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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그리운 선조] 2.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잠용(潛蓉) 2012. 10. 21. 20:33

[그리운 선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 어지러운 한말을 보다 못해 7순의 고령을 무릅쓰고 나라 위해 싸우시다
왜국 대마도까지 끌려가서 저들이 준 음식은 끝까지 먹지 않고
외롭게 순국하신 지 어언 한 세기가 지났다 -

 

□ 이 영정은 1905년 3월 정산현감 채용신(蔡龍臣)이 그렸는데, 1986년 정부에서 선현표준영정(先賢標 準影幀)으로 지정하였다. 영정에는 ‘有明朝鮮國 勉菴崔先生 七十三歲像’이라고 씌어 있다. 크기는 63 x 136 cm, 지정번호 34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영정의 모사본이 1989에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 이종상 화백에 의해 제작되어 면암영당에 안치되어 있다. 크기는 140 x 227cm이다.  


 

올해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이 일제에 저항하다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으로 끝내 생을 마친지 꼭 103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말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나 치열한 외세의 강압으로 쓸어져 가는 국운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고군분투(孤軍奮鬪) 이를 지키기 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신 위대한 선조 최익현 선생. 오늘의 암담한 우리 현실을 굽어보시고 우리에게 하실 말씀은 진정 무엇일까?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일생]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면암(勉菴)이다. 1833년(순조 33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嘉채里)에서 태어났다. 골격이 비범하고(骨格 非凡), 안채가 별처럼 빛나(眼彩 如星) 아명을 기남(奇男)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관상쟁이가 보고 장차 귀하게 될 상(相)이라고 하였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천성인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不義)와 부정(不正)을 척결하며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을 중지할 것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대원군의 실정을 극력으로 상소하여 마침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1873년 다시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대원군 세력과 제휴하여,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실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또다시 대원군의 실책을 낱낱이 열거하며 금상의 친정과, 대원군의 퇴거를 노골적으로 주창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층과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1875년에 곧 풀려났다.

[오른쪽] 선생이 돌아가시기 1년전 1905년에 어전화가가 직접 선생을 찾아가서 그린 초상화이다. 당시 서양화풍의 수용에 따라 명암법의 구사가 인물의 얼굴 묘사는 물론 옷주름의 처리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1941)의 작이다. (견본채색, 크기 51.5 x 41.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吾頭可斷 此髮不可斷]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개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부모님이 준 머리털은 자를 수 없습니다(吾頭可斷 此髮不可斷)”고 하여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 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 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0년(68세) 선생은 거처를 충남 청양군 목면 장구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1904년 고종은 다시 그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나라 일이 어지러움에 경과 같은 충직스러운 신하가 아쉬우며 그 높은 덕을 사모하노라” 고 하는 글을 받고 상경하여 고종의 정치적 자문에 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계속하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거듭 펼치었으나 1905년에는 마침내 일제와 침략조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되자 일본의 죄목 16개조를 나열한 격문을 작성하여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뜻을 이루지 못한채 마침내 의병대열에 나가게 되었다. 선생은 이때 이미 고희(古稀)를 넘겨 백발 노인이 되었지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전국 방방곡곡에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던 것이다.

선생은 흥주 의병 투쟁을 지도한 이후, 1906년 4월에 전북 태인의 의병 투쟁의 깃발을 드날리게 된 것이다. 선생은 문하인 최제학(崔濟學)을 임병찬(林炳瓚, 1851-1916, 평택임씨. 낙안군수로 의병장이 되었고, 1905년 대마도에 유배되어 끝까지 면암선생을 보좌함)에게 보내 거병 준비를 하게 한 다음, 태인 무성서원에 문생 80여명을 모아 놓고, 국권 회복의 기개를 호소하였으니, 이르되 “국가가 위급존망의 지경에 있으니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의(義)로운 본분”임을 강조하였다. 그 문하생이 모두 따르게 되어 그 내용을 전국각지에 보내고 적과 싸울 무기를 준비케 하니 순식간에 의병 1천여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곡성 순창 등지에 모인 의병부대를 공격해 오는 관군에게 대하여 선생은 “나는 동족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너희들은 즉시 해산하라”고 하였다. 선생은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의병의 기치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유생들은 선생과 함께 그 자리를 함께 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선생은 마침내 관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임병찬과 함께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었다.

대마도에는 이미 흥주 의병진의 지사들이 구금되어 가혹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유소(遺疏)를 임병찬(林炳瓚)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당시 대마도 수비대장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선생을 회유 핍박하고 선생의 의기와 항일 투쟁의 정신을 꺾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그 기개는 그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선생의 의연한 기품에 감동하였다. 선생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일체 거절하고, 본국에서 보내오는 약간의 음식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대마도 감옥에서 한 많은 생애, 아니 대의(大義)에 찬 찬란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삶은 중국의 백이(伯夷) 숙제(叔齊)나, 송(宋)나라 문천상(文天祥)의 충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치열한 정신은 이후의 수많은 의병 투쟁의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유해는 1906년 11월 대마도에서 환국하여 충남 예산에 입장(入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전국 유림들이 매년 추모제향을 지내오고 있으며, 1909년 선생의 충혼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남 홍성에 모덕사(慕德祠)를 건립하였다.

선생의 고매한 정신은 경향 각지의 우국지사들이 흠모를 아끼지 않았으니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일제에 의해 옥에 수감되었을 때, 면암 선생의 순국 소식을 듣고는 "백이 숙제보다 더한 만고 제일의 인물이다"라는 평을 하였으며,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순국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었다.

