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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그리운 선조] 1. 신 사임당(申師任堂)

잠용(潛蓉) 2012. 10. 21. 20:30

신 사임당(申師任堂)



(신 사임당 표준영정- 의당 김은호 화백 그림)

 

[효심 깃든 두 편의 시] 

신 사임당(申師任堂)은 자녀들에게 항상 효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했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가깝고 쉬운 것부터 멀고 높은 것에 이르도록 했다고 하는데,
“부모의 은혜를 중하게 여기고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여라.”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데서 가정의 화목과 평화가 있다.”
효녀로서 사임당은 한시 ‘사친 思親’에서도 그녀의 지극한 효성이 절절이 베어나고 있지만, 7남매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효경 孝經>의 공부를 학문에 들어가는 길로 삼고, 어버이 섬기는 참된 마음으로 더 나아가 하늘을 섬길 것을 가르쳤다.

사임당은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널리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매우 뛰어났으나, 그녀가 후세에 남긴 작품은 위의 ‘사친’등 오직 두 편의 시문(詩文)과 한 편의 낙귀(落句)가 전부였다. 두 편의 시는 사임당이 6살 된 율곡을 데리고 강릉 친정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대관령을 넘으며 지은 시, 또 한 편은 서울에서 지었는데 강릉에 홀로 계신 친정 어머님을 그리며 지은 눈물겨운 시편으로 모두 부모에 대한 애절한 효심을 느낄 수 있다.

(1)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踰大關嶺望親庭)

머리 흰 어머님을 강릉에 남겨두고
(慈親鶴髮 在臨瀛: 자친학발 재임영)
몸은 서울 향해 홀로 가는 이 심정
(身向長安 獨去情: 신향장안 독거정)
고개 돌려 멀리 북촌을 바라보니
(回首北邨 時一望: 회수북촌 시일망)
흰 구름 뜬 하늘 아래 저녁산만 푸르네.
(白雲飛下 暮山靑: 백운비하 모산청)
(사진: 대관령 고갯길에서 바라본 강릉쪽 저녁 풍경)

(2) “어머님을 생각하며”
(思親)

산 첩첩 고향길 천리련마는
(千里家山 萬疊峰: 천리가산 만첩봉)
가고픈 마음은 언제나 꿈 속에 있네
(歸心長在 夢魂中: 귀심장재 몽혼중)
한송정(寒松亭) 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 孤輪月: 한송정반 고륜월)
경포대(鏡浦臺) 앞에는 한 줄기 바람
(鏡浦臺前 一陣風: 경포대전 일진풍)

 

모래톱에 갈매기떼 모였다 흩어지고
(沙上白鷗 恒聚散: 사상백구 항취산)
바다 위로 고깃배는 오고 가련만
(海門漁艇 任西東: 해문어정 임서동)
그 언제 강릉길 다시 밟아서
(何時重踏 臨瀛路: 하시중답 임영로)
색동옷 입고 어머님 앞에 바느질 할고
(更着斑衣 膝下縫: 갱착반의 슬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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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山: 고향산천, 고향
*膝下: 무릎 아래, 부모님 앞에
(사진: 강릉 바닷가에 날으는 갈매기떼)

[사임당의 생애]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딸만 다섯을 둔 평산신씨(平山申氏) 집안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이 ‘인선(仁善)’이라 불렀는데,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이고,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이사온(李思溫)의 외동딸이었다. 19세 때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는데, 세째 아들이 바로율곡 이이(李珥)다.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올바른 가르침과 사랑으로 키웠는데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엄격한 훈육을 병행하였다. 그 결과 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그대로 이어받은 7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인격과 학식이 뛰어나 율곡(栗谷)과 매창(梅窓) 등이 명사가 되었다.

 

사임당(師任堂)이라는 당호(堂號: 벼슬 받은 여성에게 붙이는 호)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으려는 뜻인데 사임당이 태임을 자기 인생에 있어 사표로상각하고 마음 속에 새겨본받으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촌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이 13세때인 1516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그래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참화를 면하였다.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강릉보다 늘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사진:위- 강릉 오죽헌- 사임당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강릉시 북촌에 있다. 아래-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

 

사임당의 외조부 사온공 역시 슬하에 딸 하나만 두어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잡이로여겨, 출가한 후에도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어릴 때부터 강릉 북촌에 있는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외조부와 어머니에게 여자로서의 예의범절과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모로 자라났던 것이다.아버지는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잠시 만날 수 있었다. 1522년 19세 때 덕수이씨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했으나,그해 겨울 친정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사임당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집에서 아들잡이 노릇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해서 바로 서울 시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대로 친정 아버지 3년상을 마칠 때까지머물렀다. 서울 시댁에 올라와 구고례(舅姑禮: 오늘날 폐백)를 드린 것은 결혼뒤 3년이 지난1525년 22세 때였다.

