 체결한 다음, 같은해 10월 15일 일진회를 시켜 <한·일보호조약>의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토록 지시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1월 9일 특명전권대신으로 조선에 와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른바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여 결국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에 의거하여 1906년 2월 1일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장악한 다음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까지 무력으로 탄압하고,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두 나라를 합친다는「한·일합방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했다.


[고종 황제의 붕어(崩御)]

 

 

 

[사진↑] 일제의 집요한 간섭으로 여염집 장례처럼 치러진 고종 황제의 인산 모습.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앞서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에게 이준(李儁)등 헤이그 밀사편으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밀서를 전달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과 영국등의 방해로 실폐로 끝났으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7월, 장교들을 대동하고 덕수궁에 입궐하여 밀서의 사본을 고종황제께 제시하면서, “이와같이 음흉한 방법으로 대일본에 거부권을 행사하시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함만 못하다”고 위협하였다. 이어서 그는 “이번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폐하가 스스로 져야한다는 것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서 공공연한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므로 협약 위반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통고케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李完用) 친일내각은 그해 7월 6일 내각회의를 열어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곧바로 입궁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宋秉畯)은 “헤이그 밀사사건은 이제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고 있으며, 이대로 둔다면 어떤 중대사가 일어날지 모르니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하신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협박했다. 송병준은 고종이 안색을 달리하면서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자, 다시 “폐하, 만일 자결하지 못하신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폐하에게 사죄하거나 그것도 못하신다면 일전하여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 밖에 방도가 없다”고 거듭 협박하였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친일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다시 이를 촉구하자,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고 7월 20일 황태자(純宗)에게 자리를 양위한뒤 자신은 태황제(太皇帝)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마음놓고 조선의 내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3년 뒤인 1910년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한일합병조약>을 반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외교와 치안, 재정, 국방 등 일체의 권리는 일본총독에게 넘어갔다. 한편 덕수궁에 위폐되어 있던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하셨는데 이를 놓고 항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분명치는 않다. 그러나 고종이 한일합방 이후에도 김구(金九)와 안중근(安重根) 등 일본에 대항해서 만주와 미국 등 국내외에서 싸우는 독립운동가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에, 독살설이 완전히 근거없는 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이 3.1만세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일제의 원구단 훼손]

대한제국의 신성한 제천단을 일제가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한일합방후 1913년 일제는 원구단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조선총독부 부속 철도호텔을 지었다. 광복 후에는 철도호텔이 조선호텔로, 다시 지금의 웨스틴 조선호텔로 되었는데 신위를 모셔둔 황궁우(皇穹宇)만 덩그렇게 남아 고층빌딩에 사이에 갇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고종(高宗 1852∼1919) 황제가 즉위식을 앞두고 건축했던 원구단. 고종은 1897년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다. 고종은 명실 공히 천자(天子)임을 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이를 미리 상제께 고해야만 했다. 이로써 고종은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된 것이다.