“호곡소리 서로 이어 3백군에 굽이굽이,
임의 혼 실은 외로운 배 나라정기 가득하네,
유림도 재상도 모두 하나 5천년을 결국(結局)하니,
해동 천년 청사(靑史)에 임의 말씀 영원하리.”


선생의 우국충정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쳤고, 그 기개는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에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선생은 유림의 거목으로서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나라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우국충정을 구현하였고, 의병의 기개로서 이 나라를 구하려는 커다란 발자욱을 겨레에 남기었던 것이다. 인(仁)과 의(義)를 몸으로 실천한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독립운동관 교육과장 김광석)

[우국충정으로쓴 상소문]

선생은 국운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한말(韓末)에 태어나 당시 경향(京鄕) 각지 선비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던 대원군(大院君)의 실책을 탄핵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애썼으며, 일생을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을 지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고, 항일 구국 항쟁의 최선봉에 나섰던 한말 최대의 거유(巨儒)였다.

1866년(36세) 대원군의 실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1868년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73년 대원군이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을 철폐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계유상소(癸酉上疏)》로 대원군 집권을 무너뜨리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민씨 일족의 옹폐(壅蔽)를 비난하는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렸으나 그 내용이 과격·방자하다 하여 3년간 제주로 유배되었다.

1876년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 상소는 불법적·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침략적 조약, 수탈적 조약, 윤리배반의 조약, 인권말살의 조약, 일제의 주권 확장 및 신장을 꾀하는 조약이라는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일제 배격과 자주 자강을 위한 우구충정의 간절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의 정세는 더욱 국권 상실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또다시 1898년 국권회복과 외세배격을 위한 ‘시무12진소(時務十二陳疎)’를 올려 그의 간곡한 충정을 조정에 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성상(聖上)의 학문을 보도(輔導)하소서.
2. 음식을 삼가하시어 성체(聖體)를 보호하소서.
3. 사시(私侍: 사사로이 군왕을 알현)를 폐지하여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소서.
4.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 상심(詳審)하여 조정을 바로 잡으소서.
5. 백관(百官)을 통독하여 실무(實務)에 힘쓰도록 하소서.
6. 법률(法律)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우소서.
7. 민당(民黨)을 혁파하여 변란(變亂)의 계제(階梯)를 미리 막으소서.
8. 기복(起復: 부모 상중에 관리로 기용)을 금지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소서.
9. 용비(用費)를 절약하며 국비의 군급(窘急)을 면하게 하소서.
10. 군법을 엄하게 하여 무비(武備)를 닦으소서.
11. 역적(逆賊)을 쳐서 대의(大義)를 밝히소서.
12. 화이(華夷)의 구별을 엄하게 하여 대방(大防)을 세우소서. (1898年 10月 9日 辭議政府贊政 再疏)

이 상소는 당시 고종이 그에게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관직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이를 거절하면서 선생의 충정을 밝힌 것이었다.

[국치의 “을사조약”에 격분]

1905년(광무 9년) 11월 17일 일본이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제2차 한일 협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해 11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일본왕의 위협적인 친서(親書)와 함께 전달된 이 협약안이 정부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치자, 17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한일협약의 체결을 꾀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되었다.

무장한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궁궐 안까지 거리낌없이 드나드는 살벌한 분위기 아래서 열린 어전회의는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토는 헌병 호위를 받으며 회의를 다시 열어 대신 한사람 한사람에게 가부결정을 강요하였다. 이토는 찬성을 표시한 대신들을 따로 모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가 서명 조인(署名調印)함으로써 모든 절차를 끝냈다. 치욕스런 을사조약의 내용은 이러하다.

1조 일본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경유하여 앞으로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그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국민과 그 이익을 보호할 것이다.
2조 일본정부는 한국과 타국과의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를 서로 약조한다.
3조 일본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고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에게 알현(謁現)하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의 사무를 관장할 것이다.
4조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계속한다.
5조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한다.


이후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권 박탈은 물론 내정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국내의 외국 공사관과 해외의 우리 나라 공사관이 패쇄되었다. 을사조약의 진상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일제히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창하는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항일의병의 정신적 지주]

면암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처단을 주장하고, 1906년 윤 4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궐기하여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우리 민족이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는 오직 궐기와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고 하여 전 국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국가 패망의 때를 당하여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결심하고 의기(義旗)를 높이 들어 싸우고자 한다."는 거의소(擧義疏)를 채택했다.

"皓首奮견(田+犬)畝 (호수분견묘: 백발이 다 되어 농사에 힘쓰는 것은)
草野願忠心 (초야원충심: 초야에 묻혀 있서도 충심을 바치기 원함일세)
亂賊人皆討 (난적인개토: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할 일)
何須問古今 (하수문고금: 고금이라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요)"


황량한 들판에서 독립의 기개를 포효하고, 이국땅 일본 대마도에서 우국충정의 진수를 구현하다 비참히 일생을 마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 의병의 가치를 드높이며 나라사랑 충정을 계레의 가슴에 전해 준 그 말씀이 지금도 쟁쟁히 들려오고 있다.

