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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선조

[그리운 선조] 4. 다묵 안중근(多默 安重根)

잠용(潛蓉) 2012. 10. 21. 20:42

[그리운 선조]
“다묵(多默) 안중근(安重根)”


 



“조국의 원수 이등박문(伊藤博文, 68세)를 통쾌히 저격하고,만주땅 여순 감옥에서 32세의 짧고 빛난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돌아가신지 1세기, 목숨 바쳐 되찾으려 했던 그 조국은
광복된 지 어느덧 65주년이 지났건만 아직 그 분의 시신조차 모시지 못하고
그  고귀한 영혼이 만주 벌판에서 쓸쓸히 떠돌게 하고 있다.”

 

[사진] 여순감옥에서 촬영된 최후의 사진. 남루한 죄수복 속에서도 푸른 송백과 같은 늠름한 기상이 살아있다. 표준 영정보다 이 사진이 의사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편집자) 



[너무도 짧은 일생]

 

 

19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하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그는 1879년(고종 16)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순흥안씨(順興安氏) 안태훈(安泰勳, 進士)과 배천조씨(白川趙氏)의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승마·궁술·사격술을 익혀 문무(文武)를 겸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산둥(山東)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갔다. 1906년 석탄 상점을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이어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펴다가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慶興)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군에 패배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노브키에프스크에서 김기룡(金起龍)·엄인섭·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의 피로써 맹세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 코코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哈爾濱)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해를 결의하였다.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계책을 세우고 하얼빈역에 잠입,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을 쏘아 명중시켰다.

[사진] (위) 거사 후 안 의사가 수감되었던 여순감옥 (아래) 안의사를 마차에 실어 형장으로 옮기는 장면(사진: http://blog.jinbo.net/rouge002/?pid=252)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묻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의군 사령관으로서 처형하였다.”고 밝혔다.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 재판을 받은 뒤 1910년 2월 14일 최종 사형언도 선고를 받고 다음 달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으며, 재감중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yahoo 백과사전)

[대륙을 깨운 3발의 총소리]

안중근(安重根·, 31세)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당시 추밀원 원장, 68세)를 저격했다. 10월 22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사를 위해 하얼빈을 찾은 안 의사가 하얼빈에 머무른 것은 10박 11일. 그는 11월 1일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된 이후 1910년 3월 26일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겨레의 뜨거운 마음은 의거 95년, 순국 94년이 되는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안 의사가 하얼빈에 남겨 놓은, 짧지만 영원한 발자취를 다시 한번 찾아 갔다.

▷ 1909년 10월 22일(하얼빈 도착)


하얼빈 역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1959년 재건,1980년대 증축해버려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안 의사가 거사를 기다렸던 역구내 귀빈실 자리는 그대로였다. 안중근 의사가 처음 하얼빈역을 찾은 것은 10월 22일 오후 9시 15분. 안의사는 우덕순(禹德淳·33)과 함께 그동안 활동하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온 것이다. 열차가 쑤이펀허(綬芬河)에 1시간 남짓 정차할 동안 그곳에서 독립 활동을 지원해주던 한의사 유경(劉京)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유동하(劉東夏·18)를 함께 데리고 왔다. 안의사 일행은 열차에서 내려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金成白·32)의 집을 찾았다. 김성백은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재하얼빈 한국민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유동하의 누이 동생과 김성백의 막내 동생이 약혼한 사이였고, 안 의사와도 일면식이 있었다.

김성백의 집은 레스나이가 28호다. ‘레스나이’는 러시아어로 ‘삼림’‘삼림지대’라는 뜻으로 당시 그곳에 목재 가공소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삼림가(森林街)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삼림가 28호는 없어지고 대신 하얼빈시 위생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80년대 도심 재개발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김성백의 집은 울타리가 있는 목재로 된 단층집이었는데 안 의사는 이 집에서 의거 때까지 머물면서 거사 계획을 짰다.