고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우리 민족이 그동안 잊고 있던 상제(上帝)를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민족 역사의 뿌리, 민족의 혼을 되찾은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라의 통치자는 하늘의 최고신 상제께 천제를 올리고 통치권을 받아야만, 정통성이 인정되어 비로소 땅위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그 원구단 제단에서 천제에게 제사를 올린 후 황제에 즉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격하시키고 왜곡시키기 위해서 일본은 어떤 짓을 했던가? 일제의 한국혼 말살의 현장이, 지금도 바로 수도 서울 한복판 장사꾼이 범람하는 심장부에 방치되어 있다. 사적 제157호인 원구단(?丘壇-서울 중구 소공동 87-1) 이 거기에 있다. 밑둥은 두더지 소굴처럼 뻥뻥 뚫려 지하 주차장으로 쓸쓸히 방치되어, 대한제국과 민족혼이 그대로 방치되고 국민의 자존심을 밟고 다녀도 누구 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물론 일본제국이다. 바로 그 일제가 원구단을 훼손시켰다. 1913년 그들에 의해 원구단이 철거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음해에 호텔이 들어서면서 민족의 성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호텔 경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원구단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즉위식을 마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역사적인 장소로 사대문 안의 명당으로 꼽힌다. 소유는 국유. 1967년 7월 15일 사적 제 157호로 지정됐다. 「Mestimes」는 2005년 3.1절을 이틀 앞둔 27일 ‘역사교훈실천 시민운동연합’의 정준영 대표와 ‘우리말과 예절찾기운동’ 대표 최훈영, 두 분을 모시고 옛 사진을 중심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겹겹으로 지하 차도와 상가를 뚫어 마치 불법 건축물의 경연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 괴로운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정준영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말한다. 일명 원구단 (?丘壇) 또는 줄여서 원단(환壇)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지신(地神)에 제사드리는 사직단(社稷壇)이 음양론(陰陽論)에 따라 방형으로 쌓는 것과는 달리,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와 원이상천(圓以象天)이란 관념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둥글게 쌓은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 최훈영씨가 덧붙인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농경문화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됐으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祭天儀禮)로 시행됐다.《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古記)> 에 의하면 ‘고구려·백제가 다같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단(壇)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지낸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이미 제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성종 2년(983) 정월조에는 ‘왕이 환丘에서 祈穀祭를 올리고, 몸소 籍田을 경작했다’는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됐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 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 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됐다.

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대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고, 세종 원년(1419)에 실시된 원구제(?丘祭)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했다.

조선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 2년(1456년) 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의 원구단(원丘壇)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여 제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는데, 문헌에 보이는 원단의 위치는 오늘날 한남동ㆍ보광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고 국호를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해에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 규모와 체제는 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영선사(營繕使) 이근명(李根命) 등을 시켜 길지인 남교(南郊) 회현방, 바로 지금의 소공동으로 터를 선정한 후에 단(壇)을 건립했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고종 황제의 즉위를 앞두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원구단을 쌓았고, 10월 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원구단에 나아가 천신에 고제(告祭)한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이 때에 건립된 원구단의 체제를 보면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황지지위(皇地祗位)는 단의 제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각각 제2층의 동·서쪽에 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의 자리를 두고,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자리를 두었다. 그러나 한일합방후 1911년 2월부터 원구단의 건물과 집터는 조선총독부 관리 하에 들어갔고, 이어서 1913년 마침내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철도호텔(후에 조선호텔)을 지었다.

 

[사진↑] (위)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 정문으로 사용된 원구단 정문

 

 

 

 

[사진↑] 일제가 훼손시킨 민족 성지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효성가족선교회 박영록 총재

 

현재 원구단의 북쪽 모퉁이 자리에 황궁우(皇穹宇)의 팔각당(八角堂)과 돌로 만든 북인 석고(石鼓) 3개만 남아 있다. 팔각당 건물은 광무 3년(1899)에 축조된 것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건물이며, 이곳 중앙에는 조선태조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고, 익공계 건물로 청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복잡한 장식이 있다. 또한 석고는 제천(祭天)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몸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는, “일제강점기 왕조의 유산이 무참하게 파괴된 것이 어찌 한둘인가. 그런데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유적처럼 철저하게 파괴된 것도 없다. 제국의 법궁이던 경운궁이 그렇고,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항쟁하다가 산화한 영혼들을 위해 지은 장충단이 그렇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한 원구단의 처참한 모습”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이어, “자주독립의 상징인 원구단을 일본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1914년 총독부는 황궁우만 남기고 제단인 원구단을 헐어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이때부터 황궁우는 호텔 후원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광복 후 조선호텔은 더욱 우람한 건물로 개축됐다. 그 주변에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황궁우가 어디에 있는지, 원구단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호텔을 찾는 인사들은 호텔에서 세운 정자쯤으로 알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한편, 원구단 부지의 일부가 어떤 경유를 거쳐 (주)삼성생명의 땅이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등기부와 토지대장 상에는 ‘공개불가’의 낙인만 찍혀있을 뿐이다. 최근 서울시가 삼성생명으로부터 원구단의 시청 광장쪽 부지 소공동 97의 3일대 246평을 사들여 이곳에 보행통로를 내고 느티나무 등 70그루의 그늘목과 인공폭포, 화강석 기둥을 조성, 원구단을 내,외국인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명소로 꾸며 놓았다.