이 시는 당시 면암이 지은 시(詩)로서 구절마다 애국충정의 염이 가득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예를 따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선비 정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항일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의 체험을 담은 여러 갈래의 의병 문학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 한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의병장의 한시는 한문학의 고답적(高踏的)인 인습적 표현을 버리고 역사적 삶의 경험과 투쟁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특징이 있다. 오언 절구의 한시에는 장쾌한 선비 정신이 드러나 있으며,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 취지가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초야에 묻혀 있는 늙은이지만 늘 충성을 잊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그러기에 당연히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나서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명 (表明)하고 있다.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 1905년 음11월 21일(73세)
“아, 슬프다! 오늘의 국사를 차마 어찌 말하랴. 옛날 망국에 종사만이 무너지더니. 오늘의 망국에는 인종마저 함께 무너지는구나. 우리 삼천만 인민이 이제 모두 노예가 되니 남의 노예가 되어 살기란 곧 죽음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당당한 이 대한자주지민이 구차하게 고개숙여 저 원수 밑에서 하루의 삶을 구한다면 어찌 죽음보다 나으랴. 우리나라는 토지도 인민도 정치도 모두 우리의 자립이요. 자주였다. (중략)

대개 사람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게 되면 기력이 스스로 떨치고 의지가 굳어지고 애국심이 스스로 솟아나고 합심의 공이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니 이제부터 우리는 의존하는 마음을 뽑아 없애고, 위축하는 습성을 떨쳐버리며, 고식 주저하는 고질도 바꿔 없애고, 열걸음 나아가되 한치도 물러서지 말고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홀로는 살려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의 마음이 큰 하나로 뭉쳐져 하늘도 반드시 우리를 도우리라. 이 익현은 충성을 다해 나라의 환난을 미리 막지 못하고 또 몸을 던져 순국함으로써 민기를 복돋우지도 못하였으니 너무 부끄러워 살면서 수천만 동포를 대할 수 없다. (중략)
이에 감히 포고로써 호소하노니 나라안 온 동포들이여! 바라건대 이를 죽어가는 한낱 늙은이의 말이라 흘려버리지 말고, 부디 우리 모두 스스로 힘내고 굳게 다져서 우리의 인종마져 바꾸려는 저들의 악랄한 간계를 끝내 막아낼 지어다.”

“격문(檄文)”- 1906년 음2월 21일(74세)
[전문] “과거의 역적 중 오늘의 5적보다 더한 역적은 없었고, 왜놈은 과거에도 남을 많이 유린하였지만 오늘의 왜놈보다 더한 왜놈은 없었다. 우리나라는 도를 존중하는 문명국이다. 임진왜란 때 만행을 저지른 왜놈들이 다시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침략의 괴수들과 매수 두목을 처단해야 할 것이다. 내 노병의 몸임을 무릅쓰고 창의하는 터이니 종실, 대신. 관찰사. 수령. 선비. 농부. 공장. 상인. 서리. 승려할 것 없이 모두 궐기하라.”

[본문] “역적 변란이 어느 세대에 없었으리오만, 어찌 오늘날의 역적 변란과 같았으며 되놈 침략이 어느나라에나 있었던 일이지만, 어찌 오늘날의 왜놈들과 같았겠는가? 이제와서 의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나라 대한은, 기자(箕子)의 옛 강토요, 요순시대의 동쪽 방어선으로서 태조대왕 이래로 여러 성인들이 대대로 계승하여 공자의 도를 숭상하고 여러 어진 사람이 차례로 일어나서 교화를 받들어 행하여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인륜이 밝게 피어나고 윗사람들을 높일줄 알고, 어른을 존경하여 질서가 정연하였도다.

집집마다 효제를 숭상하고 사람마다 신의를 지켰도다. 공을 위하여는 사를 돌보지 않았고, 국난을 당하여서도 생명을 바쳤도다. 민족이 너그러워 3대 융성이 부끄럽지 아니하고 문물이 조화되어 오랫동안 소중화(小中和)라고 일컬었도다.
한번 사교가 들어온 뒤로 드디어 사해에 버린 티끌이 가득하나 홀로 우리나라가 한 조각 맑은 땅을 보전하여 큰 과일이 먹히지 않고, 명춘을 기다림 같더니 누가 알았으랴! 소위의 무리, 국가다난한 틈을 타서 왜적과 결탁하여 온갖 재변(災變)을 빚어낼 줄이야!


아! 슬프다 우리 민족의 백대 원수라, 임진 침공 때에 이능흉변(二陵凶變)을 차마 말할 것이며, 병자화약은 한갖 침략의 계제를 만들었도다.
맹서한 피가 마르지도 아니하여 협박과 약탈이 겹쳐 이르러 우리의 궁금(宮禁)을 짓밟고, 역적을 감싸고,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의관을 찢고, 국모를 죽이고, 임금을 늑삭(勒削)하고, 대관을 노예로 삼고,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토지를 강점하여 우리 백성의 명이 달린 물건치고 무엇하나 왜놈들의 손아귀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가? 이렇게 하고도 부족하여 갈수록 탐욕을 더하고 있도다.

슬프다! 지난해 10월에 생긴 일은 우리 민족사상 처음 있는 하루밤 사이에 종이조각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하여 오백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천지 귀신이 놀라고, 조종혼령이 상통하리로다. 자청하여 자기 나라를 원수에게 바친 역적 이 완용의 무리는 우리 민족 누구나가 이를 갈 원수이며, 제나라 임금을 죽이고 남의 나라 임금까지 범하는 왜적 이등박문은 열방(列邦)이 기어코 공동으로 죽여야 할 죄인이라.