 

(1920년대 김경수가 그린 강릉 오죽헌 전경)

 

[사임당 행장] (아들 율곡 이이가 그의 문집에 적은 글)

자당(慈堂)의 휘(諱)는 아무개(某)인데 진사인 신공(申公:申思溫公)의 둘째 따님이시다. 어릴 때 벌써 경전(經典)에 통달하였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글 쓰기를 좋아하셨다. 그리고 바느질을 잘 하여 자수(刺繡)하는 일까지 정교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게다가 천성이 온화하고 지조 있고 정숙하였으며, 행동은 늘 안정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자세하였으며, 말수도 적었다. 또한 스스로 늘 겸손한 태도를 가지니 외할아버지 신공께서 몹시 사랑하고 중히 여기셨다. 어머니는 효성이 지극하여 외조부모가 병환이 나면 얼굴에 늘 걱정하는 빛이 있다가 병환이 나아야 얼굴빛이 다시 밝아지셨다. 뒷날 아버님께 시집가게 되자 진사공(외조부)께서 우리 아버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진: 신사임당 그림 초충도)

“내가 딸이 많아 다른 딸들은 시집을 가도 그리 서운치 않더니 자네 처만큼은 실로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네.” 어머니가 혼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사공(외조부)께서 돌아가시니, 어머니는 삼년상을 끝낸 뒤에 서울로 올라와 시어머니 홍씨(洪氏)를 신부의 예로써 뵈었다. 어머니는 모든 일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경솔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집안의 여자 친척분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웃고 잡담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시어머니께서 이르기를 “새아기는 왜 말이 없느냐?” 하였다. 어머니는 꿇어앉아 이르기를,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문밖에 나가 보지 않아서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릅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좌중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겸연쩍게 여겼다. 뒷날 어머니는 임영(臨瀛: 강릉의 옛이름)에 돌아가 친정 어머니를 뵙고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한 뒤에, 대관령에 올라와서 친정 마을인 북평(北坪)을 돌아보며 애틋한 감정을 못 이겨 가마를 멈추게 하시고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이르되,

“머리 흰 어머님을 강릉에 남겨두고 (慈親鶴髮 在臨瀛: 자친학발 재임영)
몸은 서울 향해 홀로 가는 이 심정 (身向長安 獨去情: 신향장안 독거정)
고개 돌려 멀리 북촌을 바라보니 (回首北邨 時一望: 회수북촌 시일망)
흰구름 뜬 하늘 아래 저녁산만 푸르네.(白雲飛下 暮山靑: 백운비하 모산청)”

 

서울로 돌아온 뒤에 수진방(壽進坊: 현재 종로구 수송동과 청진동 일대)에서 살았는데 당시 할머니 홍씨가 연로하셔서 집안일을 돌볼 수 없었으므로, 어머니가 맏며느리로서 도리에 따라 집안을 다스려 나갔다. 아버님께서는 성품이 조그마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활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으니,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산을 절약하여 능히 자족하였고, 어른을 공양하고 손아랫 사람을 보살피는 데 있어서도 모든 일을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할머니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 행했으며, 여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계집이니 첩이니 하는 말로 부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항상, 말은 온화하였고 얼굴빛은 부드러웠으며, 아버님께서 혹시 실수를 하면 반드시 간곡하게 권유하여 고치게 하였으며, 자녀들의 잘못은 엄히 경계하여 타일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준엄하게 나무라니, 그들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어머니의 환심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평소에도 어머니는 친정인 강릉을 그리워하여 고요하고 깊은 밤이면 혼자 앉아서 눈물로 날을 새는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친척 어른인 심공(沈公)의 몸종이 와서 거문고를 탄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시며 “거문고 소리가 마음 속에 그리워하는 사람을 더욱 그립게 한다.”고 하니, 주위에 둘러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어머니는 일찍이 친정 어머니(외조모님)를 생각하는 시를 썼는데 다음과 같다. (낙귀 落句: 일부만 남은 글)

 

“밤마다 달을 향해 기도드리니 (夜夜 祈向月: 야야기향월)
생전에 어머님 한번 더 뵙게 하소서” (願得 見生前: 원득견생전)

 

이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효심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었다.어머니는 홍치 갑자년(1504년, 연산 10년) 겨울인 10월 29일에 강릉에서 태어나서, 가정 5년(1522년, 중종 17년)에 아버님에게 시집오시고, 3년 뒤인 을유년(1525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로 때로는 강릉에 살았고 때로는 북평에 살았으며 신축년(1541년)에 서울로 돌아왔다. 경술년(1550, 명종 5년)에 아버님께서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시고, 다음 해인 신해년 봄에 삼청동으로 집을 옮겼다. 그해 여름에 아버님께서는 물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가지고 관서(關西) 지방으로 갔는데, 아들인 선(璿)과 나 이(珥)가 따라 갔었다. 이때 어머니는 아버님이 계신 객관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으나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 해 5월에 운반하는 일을 끝내고 아버님께서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는데,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환이 들었다. 어머니는 병환이 난지 이삼일이 지나자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아무래도 못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에 평상시와 같이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자식들이 문안을 하러 가니 이미 돌아가셨다. 그 날이 곧 1551년(신해년) 5월 17일 새벽의 일로서 향년 48세였다. 이 날 아버지와 나는 서강(西江)에 있었는데 우리가 가지고 온 행장 중에 놋그릇이 모두 빨갛게 녹이 나 있었다. 모두들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조금 있자니 어머니의 부음(訃音)이 도착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소에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 7세 때 벌써 안견(安堅)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도(山水圖)를 그렸다. 특히 포도그림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린 병풍이나 족자는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 율곡전서) (사진: 신사임당 부부의 묘비)