지금 원구단의 둘레 난간은 지금 군데군데 균열이 생겨 언제 붕괴될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대한제국과 민족의 혼이 서린 원구단이 왜 통곡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알 수가 없으면, 서울시가 조성해 놓은 광장에 서서 건너편, 덕수궁 정문에 걸린 대한문(大漢門) 현판을 바라보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혼을 말살시키려고 당대의 명필 남정철에게 지시해서 본래의 대안문(大安門, 국태민안의 뜻)을 떼 내고 안(安)자 대신 한(漢, 중국)자를 써서 중국의 속국임을 비꼬는 뜻으로 써 붙인 편액임을 안다면 한맺힌 통곡의 뜻을 알수 있으리라. (박선협 기자, mest@freechal.com)

 

 
[원구단 복원을 위한 각계의 건의]


“원구단 일대를 민족 번영의 터전으로 가꾸자”
원구단을 포함한 경운궁(덕수궁)과 경희궁으로 이어지는 서울 정동일대는 조선시대 이후 근대 서울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되었었다. 한양도성의 서부 서소문과 서대문 사이에 위치하여 한양도성의 서쪽 성벽이 보호막을 이루어 일찍이 왕실과 조정 관료의 주거공간이 되었고, 왕궁과 왕비능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14세기 초 경운궁 터에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 시절 살았던 잠저(潛邸)로 알려져 있는 명례궁(明禮宮)이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세조의 세자였던 의경세자(懿敬世子, 德宗)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한때 궁에서 물러나 머물렀는데 이때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과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잘산군, 山君)과 함께 살았던 것이다. 이후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되니 이 집은 자연히 월산대군의 집으로 이어졌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 임금이 불 탄 궁궐에 대신하여 월산대군 집이었던 이곳에 잠시 시어소(時御所)로 행궁을 정하니, 정릉동 행궁이라 하였다. 나아가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여 명실공히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 일대는 왕실의 집터에서 잠저·행궁으로 이어져 조선왕조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운궁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정치적 혼돈은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자 한때 서궁(西宮)이 되어 서궁유폐(西宮幽閉)의 역사현장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로부터 옥새(玉璽)를 물려받은 인조는 이곳에서 즉위하여 창덕궁에 나아갔고 인목대비는 경덕궁(경희궁)으로 옮겨졌다.

그 후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고종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을 중건하면서, 원구단에 나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을 하늘에 고하고 경운궁을 황제궁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대한제국이 등장하는 시점에는 황제의 제단인 원구단과 황제궁인 경운궁이 마련됨으로써 서울의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설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약해진 대한제국은 광무개혁 등을 통하여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서구열강과 일본제국의 침탈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 침략에 우위를 차지한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핑게로 강제로 고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러나게 하여 경운궁에 머물게 하였으며 그 대신 순종을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즉위시키고 창덕궁에 머물게 함으로써 경운궁 정치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시에 경운궁은 단순히 상왕의 덕과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의 덕수궁(德壽宮)으로 전락하였다. 덕수궁은 조선 초 상왕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곳으로 개성에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경운궁의 본 이름을 회복하여 생명력을 불어 넣어야 할 책무가 있다.

한편 원구단 터 역시 남별궁이 있던 곳으로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부마 조대림(趙大臨)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집을 작은 공주댁, 또는 소공주댁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소공동’ 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 이 집을 화려하게 보수하여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성(珹)에게 주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지휘본부가 되었다가 한양 수복 후 명나라 군사의 사령부가 이용하였고, 그 뒤 중국 사신이 오면 국왕을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물러 남별궁이라 칭해졌던 것이다.