수실(秀實)의 홀(笏)이 마땅히 주비(朱비)의 낯을 칠 것이며, 고경의 옷이 어찌 녹산의 준 것을 영광으로 여기겠는가? 변괴를 당한지가 이미 여러 달이건만 주토(誅討)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도 없는가, 임금이 망하고 신하가 어찌 홀로 남으며,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하겠는가?
슬프다! 불타는 집 들보 위에 노는 제비들이요, 끓는 가마솥에서 뛰는 물고기와 같도다. 기히 죽기는 한가지라 어찌하여 한번 싸워 보지도 않으리요, 또 살아서 원수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 충의지혼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익현이 비록 나이 다 되고 병이 깊으며 재주가 가늘고 힘이 약하여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놈들에게 포로가 되어 불행히 죽지 아니하고 목숨이 오히려 남아 복수할 뜻을 잊기 어려워 감히 생명을 떼어놓고 백성의 앞장을 서고자 하노니, 비록 큰 집이 기울어 질 때 한 개의 나무로 지탱하기 어려우며, 맹진(孟津)의 뚝이 무너질 때에 한줌 흙으로 막기 어려우나 저자에 들어가서 외치며 반드시 우단하고, 왕손을 따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행하여 치면 누가 적의를 항거할 사람이 있으리오. 삼천만 백성이 죽음의 구덩이에 함께 빠졌으니, 반드시 살길을 찾아 우리에 호응하여 분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며, 세계열강도 또한 왜놈으로 하여금 천하에 횡행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니 어찌 우리 형세가 약하다고만 한탄하리오.

무릇, 우리 종실대신, 공경문무, 사농공고, 이서여대는 마음과 힘을 합하고, 병기를 날카롭게 하여 역적을 쳐 죽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자리를 만들며, 원수 왜놈을 때려 부시어 소혈(巢穴)을 무찔러 종자를 끊을 것이다. 천운이란 갔다가 안돌아 오는 법이 없나니, 최후 승리는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믿는 바는 정의다! 강적을 두려워 하지 말라! 감히 격문을 돌리노니 서로 격려하며 힘을 합하라!”

“기일본정부서(寄日本政府書)”- 1906년 4월 (74세, 일본정부에 부치는 글)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신(信)을 시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이 이 성이 없으면 반듯이 죽는 법이요.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망하는 법이다. 이것은 완고한 늙은 서생의 묵은 말이 아니고, 개화문명을 자랑하는 열국들이라도 이것 없이는 세계에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귀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흉포는 날과 달로 심하여 신의를 배반하는 행동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에 몇가지 일들을 들어 신의를 배반한 죄들을 일일이 천명하노라.

1.갑신년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난에 우리 황상을 위협하여 옮기고 대신들을 죽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
2.갑오년 대조규개 난에 우리 궁궐을 불지르고 빼앗고, 전장문물(典章文物)을 해친 강도행위를 마구 저질러 신위를 배반한 죄.
3.을미년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 난에 우리 국모를 시해한 죄.
4.임권조와 장곡천 호도가 각처 철도부설을 우리 정부에 통지도 없이 추진하였고 어장, 삼포, 광산, 항만등 일국재원을 모조리 빼앗은 죄.
5.군사상 필요하다고 하면서 토지를 강점하고 백성을 학대하며 분묘를 파고 가옥을 헐었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
6.철도와 토지와 군법을 전쟁시에는 군사상 필요하다고 해서 강점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의구 강점한 죄.
7.역적 이지용(李趾鎔)을 구실러 강제로 의정서를 만들어 우리 국권을 쇠약하게 한 죄.
8.우리나라 관리와 유림들이 올린 소는 우리 나라에 충성을 바침이어늘 함부로 체포, 구류하여 병들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놓아주지 않으니 이것은 충언을 억제하고 공론을 막아 우리 국세가 혹 진흥될 것을 두려워 함이라 신의를 배반한 죄.
9.우리나라 역적과 도적의 무리를 유인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침략의 앞잡이로 삼고 또 선언서를 만들게 하여 민론이라 일컬으면서 참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보안회와 유약소 같은 것은 치안 방해라고 하여 백방으로 저해하며 심지어 체포 강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
10.인부를 강제 모집하여 소를 부리듯 혹사하다가 조금이라도 뜻이 맞이 않으면, 죽이기를 풀치듯 하고 또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묵서가(멕시코)에 속여 팔아 부자, 형제로 하여금 원통한 마음을 품게 하고, 학대를 받아 죽을 지경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게 한 죄.
11.전신(電信)과 우체(郵遞)를 강탈하여 스스로 통신기관을 장악한 죄.
12.강제로 고문관을 각부에 배치하여 군대와 경찰관의 봉급을 감액하면서도 세금을 횡취하여 후보을 먹게 해 가며서 우리나라를 망칠 일만 하게 한 죄.
13.강제로 차관을 두번, 세번 거듭하게 하여 이름을 재정정리라고 하면서 신화의 색질이나, 경중이 구화와 다름 없는 것을 액수만 배로 하여 스스로 후리를 편취하여 우리 나라 재물을 고갈케 하고, 또 통행 못할 종이 조각을 원위화(元位貨)라 하고, 또 빈 말로 차관해 준다 하고 미리 이자를 수취하면 빈 말로 고빙(雇聘)해 준다 하고 미리 후봉(厚俸)을 먹게 하여 우리의 정혈을 빨아 썩은 껍질만 남게 하려 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
14.작년 10월 21일 밤에 이등박문, 임권조, 장곡천호도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궐내에 들어가서 안팎을 에워싸고 정부를 위협하여 강제로 조약을 맺을 때 스스로 가부를 결정하여 도장을 뺏아 마음대로 외교권을 옮겨 통감부에 예속시켜 우리의 자주독립권을 일조에 잃게 하여 놓고 오히려 위협한 사실을 은폐하여 만국의 이목을 가리고자 한 죄.
15.처음에는 다만 외교를 감독한다 해놓고 필경에는 행정·사법의 전권을 장악하여 수많은 일본인을 투입하여 우리로 하여금 손하나 까딱 못하게 하고 자칫하면 공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
16.근자에는 또 이민조례를 조작하여 강제로 우리 정부의 인가를 요청하는 것은 현저히 인종을 바꾸는 독한 꾀로서 우리 민족의 씨를 이 땅에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신의를 배반한 천지에도 용납하지 못할 극악 대죄이니라.