▷ 1909년 10월 23일(거사 준비 시작)


안 의사는 아침에 시내 구경을 한다며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삼림가 28호 앞길은 지금도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이다. 집을 나오면 당시 하얼빈 시내 유일한 공원인 하얼빈 공원(지금의 자오린 공원)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 의사는 이들과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의거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하얼빈 공원 서문에서 남북으로 관통된 거리 건너편에는 한국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고려가(高麗街 지금은 서8도가)가 있었다. 당시 하얼빈 인구는 2만명 정도였고 한국인은 268명이 살고 있었다. 고려가에는 한국인 초등학생 40여명이 다니는 동흥소학(東興小學)이 있었다. 안의사는 오후에 동흥소학을 찾아가 이 학교 교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신문 <대동공보 大東共報·, 海潮新聞의 후신>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던 김형재(金衡在)를 찾았다.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 조도선(曺道善)이 학교 부근의 김성옥(金成玉)의 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백의 집에서 안의사는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로 시작하는 <장부가 丈夫歌, 또는 하르빈가)"를 읊으며 거사 의지를 다졌다. 지금은 동흥소학과 김성옥의 집은 모두흔적조차 없어졌다.빌딩이 들어선 도심 거리로 바뀌었다. 동흥소학의 후신인 도리(道里) 조선족 중점소학은 지금 이웃에 있는 경위 4도가(經緯四道街)로 이전했다. 이영수(李英秀) 교장은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가 직접 찾은 학교라는 점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1909년 10월 24일(거사 장소로 이동)


아침 일찍 일어난 안의사와 우덕순은 김성백의 집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의 하얼빈 공원에 들어갔다. 이들은 느릅나무가 우거진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했다. 안의사가 하얼빈 공원을 찾은 것은 불과 며칠 전이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유언을 통해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다 묻어달라”하고 “조국이 독립하면 그때 유해를 가져가 달라”고 당부했다. (이와같은 안의사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는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날 밤에 일본인 간수들이 뤼순감옥 근처에 몰래 매장해 지금도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

안의사와 우덕순은 공원에서 상의한 끝에 하얼빈을 떠나 차이자거우(蔡家溝)로 가기로 했다. 창춘(長春)에서 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못미쳐 차이자거우 역에 내릴 가능성에 대비해서였다. 또 이토가 탄 특별열차에 대한 동향 탐지 목적도 있었다. 오전 9시 안의사는 유동하를 하얼빈에 남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차이자거우로 떠났다. 낮 12시쯤 차이자거우에 도착한 뒤 역 승무원을 통해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모레(10월 26일) 오전 6시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아냈다. 안의사 일행은 역 구내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의 주인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수한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당시 중국 언론은 일제히 안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안의사의 총성이 한반도는 물론 만주를 독차지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저격사건 이후 안의사를 민족 영웅에 버금가는 반열에 올려놓는가 하면 관련 연구와 각종 기념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 하얼빈의 학자들은 “안중근 의사 추모 열기가 정작 한국보다 더 뜨겁고 다양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 항일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이토 저격이 일어나자 러시아와 일부 서유럽 국가들이 일본의 영향력을 감안해 공식적인 찬양이나 평가를 삼간 채 사실보도에만 주력했다. 그러나 중국 언론은 안의사의 애국 행위를 적극 찬양하고 이토의 침략 야심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족으로 대표적인 안중근 연구자인 서명훈(徐明勳) 전 하얼빈 민족종교 사무국 부국장은 “안의사가 하얼빈에서 거사하고 뤼순에서 순국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淸)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 전야라는 시대적 상황도 큰몫을 했다”고 풀이했다.

안의사의 의거는 1911년 청 왕조를 타도한 신해혁명(辛亥革命) 참가자들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설명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 구국 의지를 표현한 모범 사례가 된 셈이다. 혁명파 신문인 상하이의 <민우일보>는 이토 저격에 대해 연속 5편의 사설과 19편의 기사를 실었다. 톈진의 <대공보>를 비롯해 베이징, 광저우, 충칭, 선양 등의 신문이 앞다퉈 사설과 관련기사를 상세히 보도했다.