또 미국 대사관저(영국대사관 터 일부 포함) 일대에는 일찍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정동이라는 지명이 남게 되었다. 정릉의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가 자리하여 조선 불교의 선·교(禪敎) 통합과정에서 선종의 수찰 구실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경순공주(敬順公主)가 비구니가 되어 비운에 간 두 동생 방번(芳蕃, 撫安大君)·방석(芳碩, 宜安大君)과 더불어 어머니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중종 연간에는 유생들의 방화로 불에 타고 흥천사 동종(銅鐘)만 남게 되었다. 정릉은 태종 때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에 이장되어 한때 그 종적을 찾기도 어려웠다가, 선조 때 변계량(卞季良)의 정릉 고천문(告遷文)을 찾아내 능을 정비하였고, 현종10년(1669)에 송시열의 주장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이는 왕위계승을 놓고 신덕왕후와 태종과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로 해석되는 사건이라 하겠다.

또한 이장되고 남은 정릉의 병풍석 등 석물은 청계천에 처음 놓여진 돌다리인 광통교의 교각으로 사용되어 조각된 석상이 익사하기 직전의 상태로 보이는 등 정권 다툼의 냉혹함을 보는 듯하다. 그 석물들은 최근에 청계천 복원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빛을 보게 되어 경희궁터 방공호 앞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서쪽에 임시 보관되고 있으며, 앞으로 광통교가 복원되면 시민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던 정동 일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들어 서구 근대 문물의 유입과 그 실험장이 되었다. 배재학당·이화학당·독립신문사·정동교회 등이 들어서서 근대교육과 근대언론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또한 미국 대사관·러시아 공사관·불란서 영사관·영국 영사관·독일 영사관 등이 이 일대에 자리하였고,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등 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여지면서 친일·친러·친구미 세력이 형성되어 열강의 외교적 각축 터전이 되기도 하였다. 급기야 중명전(中明殿)에서는 을사늑약이 고종의 서명날인도 없이 외무대신에 의해 사기 행위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대 역사의 외교무대 현장은 지금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니, 경기여고 자리에 추진 중인 미국 대사관저의 확장공사는 급기야 시민의 힘에 의해 중단되었고 용산 미군기지로 옮겨갈 듯하다. 더욱이 우리 스스로가 문화유적지를 파괴하고 있는 인근 고층빌딩의 건축 등이 현안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구세군본영의 문화재 지정과 같이 현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우리의 역사 문화유적을 지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곳 정동일대를 부국강병과 자력경제 및 민주번영의 터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실천의 장으로 이끌어 내어야 할 것이다.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원구단 천제와 함께 해온 우리 민족”
- 원구단(환丘壇) 천제(天祭) 터의 경세사적(經世史的) 위상(位相)-
지금 조선호텔이 깔고 앉아 있는 원구단 천제 터는 원래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동산, 인체에 비유한다면 생명의 젖줄인 여성의 유방에 해당된다. 태양의 불덩이가 비화하여 생긴 지구의 탯줄, 배꼽자리, 우주의 빛이 내린 바로 그 길목인 강화도 화도면에 있는 마니산의 참성단과 기를 함께하는 원구단 천제터는 1. 여러 사악함을 제거하고, 2. 흐린 물을 맑게 하며, 3. 재앙과 화를 미리 예방하는 천하의 복지요 명당 길지이다. 이를 알고도 칩입하고, 더럽히는 자, 시험해보는 자는 모두 운세가 소진함을 면치 못하리라!

역대에 거행해 온 원구단 천제를 1464년 청나라 천자에게 상납하고 강제 폐지시키면서 국운이 쇠태하여 433년이 지난 후 고종 황제께서 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 독립선언과 황제 직위식을 거행했으나 이번에는 일제와 친일파들이 또다시 일본 천황에게 강제 상납한 뒤 조선은 일본에게 강점당했다. 그뒤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제의 망령을 대신한 삼성재단이 우리 민족의 천손국운(天孫國運)을 차단한채 541년 간을 하늘을 등지고 살아오고 있으니 이러한 민족에게 무슨 하늘의 축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6.25 동란도 민족분단의 비극도 오늘의 혼란도 모두가 다 하늘이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하루 속히 원구단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 경복궁, 청계천 복원 등에 앞서 제일 먼저 원구단 복원부터 했어야 했다. 원구단 복원을 하늘에 고해야 비로소 참다운 광복, 새로운 시대가 와서 만물이 제자리로 돌아가 바로서게 되며, 세계 열강 가운데 우리 한국이 우뚝 솟아올라 세계평화의 중심국이 될 것이다! (천효성가족선교회 박영록 총재)