슬프다! 귀국의 신의를 배반한 죄가 어찌 이에 끝이리요! 이것들은 특히 그 죄들의 대략만 든 것이다. 그러나, 이상 몇 가지 일로서 강화, 마관등조약 및 열국에 대하여 전쟁원인을 설명한 여러 문서와 비교하며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와 속이고 간사한 수단이 과연 어떻다고 할 것인가!(중략)

교만한 탐욕은 흥에서 망으로 옮기는 계단이다. 자고로 남의 나라와 민족을 함부로 침략하고 능욕하다가 끝내 환란을 당하지 않은 예를 보지 못하였다. 천리를 말하더라도 복선 화음은 불역의 정론일 것이다. 귀국이 앞으로 동양의 패권을 잡으려면 먼저 신의를 지켜라!(중략)
이 글은 한갓 우리 나라만 위함이 아니요, 귀국을 위함도 될 것이며, 나아가서 동양 전국을 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올리지 못한 “유소(遺疏)”- (74세, 1906년 11월 대마도에서 마지막으로쓴 마지막 유소)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되었다고 속단하지 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없이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시고,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요, (중략) 신이 죽는 마당에 이르러 정신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속단하지 마시고 더욱 보중하시기를 지하에서 손꼽아 고대하겠습니다.”

이와같이 선생은 온 나라에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炳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일제는 끝내 굽힐 줄 모르는 면암의 충절을 두려워 한 나머지 대마도 위수영(衛戍營)으로 귀양보내 단발(斷髮)을 강요했으나 그는 단식(斷食)으로 대항하며 제자 임병찬(林炳瓚)에게 유소(遺疏)를 구수(口授)하였는데, 그 내용은 “왕으로 하여금 오직 영구히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을 예언했으며, 자기는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왜적이 준 것이므로 단식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미 나이 74세이니 죽는 것이 조금도 애석하다고 생각지 않으나 역적(逆賊)을 토벌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그의 문집 《면암집(勉菴集) 》에 전한다. 그리고 임병찬이 쓴《대마도일기(對馬島日記》에는 선생의 마지막 유시(遺詩) 한 편이 전한다.

"起瞻北斗拜瓊樓 (기첨북두배경루: 아침에 일어나 북녘보고 主上께 절올리니, 경루: 임금이 계신 대궐)
白首蠻衫憤涕流 (백수만삼분체류: 흰머리 오랑케 옷에 분한 눈물 흐르는구나)
萬死不貪秦富貴 (만사불탐진부귀: 만번을 죽어도 진(秦) 나라 부귀를 탐하지 않음은)
一生長讀魯春秋 (일생장독노춘추: 한평생 노(魯)나라 춘추(春秋)를 읽었기 때문일세)"

이 시(詩)는 선생 임종시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가을 서리(秋霜) 같은 선생의 절개가 후인(後人)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1906년(광무 10) 10월 수비대장으로부터 면암에 대한 식비는 모두 조선정부의 부담이라는 말을 듣고 계속하던 단식은 중지하였으나, 이미 오랜 단식으로 병을 얻어 그해 11월 5일에 대마도 병영(兵營)에서 서거하니 그의 한많은 일생과 구국신념으로 일관된 생애가 마침내 종결되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자질문인(子姪門人)은 물론 회사 사원(社員)을 비롯한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부두에 몰려나와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高忠)" 이란 조기(弔旗)를 높이 들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저서에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경기도 포천(抱川)에 있는 채산사(?山祠)와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모덕사(慕德祠)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즈하라에서 운명(殞命)하시던 날]

선생이 임병찬(林炳瓚)등 12명의 의병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시(嚴原市) 위수영(衛戍營) 수비대에 수감된 것이 1906년(74세) 음7월 8일이었다. 그리고 운명하신 날이 그해 음력 11월 17일었다. 《면암집》에는 그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1월 17일(庚戌) 인시(寅時, 오전 4시)에 대마도 수관(囚館)에서 운명(殞命)하시다

“전날 저녁 큰 별이 동남쪽으로 떨어지며 밝은 빛이 밤하늘에 뻐쳤다. 이것을 바라본 사람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새벽에 운명하셨다. 이에 앞서 영조(永祚, 면암선생의 장남)가 염습(殮襲)할 제구를 갖추어 들어왔다.

선생이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은 수비대장은 “시신(屍身)을 오래 이 건물에 둘 수 없으니 시실(屍室)로 옮기라 ”고 하였다. 시실은 경비대 안에 있는데 한칸 짜리 판자집이었다.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 시상(屍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 10시)에 시신을 이곳으로 옮기고 염(殮)을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워서 염한 상태로 밤을 보낼 수 없어서 신시(申時, 오후 4시)에 소렴(小殮)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 신보균(申輔均), 남규진(南奎振)이, 집례(執禮)는 이칙이, 호상(護喪)은 노병희(魯炳熹)가, 사서(司書)는 문석환(文奭煥)이, 사화(司貨)는 신현두(申鉉斗)가 맡았다.