중국으로 피신해 있던 한국 학자와 중국의 개혁운동가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14년 박은식(朴殷植) 이 <전기 안중근>을 펴냈고 중국의 석학인 량치차오(梁啓超), 장빙린(章炳麟) 등은 제문과 비문 등을 만들어 그를 추모했다. 상하이에서 활동한 혁명파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도 아니요, 세계의 안중근”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중국의 대표적 문인 파진(巴金)도 “안중근은 나의 젊은 날의 영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19년 제국주의 반대를 표방한 5·4운동이 일어난 이후 안의사는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국민당, 공산당은 당파를 초월해 안의사를 중국의 민족 영웅에 버금가는 반열에 오르게 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안의사를 소재로연극을 공연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도 톈진의 난카이(南開)학교 재학시절 안중근 연극에 출연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과 한국이 손잡고 함께 벌인 항일 투쟁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1949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안의사에 대한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안의사 의거가 실리기까지 했다.

 

문화혁명 등으로 주춤했던 안의사 추모 열기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다시 일어났다. 의거 80주년을 맞은 1989년에는 대대적인 행사가 벌어졌다. 지린성 사회과학원 주최로 안중근 국제학술세미나가 창춘에서 처음 열렸다. 하얼빈에서는 해마다 순국일인 3월 26일과 의거일인 10월 26일이 되면 의거에 대한 좌담회, 공연 등이 열리고 있다. 1992년에는 왕훙빈(王洪彬) 당시 하얼빈시 문화국장이 <창작 뮤지컬 안중근>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밖에 헤이룽장성 혁명박물관은 안의사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 평화주의자 안중근
과거에는 안의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시각이 강했으나 지금은 동양의 평화를 부르짖은 사상가로 접근, 새로운 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하얼빈 학자들의 설명이다. 김우종 전 헤이룽장성 당사연구소장은 “안중근 의사는 이토 한 사람을 죽인다고 일제의 야욕이 사라질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며 “그는 이토를 죽여서 일본과 모든 아시아 인민들에게 동양의 평화가 중요하고, 그러려면 일제의 무분별한 야욕이 사라져야 한다고 외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스치(吳時起) 하얼빈공대 인문학부 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과 애국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며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진정한 평화주의자임을 잘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중근 추모 열기는 훗날 일본에까지 이어져 각종 추모 모임이 만들어지고 여러 종류의 전기가 출간된 바 있다. 안의사는 오늘날까지도 패권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아시아에 평화의 횟불이 되고 있다.

(경향신문 하얼빈/홍인표 특파원)

 


[사진]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 뤼순(旅順) 감옥으로 면회 온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북한 월간 화보 《조선》2006년 1월호에 공개됐다.


[위대한 여정]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바람의 노래)


어릴 적, 아버지의 서가에는 빛 바랜 초록색 표지의 <조선총독부 다섯 권이 꽂혀 있었다. 지은이는 유 주현. 막 독서에 흥미를 느끼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그 소설에 도전했지만, 완독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그 첫 장면은 수없이 읽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하얼빈 역, 프록코트를 입은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일곱 발의 총성. 지금도 내게 그건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난 10월 1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슬라비안카로 가는 카페리 객실에 앉아 끝내 읽지 못한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내가 안중근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첫 장면은 막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 첫 마디에 대한 묘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손가락. 나는 연추(러시아명 얀치허) 하리(下里)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뤼순에 이르기까지,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행로보다는 그 손가락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안중근이 김기룡, 강기순, 박봉석 등 결사 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부른”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을 끊었다.

안중근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신문을 받으며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인 연추 하리라고 했다. 옌치아, 연추, 카리, 하리 등으로 알려진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금의 크라스키노 부근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항구도시 슬라비안카에서 크라스키노까지는 50㎞ 남짓. 표지판도,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 도로를 먼지구름과 함께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차창 밖 밤 하늘에 은하수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변경지역이다.

중국 훈춘과 국경을 접한 크라스키노는 소읍이다. 조금만 내려가면 두만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북한 회령 땅이다. 그 탓에 19세기 말부터 기근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들어와 땅을 개척했다. 하지만 둘러 봐도 보이는 동양인이라고는 호텔에 머물며 자국에서는 금지된 카지노만 즐긴 뒤, 곧바로 돌아가는 부유한 중국인들뿐이다. 안중근은 이 소읍의 어디쯤에서 결의를 했을까. 크라스키노에서 훈춘 방향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주카노프카 다리가 나오는데,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2년 바로 이 다리 옆에 불꽃 모양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손가락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연추 하리를 찾으려면 10여㎞ 더 들어가야 한다. 주카노보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우리나라의 ‘남양 알로에’ 농장이 있다.