“원구단(환丘壇) 천제의 유래”
청나라에 빼앗기고 433년, 일제에 빼앗긴지 108년! 원구단 천제의 유래를 살펴보면 한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 온 천손장자민족(天孫長子民族)으로서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 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國泰民安)’ 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인 것입니다.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등으로 이어졌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 983년인 고려 성종 2년 정월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이신 삼신(三神)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 즉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 를 드렸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인 1394년과 세종 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 임금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 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 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대한제국 고종 때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조선팔도에서 가장 명당 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를 세우고 천제 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로써 원구단 지붕은 천지인 삼합일체의 천제의식을 우주의 빛의 상징인 황금으로 장식하여 그 찬란한 빛은 온 천하를 밝혀 전 세계가 우러러 경배하는 인류 최고의 장엄한 제천 성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번엔 또 일제와 그 친일파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천제는 천조대신의 만세일개인 일본 천황만이 지낼 수 있다면서, 또다시 원구단을 헐고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워 강제 폐지 상납하고 오늘까지 일본 천황이 단군 제천권을 대신 행사해 오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역천자 일본을 패망케 하고 순천자 우리 천손민족을 광복케 하였다. 그런데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일본의 역천만행은 고스란히 민족 내부 친일파에게 인계되어 불행히도 오늘 조선호텔이 그 일제 망령을 대신하여 우리 천손민족의 정통국맥을 차단하고 있으니 이 무슨 역사의 희롱인가?

그러므로 일제망령의 본산인 현 조선호텔를 헐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원구단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경세사관에 의한 인류사적 사명을 다할 때 우리 천손장자 민족은 반드시 천,지,인 삼합일치의 크나큰 축복을 영원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효성가족선교회 총재 박영록)


“원구단 제천권을 회복하자”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인류 시원의 정신, 종교, 정치, 문화 종주국을 꽃피웠던 개천개국의 천손 장자 민족입니다. 매년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단군께서 친히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하여 왔는데 이 제천단이 바로 <원구단>인 것입니다. 이 <원구단 천제>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서기 983년인 고려 성종 2년 정월에 황천 상제이신 삼신과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 즉 오방위의 신위를 모시고 왕이 친히 <원구제>를 드렸습니다.

<조선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인 1394년과 세종원년인 1419년에 <원구제>를 올렸고 세조임금 때는 <천제>를 나라의 최대행사로 제도화하여 세조3년인 1457년부터 매년 <원구제>를 올렸으나 천자가 아닌 왕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중국의 압력과 사대주의자들의 강압에 의해 1464년 <원구제>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이로부터 433년이 지난 후 고종 때에 이르러 <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정 심순택의 상소를 가납하여 팔도의 가장 명당명소 길지인 소공동에 <원구단>을 세우고 <천제제천권> 회복과 함께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언하였습니다.

<원구단>의 3동 지붕은 천,지,인 삼합일체의 천제의식을 나타내며 우주의 빛의 상징인 황금으로 장식하여 그 찬란한 빛은 온 천하를 밝혀 전 세계인이 우러러 경배하는 인류 최고의 장엄한 제천성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원구단 천제>는 불행히도 1913년 일제가 또다시 조선의 왕이 천제를 지내는 것은 하늘에 대한 불충이므로 천조대신 후예인 천황이 지내야 한다며 <원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조선호텔 전신인 <철도호텔>을 짓고 그 일부인 <황궁우>만 남겨두었습니다.