이날 밤 일본측은 영조(永祚, 장남)와 영학(永學, 차남)만을 시신 곁에 있게 하고 그 외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날 전보를 쳐 본가와 서울에 부고(訃告)하였다.

11월 18일(申亥) 입관(入棺) 후 수선사(修善寺)에 모시다
노병희(魯炳熹)가 밖에서 소나무 판자를 구해와서 장인(匠人)을 불러 관을 짜려고 했는데, 수비대장이 와서 하는 말이 “관은 마땅히 부대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상부 명령이 내려왔다 ”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관(棺)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로서는 원수가 만든 물건이고 규격도 달라 하루도 사용할 마음이 없었으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참고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시(申時, 오후 5시)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魂帛)을 모시고 수비대 뒷문을 통해 동내 가게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함께 있던 수감자는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桎)을 두르고 부대 문안에서 배웅하였고, 오직 임병찬(林炳瓚) 한 사람만 영구를 배행하여 가게에 이르자, 해로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修善寺)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勉菴集 附錄 年譜에서)


[면암선생에 관한 문헌자료]

 

 “면암집(勉菴集)”
《면암집 (勉菴集) 》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으로 순국한 애국지사 최익현(崔益鉉)의 시문집이다. 초간본인 무신본(戊申本)은 최익현이 일본 대마도(對馬島) 옥중에서 순국한 지 2년 뒤인 1908년 봄에 장남 영조(永祚)를 중심으로 이재윤(李載允)·고석진(高石鎭) 등 30여 명이 편집, 같은해 11월 정산(定山)에서 간행하였다. 이를 탐지한 일본 통감부는 목각판까지 강제 압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낙장된 권수는 16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무신본 완질(完帙) 60여 질이 남아 비밀리에 전수되어오다가 1929년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문인 조우식(趙愚植)·박재식(朴在湜) 등이 이를 보층하여 3년의 각고 끝에 1931년 간행한 것이 신미본(辛未本)으로 알려진 두번째 《면암집》이며 최근까지 유포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면암집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일성록(日星錄)》 5권 2책 목판본이 1931년 간행되었는데, 1976년 면암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영인·간행한 바 있다. 48권 24책.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등 소장.

“대마도일기(對馬島日記)”
대마도에까지 선생과 함께 끌려가 끝까지 시종한 전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은 그때의 일을 날짜별로 소상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는데, 이 책이 바로《대마도일기》이다. 임병찬은 현지에서 선생과 함께 기거하면서 선생의 순국한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부록으로 최익현의 제자 최제학(崔濟學)이 쓴 《반구일기(返柩日記)》가 합본되어 있다.
1906년 6월 일본군 사령부는 최익현에게 3년형, 임병찬에게 2년형을 선고하고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 연금하였다. 임병찬은 스승인 면암의 병 증세를 살피며 간호한 과정을 세밀히 기록하였고, 국내의 제자, 친척, 친구들이 보낸 문안하기 위하여 오고 간 사정, 서신 내용 등을 선생이 임종할 때까지 자세히 서술하였다. 부록인 《반구일기》는 최익현의 임종 뒤 영구(靈柩)가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전말과, 부산항에 도착하자 군중이 슬퍼하던 일 등을 기록하였다. 1책,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일성록(日星錄)”
《일성록 (日星錄) 》은 조선 말기 문신·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의 글과 사실(史實)을 모은 책이다. 1932년 그의 문인 조우식(趙愚植)이 자료를 수집, 간행하였다. 책의 앞부분에는 서문, 세계(世系)·저자의 영정·선생행략(先生行略) 등과 최익현의 행적을 담은 14개의 도면(圖面)을 실었다. 권1∼3에는 1876년 개항부터 을사조약까지 최익현의 척사(斥邪)·척화(斥和)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의 상소문 2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는 의병항쟁 때의 기록이고, 권5는 부록으로, <벽문수록(蘗門隨錄)>에서 최익현이 죽을 때까지의 언행을 7항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대부분 《면암집(勉庵集)》에 있는 내용이지만, 앞 부분의 도면 등은 이 책에만 있는 것이다. 5권 2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면암 연보(年譜)](※ 표시는 음력임)


면암선생은 본이 경주최씨로 화숙공파 27세손이다. 본명이 익현(益鉉),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가 면암(勉菴)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고 일본 대마도섬 이즈하라(嚴原)에서 돌아가셨다.

 