농장장은 고려인이지만,그는 안중근은 물론 인근에 300여 곳이나 번성했다던 고려인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 거기가 한인들이 일군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고려인은 거의 남지 않게 된 셈이다. 강제이주 후 러시아인들이 버려진 한인 가옥의 벽돌과 주춧돌을 날라다 새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까닭에 주카노보 마을 주민들은 옛 한인들의 집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카노보 마을에서 만난 알렉세이(35)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따라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은 억새밭을 헤치고 가면 거짓말처럼 우물, 맷돌, 벽돌,묫자리 등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길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양옆으로 자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길, 그 길이 끝나는 산 밑을 가리켰다. 아, 연추하리!

어릴 적, 성묘하러 갈 때면 길 가운데 자라난 풀 때문에 자동차가 쉽게 다니지 못하던 그런 풍경이 떠 올랐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가노라면 금방 새 소리와 풀 냄새와 손등에 와 닿는 바람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길이었다. 모르긴 해도 안중근이 살았던 시절에는 양옆으로 논이 있었을 것이다. 이맘때 쯤이면 한창 추수를 할 시기이니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는 기슭을 향해 30분 남짓 서둘러 걸었고 거기에는 안중근이 무명지를 자른 동네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담장으로 사용했음직한 돌무더기와 집터에만 자란다는 주황 꽈리가 홀로 피어 마을의 흔적을 전할 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12명 결행의 흔적은 모진 세월에 마모되고 말았다.

연추 하리에서는 나라를 잃고 유랑에 나선 조선인의 마음으로 산과 들을 바라봐야만 한다.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뒤로 하고 양지 바른 곳에다가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연추하리는 그렇게 지은 집들이 대여섯 채 서 있는 마을이었다.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안중근은 그런 집 어딘가에서 나라를 위한 마음을 보이겠노라며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은 아마도 그 들판 어딘가에 묻혔을 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연추하리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묻힌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새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이 불면 전면적으로 억새풀들이 몸을 누인다. 그게 바람이다. 바람은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쉽게 변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은 걸어간 길을 통해 자신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손가락을 잘랐다. 그 손가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막 출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호객 행위를 하는 택시기사, 북적이는 하얼빈 역. 불과 100여년 전에 철도를 따라 건설된 도시의 아침 풍경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이란 끝없이 투쟁하며 문명을 만들어낸다는 명제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지난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가 먼 대륙의 평원을 18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새벽녘 하얼빈 역.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플랫폼에 발을 디디는 순간, 네 발.. 조금 뒤 세 발의 총성..그리고 ‘코레아 우라!’라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을 수행 중인 31세의 대한국인 안응칠(安應七, 안중근)이 서 있다. 연추 하리 외딴 시골에 왼손 무명지를 두고 온 사내. 그는 의외로 침착하다.

얼른 철길을 건너 안중근이 던져버린 1900년식 브라우닝 권총을 집어 든다. 주위에는 안중근이 쏜 총알의 탄피 일곱 개가 흩어져 있다. 서둘러 열어본 탄창에 남은 한 발의 총알. 이 총알의 얘기를 듣기 위해 연추 하리에서 하얼빈까지 기나긴 여행을 한 셈이다. 탄두에는 십자가 그어져 있다.

여러가지 의문이 솟구친다. 안중근은 그 한 발의 총알로 자살을 할 생각이었나? 탄두의 십자는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말해주는가? 그리고 7연발 반자동 브라우닝 권총이 남긴 일곱 개의 탄피와 마지막 한 발. 그것은 미스터리일까? 역사의 교훈일까?