일본 천황은 빼앗아간 우리 민족의 단군천제를 108년 동안 거행해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2008년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올리면서 한국이 자신들의 제후국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천제를 지내야 할 우리 민족이 천제 제천권마저 청나라와 일본에 상납하고 541년 동안 하늘을 등지고 살아오고 있으니 이런 못난 민족에게 무슨 하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원구단 천제는 흔히 있는 죽은 신에 대한 천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존재케 하여 준 우주의 근본에 보답하기 위한 경, 천, 순, 조, 애, 인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통치이념을 전세계에 재 구현하고자 함입니다. (원구단 천제 복원회)

 

“태백산 천제단의 유래”
단군이 즉위 원년에 사자를 보내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한단고기) -

태백산 천제단(天祭壇)은 신라 때부터 임금이 직접 제사를 드리던 곳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단군이 즉위 원년에 사자를 보내어 이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는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고 기록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中祀)의 제를 올리던 곳”이라고 전한다. 조선 성종 때의 학자 성현(成俔)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는 “삼도(三道: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천왕당을 지어 단군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철 따라 천제를 모시고자 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앞서 가는 사람의 발 뒤꿈치를 밟을 정도”라고 당시 천제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천제단은 이렇듯 기도 터로서 유서가 깊으며, 겨울철에도 늘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태백산은 무속의 성지로도 불린다.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매일 수십명의 기도자들이 찾아들고 있다. 등산객의 수보다도 이들 기도자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말한다. 태백산 정상 동쪽 아래의 사찰 망경사(望景寺) 요사채는 늘 이들 기도객들로 북적거린다.

태백산 천제는 신라의 통일 이후 맥이 끊어졌다. 중국 천자만이 천제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연호를 광무로 하고 원구단을 쌓은 뒤 천제를 지냈으나 일제 때 다시 폐지됐다. 그렇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사람들은 태백산에 올라 제를 드렸다. 구한말에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백마를 잡아 기도하니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고 전한다. 일제 때는 천평땅에 살던 윤상명, 유형호, 이낙림이 주동이 돼 이곳에서 독립만세 기원제를 지냈다.

을유년 첫날 천제단에 올라온 김규봉(57·서울 도봉구 수유동)씨는 “하늘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새해 첫 일출을 볼 수 있는 희열 때문에 매년 이곳에 오른다”며 “새해에는 한민족이 2000년 전의 모습처럼 통합된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빌었다”고 말했다.

태백산 최고봉 장군봉에 위치한 천제단은 높이 2.5m 정도의 사각형 제단이다. 태백산에는 장군단과 천왕단, 하단 세 개의 제단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장군)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규모가 가장 큰 원형의 천왕단(해발 1561m)은 장군봉에서 300m쯤 더 가야 나온다. 이곳에서 300m 더 가면 작은 사각형의 하단이 있다. 해마다 10월 상순 살아 있는 소를 몰고 올라가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를 ‘태우’라고 했다. 지금은 10월 3일 개천절날 소머리만 놓고 제를 올린다. (2005.01.03 조용호 기자) 

 

 “정부가 개천절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한 이유”

○ 개천절의 뜻: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을 계승하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통일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며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함. 음력 10월 3일 ‘開天’의 뜻. 서력 기원전 2333년(단기 1년)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朝鮮)을 건국하신 날임. 단군의 아버지이신 환웅(桓雄)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큰 뜻을 품고 하늘을 열고 이 땅에 하강하신 날이기도 함.

○ 개천절의 유래:
【고대이후 대한제국까지】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고려 의 ‘팔관회’ 등 민중 제천 축제, 고려 중엽부터 외세 침략으로 개천 의식(儀式)이 약화되었으나 몽고제국(蒙古帝國)의 침략을 받았던 때에는 이 단군고사가 민족의 대동단결 의식(大同團結 意識)을 깨우쳐 국난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새로이 개창(開創) 되자 우리 민족의 단군숭배사상(檀君崇拜思想)은 더욱 고양(高揚) 태종(太宗) 때의 문신 변계량(文臣 卞季良)은 “우리 동방(東方)의 시조 단군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나라를 세운 것이지, 중국의 천자(天子)가 분봉(分封)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중국과 대등한 독립국가임을 천명. 세종(世宗) 때에는 평양에 단군사당(檀君祠堂)을 지었고,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원구단(?丘壇)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냄. 한말(韓末) 열강(列强)의 세력이 몰아치던 시련기(試鍊期)에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내외에 선포하고 원구단(?丘壇)을 설치하여 천제(天祭)를 올림.