1833. 12. 5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
골격 비범(骨格 非凡), 안채 여성(眼彩 如星). 아명이 奇男. 관상쟁이가 ‘귀하게 될 相’이라 함.
1838. (6세) 한학 입문
1846. (14세) 華西 李恒老 선생에게 사사 '勉菴' 아호 하사
1855. 3. (23세) 明經科 순통 합격 급제
1865. 7. (30세) 신창 현감 임명 - 청백리·선정
※ 道伯의 부당한 명령(사채 문제) 거부-사직 귀가
1865. 1. (33세) 성균관 직강 임명 - 국조총략 편찬
1866. 4. (34세) 사헌부 지평 임명 - 6개조 상소초(上疏草)
1868. 9. (36세) 사헌부 장령 임명 - 사직하고 시폐상소(時弊上疏)
'토목공사 정지'
'수탈정책 지양'
'당백전 철폐'
'사문제 혁파'
※ 특지(特旨) - 통정에 승진 돈영부 도정 제수 - 사퇴
1870. 6. (38세) 승정원 동부승지 임명 - 사직 상소, 아마 하사(兒馬下賜)
1873. 8. (41세) 우부승지, 동부승지, 호조참판 특별 제수 - 사직 상소
1873. 11. 8(41세) 제주도 금부 남간 구치 -위리안치
1875. 3. 16(43세) 제주도 귀양 해제
1876. 1. 22(44세) 오불가 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도끼 상소'
1879. 2. (47세) 방축 명령(放逐命令)- 귀가
1894. 7. 1(62세) 자헌대부 공조판서-대원군 직접 제수-상피 상소
1895. 6. (63세) 역적 성토-의복제도 회복 상소
1895. 12. 3(63세) 단발령 철폐 주장-전동사관 구치
1896. 1. 7(64세) 부군 선유대원 임명 - 1차, 2차 사피 상소
1898. 9. 7(66세) 의정부 찬정 임명 - 1차, 2차 사피 상소
1900. 4. (68세) 호서정산(湖西定山) 이사 -의병 강소가 됨.
1902. 3. (70세) 궁내부 특진관 임명 -1차, 2차, 3차 상피 상소
1904. 6. (72세) 의정부 찬정 임명 - 국왕께서 밀지로 직접 부르심. 사피 상소 -국 정에 관한 상소 수십차
1905. 1. (73세) 현금 3만냥과 백미 3섬 특별 하사 - 국고에 반납
※ 경기도 관찰사 제수 - 1차, 2차, 3차, 4차 사피 상소
1905. 2. 6(73세) 왜적 장곡천 호도에게 체포됨 - 일본 사령부 구치
1905. 2. 18(73세) 왜적 소산삼기에게 체포됨 -일본 헌병대 구치
1905. 11. (73세) 홍주 의병 지휘 - 총수로 추대
※ 의기(義旗) - 존양토복기( 尊壤討復旗) 및 장군검 하사
※ 의병대장 민종식, 곽한일, 남규진 - 홍주 구백의총
1906. 2. 21(74세) - 가묘 하직
※ 논산, 노성, 궐리사에서 대강(大講)
※ 격문 4개 조항 - 8도 포고
※서고문(誓告文) 작성 포고
1906. 4. 13(74세) 창의소(倡義疏) 및 寄日本政府書
※ 전북 태인 의병 봉기 - 의병 총수
1906. 6. 27(74세) 의병 해산, 불굴피집(不屈被執) 일본 사령부 구치
1906. 7. 8(74세) 12명 제자와 함께 일본국 대마도 이즈하라시(嚴原市)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에 수감
※ 단식 항거
※ 遺疏 작성 -(林炳瓚 받아 씀)
1906. 11. 17(74세) 寅時에 餓死 殉國
1906. 11. 21 遺骸 還國 부산시내 철시(撤市), 온국민 호곡
※ 실 질적인 抗日 國民葬
1907. 4. 1 충남 논산군 월오동면 지경리 무동산 癸坐 入葬
1909. 11. 14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 壬坐 안장
※ 일제의 강압에 의 하여 논산에서 강제 이장시켰음.
1946. 3. 광복후 임정 요원 환국 고유추모제 봉행(주석 김구 주제)
1954. 6.25 동란중 대한민국 안녕을 기원하는 고유추모제 봉행(국회의장 신익회 주제)


[선생의 충혼을 기리는 사우(祠宇)]

모덕사(慕德祠)


 

선생을 추모하여 세운 사우는 전국에 모두 12개가 있다. 모덕사는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장구동 마을 입구 좌측에 위치한 산의 남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며 1914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약 5000평에 걸쳐서 춘추각, 중화당, 영모재, 모덕사, 대의관, 성충대의, 고택 등의 7동의 건물이 있다.

면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모덕사의 현액의 유래는 고종황제가 내린 밀지 가운데 ‘간우공극 모경숙덕(艱虞孔棘 慕卿宿德)…’의 글귀 중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취하여 현액하였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밀지(密旨)는 이렇게 썼다-

“艱虞孔棘 慕卿宿德 朕將虛席 共濟危機 ~~ 宗社幸甚 疆土幸甚
(간우공극 모경숙덕 짐장허석 공제위기 ~~ 종사행심 강토행심)
光武八年 陰曆 六月十三日 前贊政 崔益鉉”
(광무팔년 음력 유월십삼일 전찬정 최익현)


으로 되어 있다. 그 뜻은 “나라 일이 어지러움에 경과 같은 충직스러운 신하가 아쉬우며, 그 높은 덕을 사모하노라. 짐과 함께 나라의 위기를 구한다면 종사와 강토에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이로다 ”라는 뜻이다. 모덕사는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1914년에 건립되었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노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현감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며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고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창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 16개항목을 적어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하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곧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거기서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후에 그를 추모하는 사림에서 태인, 포천, 곡성 등지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이곳 모덕사는 면암선생이 살았던 고택에 마련된 사우로, 선생의 많은 장서를 보존하고 있는 장서각과 선생의 유물을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이 함께 들어서 있다. 사우의 앞에는 화강석 기단 위에 방형의 자연초석을 놓고 방형기둥을 세워 만든 솟을삼문이 있고,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계 맞배지붕으로 양 옆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어칸의 상부에 ‘慕德祠(모덕사)’라는 현액이 걸려있다.