[사임당 연보]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10월 29일 출생. 강릉 북평촌(현재 강릉시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에서 평산신씨 신명화(申命和)공의 5녀중 2녀로 태어나다.
-1510년(중종 5년). 7세. 어려서는 외조부 용인이씨(龍仁李氏) 사온(思溫)의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 경전에 통달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1516년(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중종 17년). 19세.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공에게 출가하다. 출가 후 얼마되지 않아 그해 11월 친정 부친 신명화공께서 별세하다.
-1524년(중종 19년). 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璇)이 태어나다.
-1529년(중종 24년). 26세. 맏딸 매창(梅窓)이 태어나다.
-1536년(중종 31년). 33세. 이른 봄 밤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다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다.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율곡선생이다.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1541년(중종 36년). 38세. 강릉 친정에서 친정 어머니를 하직하고 서울로 돌아가며 대관령에서 시를 읊다. 서울 수진방에서 시집의 모든 살림을 주관하다. 네째 아들 우(瑀)가 태어나다. 서울에 살며 홀로 강릉에 계신 친정 어머니를 그리며 시를 읊다.
-1550년(명종 5년). 47세. 여름에 부군 이원수공이 수운 판관이 되다.
-1551년(명종 6년). 48세. 5월 17일 새벽, 병상에 누우신지 불과 2,3일 만에 홀연히 별세하다. 세곡을 운반하는 일로 평안도에 갔던 부군과 두 아들은 그날 서강에 도착하여 부인이 별세한 소식을 듣다. 서울 북쪽 파주 두문리 자운산(紫雲山)에 장사 지내다. (율곡전서)

[사임당과 율곡 이이]
율곡 이이(李珥)는 1536년(중종 31)에 나서 1584년(선조 17년) 49세에 죽었다. 어머니가 48세, 율곡은 49세로 두분 모두 겨우 불혹(不惑)을 넘겨 단명하였다. 아명은 사임당이 꿈에 용을 보고 태어났다 해서 현룡(見龍)이라 불렀다. 자는 숙헌(叔獻), 호가 율곡(栗谷)이다. 강릉에서 출생했고, 어머니가 바로 겨레의 스승 신사임당이시다.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명종 3년에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6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심취하였다. 1564년(명종 19년, 29세)에 생원시와 식년 문과에 모두 장원 급제, 아홉 번 장원했다고 하여 구도 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었다. 1568년(선조 1년)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82년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 역임하였다. 동서분당의 당쟁을 조정하는 데 힘쓰다가 1583년 동인들로부터 당쟁을 조장한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하기도 했다. 이황(李滉)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쌍벽을 이룬다.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일찌기 <경행록(景行錄)>에 이르기를, “보화(寶貨)는 쓰다보면 끝이 있으나, 충과 효는 아무리 향유해도 다함이 없다.” (景行錄云 寶貨 用之有盡 忠孝 享之無窮)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집안이 화목하면 가난해도 좋은 것이요, 의롭지 않다면 부자인들 무엇하랴. 단지 한 명일지라도 효도하는 자식이 있으면 되었지, 자손만 많아서 무슨 소용 있는가.” (又云, 家和貧也好 不義富如何 但存一子孝 何用子孫多)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버지가 근심이 없는 것은 자식이 효도하기 때문이요, 남편이 걱정이 없는 것은 그 아내가 어질기 때문이다.” (又云, 父不憂心因子孝 夫無煩惱是妻賢)고도 하였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까닭은 자신의 몸과 생명을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며,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키워준 그 은혜에 대한 보답(報答)이며, 이는 또다시 먼 조상까지 이어져 만물을 낳은 천지(天地)를 섬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율곡이 42세 때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에 이르기를, “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 이라고 했다. 이 말은 “부모님을 하루 봉양하는 기쁨은 세 정승의 부귀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아무리 큰 부귀영화를 준다해도, 그보다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래오래 함께 사는 즐거움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율곡역시 효심 깊은 사임당의훈도에 따라 일찍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참조: http://www.gahoon.com/)(사진: 자운서원(紫雲書院)-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신사임당 부부와 율곡의 신위를 모심)


(음악: ‘동심초’- 진하모니 합창단)


(동심초 - 안산시립합창단)


(사임당 관련자료)
☞ 매화향 가득한 봄날의 오죽헌을 거닐다
☞ 오죽헌 소장 유물전

 

□ 내용구성, 한시번역/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