【일제시대】1909년에 나철(羅喆)이 대종교(大倧敎)를 일으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일’이라고 명명하고 종교의식 봉행. 1919년 3·1운동 직후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서 개천절을 국경일 (음10.3)로 경축.
【정부수립 이후】1948년에는 개국 기념일로서의 개천절 경축 행사를 음력 10월 3일에 거행.
1949년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에 따라 개천절(양 10.3) 행사 거행.  


“단기 4338주년 개천절 경축식”
- 국무총리의 경축사 전문 -

 

존경하는 7천7백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오늘은 우리의 단군성조께서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의 터전을 세운지 4천3백3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뜻깊은 날을 우리 7천7백만 국내외 동포가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가 시작한 이래 유구한 역사가 흘렀습니다. 단군성조의 뜻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겨레는 많은 나라를 일으키고 세웠지만 한 번도 한겨레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한겨레의 맥을 이어오는 동안 안팎의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굴하지 않았고 강인한 의지로 민족의 역사를 꿋꿋하게 이어왔습니다.

최근 명백한 우리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우리 국민 모두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이며 고구려를 비롯하여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들의 혼은 우리 정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나라라도 이를 왜곡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러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는 지난 9월 28일 출범한 동북아 역사재단을 통해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의 영토와 역사주권을 굳건히 수호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존경하는 국내외 동포 여러분!
우리가 매년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정신을 기리는 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겨레의 역사에 대한 긍지와 함께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되새겨 보려는데 있습니다. 우리 겨레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그 각오를 다시 하는데 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자랑스런 나라를 만들어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중심을 잃고 분열되었을 때 우리는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을 견뎌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역사인식을 왜곡하려는 주변 국가들의 또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난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시행착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힘을 모아가야 할 중요한 때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저력 있는 민족입니다. 그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뚫고 일어나 오늘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만들었습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달성했습니다. 세계 속으로 대한민국은 자랑스럽게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한 단계 더 높이 뛰어올라야 합니다. 더 발전되고 더 살기좋은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앞길에 놓인 어떤 난관도 우리는 현명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북핵문제, 북한 미사일 발사문제 등 남북현안을 대화와 외교적 노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사회양극화의 해소와 경제활성화, 저출산·고령화도 우리의 과제입니다. 저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모든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우리 동포 여러분 속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난 6월에 정부와 사회 각 분야가 모여 이루어낸 ‘저출산·고령화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협약체결’이 통합을 향한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모두가 한마음으로 합리적 장치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가 해내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존경하는 7천7백만 동포 여러분!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어디서든지 강인한 생명력과 꿋꿋한 기상으로 한민족의 얼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몸은 비록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에 살고 있지만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지니고 사시는 6백70만 재외동포들은 민족의 오늘과 내일을 함께 이끌어갈 더없이 소중한 자산입니다.

국내외 동포 여러분,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더욱 번영하여 뻗어나갈 것입니다. 동북아시아를 너머, 세계를 향해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우리 단군의 후손들은 지치지 않고 나아갈 것입니다. 화합과 전진을 위한 그 대열에 함께 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여신지 4천3백38년이 되는 오늘, 이 뜻깊은 민족의 축일을 맞이하여 국내외 동포 여러분 모두의 건승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6. 10. 3  한명숙 국무총리)


“대한민국헌법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1.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 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3.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개천절 노래)

 

 




[사진↑] 중국 북경시에 있는 잘 보존된 중국 천단(天壇)


[사진 ↑] 우리는 유물의 의미도 모른채 조선호텔 뒤편에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있다.

 

□ 내용 구성/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