사우의 주위에는 담으로 보호시설을 해 놓았으며, 좌측에는 영정을 모신 팔작지붕의 목조기와 건물인 영당이 있고, 우측으로는 1900년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정자형의 목조기와 건물인 고택이 있는데 현재도 이 곳에서 후손이 살고 있다. 고택의 앞에는 ‘중화당(中和堂)’이 있는데 이는 면암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1900년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목조기와 건물이다. 중화당의 옆에는 선대의 위패를 모신 ‘영모제(永慕齋)’가 있으며, 그 외의 건물로는 유물전시관인 ‘대의관(大義館)’과 4,023점의 서책과 1,974점의 서찰을 보존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목조건물인 ‘춘추각(春秋閣)’이 있다.

현재 관리소가 있어서 잘 보존되고 있으며, 봄, 가을로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춘향(春享)은 의병거의 기념일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일인 4월 13일에 매년 청양군의 주관하에 올리며, 추향(秋享)은 매년 음력 9월 16일에 모덕회(慕德會)라는 유림단체의 주관하에 올리고 있다.

채산사(채山祠)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 있는 채산사는 항일투쟁의 선봉장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대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서거(逝去)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선생의 자(字)는 찬겸(贊謙), 호(號)는 면암(勉菴)이다. 1855년(철종 6) 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참판(工曹參判)·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다. 특히 공조판서로 있을 때 대원군을 탄핵하여 실각케 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여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된 뒤 단식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에 지역의 유림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했으나 일제 통치시기인 1927년 일본인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7년 유림(儒林)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고, 1975년에 보수가 이루어졌다.

사당 주위는 담장으로 둘렀으며, 입구는 3칸의 소슬삼문으로 꾸몄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규모를 이루고 있는데 정면칸은 개방된 퇴칸으로 이루어졌다. 지붕은 정면과 배면쪽으로만 면이 구성된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측면의 박공부에 풍판을 달아 목재 마구리(직각으로 자른 끝면)의 부식을 방지했다. 전면은 서까래위에 각이 진 부연(付椽)을 덧달아 처마를 길게 빼낸 겹처마이고 배면은 서까래로만 이루어진 홑처마이다. 그리고 가구는 오량가(五梁架)를 이루고 내부의 중앙에 면암선생의 위패와 그 옆 배면벽에 길이 2m, 폭 1m의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이 그린 그 유명한 "면암 최선생 칠십삼세상(勉菴 崔先生 七十三歲像)"이 걸려 있다. 내부 좌측면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최면식(崔勉植, 1891∼1941) 선생의 위패도 봉안되어 있다.(경기도기념물 제30호)

[인품처럼 소박한 묘역]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는 이 묘소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며 호국충신이었던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대학자 이항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 10년(1873)에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과 서원 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3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관직생활에 대한 뜻을 접고 위정척사론자로서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 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단발령 실시, 을사조약 체결 등을 반대하는 상소를 통해 강력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면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1906년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침략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고,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묘지는 1907년 당시 충남 논산군 국도변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1910년에 오지인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무덤 옆에는 이선근(李瑄根)이 글을 짓고 서예가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충청남도기념물 29호) 

 

[일본 수선사(修善寺)에서 올린 100주기 추모제]

“내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너희가 주는 음식을 먹고 너희들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 단식(斷食)하겠다."

 

조선 말기 항일 의병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마도에 끌려간 뒤 일본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가 옥사한 조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년) 선생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일본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진혼제(鎭魂祭)를 올렸다. 울산울주문화원은 26일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수선사(修善寺) 경내에 모신 최익현 선생 순국비 앞에서 이두철 울주문화원장 등 관계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면암 최익현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 진혼제’를 개최했다.

올해로 최익현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아 선생이 숨진 쓰시마가 울주군과 자매결연 도시라는 인연으로 울주문화원이 적극 나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이날 진혼제는 도포를 입은 참가자들이 먼저 신명에 고하는 축문을 읽은 후 초헌관인 이두철 원장이 첫 잔을 올리고, 이어 아헌, 종헌 등의 차례로 잔을 올렸다. 제례가 끝난 뒤에는 뒤풀이 행사로 중요 무형문화재 73호인 탈춤 가산오광대 이수자인 손옥희씨가 최강호 고수와 함께 애국지사로 유명을 달리했던 면암 선생의 강직한 나라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만든 창(唱)을 불렀다.

끝으로 재일 한국인 문화예술협회와 무용협회 부회장인 재일동포 무용가 정명자씨의 진혼무로 1시간에 걸친 진혼제는 모두 막을 내렸다. 특히 이날 차려진 진혼제 젯상에는 옛날 면암 선생이 일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한 항일정신을 기려 일본에서 구하지 않고 한국에서 직접 가져간 음식이 차려졌다.

(쓰시마=연합뉴스 장영은 기자)







[위] 선생의 시신을 고국으로 옮길 때까지 모셨던 이즈하라시 수선사 입구
[중간]수선사에 세워진 면암선생 순국비(비문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 라고 씌여 있다)
[아래] 면암선생 진혼제 모습

 


MBC 창사드라마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 섬나라 오랑케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큰 선비 勉菴선생의 올곧은 지조와 春秋大義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


왕조의 명운이 다한 구한말 비극의 시대를 살면서 확고한 국가관으로 지식인의 사명과 원로(元老)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던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의 생애를 통해 현재 대선 정국 가운데 경종을 울리며 "진정한 애국(愛國)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또한 밀레니엄 시대인 21세기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참 지식인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MBC 제작진)

(다시 보기)



[면암 관련 뉴스와 영상자료]
[경향] ‘을사늑약’, 비분강개 대신들 日 위협에 ‘투항’
[내일] 가채리(嘉채里) 기행(紀行)

<현충의 노래>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山河)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忠魂)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변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 배경음악/ ‘현충의 노래’
□ 내용구성/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