브라우닝은 오전 7시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의 가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던 오전 9시까지 안중근은 가장 효과적인 저격 지점, 오직 그 한 가지만에만 골몰했다. 특별열차가 도착하자, 하얼빈에서 이토와 회담하기로 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귀빈칸으로 올라가 이토를 영접한다. 코 끝으로 스치는 영하 5도의 찬 바람. 하급 무사 출신의 이토는 밀려드는 바람에 북국의 풍토를 체감했으리라. 그에게 코코프체프는 의장대 사열을 부탁한다. 마침 이토 도착 하루 전 가와카미 하얼빈총영사가 러시아 군경에 일본인 환영객을 검색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니 결과적으로 가와카미는 안중근이 브라우닝을 들고 플랫폼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토가 기차에서 내리자, 악대가 군악을 연주한다. 환영 음악과 함께 이토는 차례로 러시아 악대, 러시아 군대, 청나라 군대, 외교사절단의 순서로 사열한다. 그 순간 귀빈 대합실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안중근은 플랫폼으로 뛰쳐나온다. 공적을 향해 울리는 환영 함성이 그의 심장을 불타게 했다. 러시아 헌병대의 뒷 부분에 도달한 순간, 이토 일행이 다시 돌아섰다. 2열로 ‘받들어총’을 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 그 뒤로 보이는 백발의 이토. 안중근은 선두의 노인을 향해 네 발을 발사한 뒤 침착하게 주위 일본인들을 향해 다시 세 발을 쏜다.

 

 

 

 

이토의 몸에 박힌 총알은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안중근은 이토의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오른쪽 팔꿈치 위쪽을 겨냥해서 쏘았다. 이렇게 쏴야만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토는 모두 세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모두 오른쪽 팔을 지나 폐와 복부에 박혔다. 총알이 폐부를 관통하지 않은 까닭은 안중근이 사용한 총알이 탄두가 덤덤탄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공업도시 덤덤의 무기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덤덤탄은 표적을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명중하면 관통하지 않고 인체에 박혀서 탄체 내의 납을 분출한다.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서 사용을 금지시킨 탄알이다. 고종의 밀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묵살당했고 안중근은 만국평화회의의 금지품으로 이토의 심장을 겨냥했다.

안중근은 모두 일곱 발의 총알을 쏜 뒤, 총을 버리고 ‘코레아 우라!’를 외치다가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붙잡혔다. 브라우닝은 7연발 권총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이 한 발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중근은 팔꿈치 위쪽을 쏴야한다는 사실도, 덤덤탄이 목표물을 즉사시킬 수 있다는 것도, 러시아인 대신 일본인만 골라 저격할 침착함도 가진 명사수였다.

일본인 검찰관은 “자살하기 위해 한 발을 남겨둔 게 아니냐?” 고 다그쳤지만 안중근은 그 말을 부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시종 거사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그가 자살을 꿈꿨을 리는 없다. 총알을 장전하던 안중근은 무슨 수가 있어도 이토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최대한 사격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7연발 권총에 최대한 장전하는 방법, 그건 약실에 한 발을 넣어놓고 탄창에 일곱 발을 넣는 일이다. 네 발, 세 발, 그리고 나머지 한 발. 약실까지 가득 채운 여덟 발의 총알은 빈틈 없이 장전한 분노이거나, 혹은 대륙을 떠돌던 망국의 한이었을 것이다.

일곱 발을 쏜 뒤 안중근은 멈추었다. 영웅은 남은 전쟁을 위해 한 발을 아껴뒀다. 안중근이 가장 먼저 탄창에 집어넣었을 마지막 한 발은 그 전쟁이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마지막 한 발은 수천 발의 총알이 될 것이며, 안중근의 죽음은 수많은 안중근을 낳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정당성은 여기에 있다. 마지막 한 발은 결코 한 발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수천 발의 총알이었으며 안중근은 모든 독립운동가를 대표한 보통명사였다. 그리고 그 전쟁은 계속된다.

(글: 김연수, 소설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

 

 


[최후의 법정 진술]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조선과 일본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의 의병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사진] 처형 당일 안 의사는 어머니가 만들어 보낸 이 한복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갔다.


“나는 검찰관의 논고를 듣고 나서 검찰관이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하얼빈에서 검찰관이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아들에게 내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는데, 그 아이는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살이었는데 그후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얼굴을 알고 있을 까닭이 없다. 이 일로만 미루어 봐도 검찰관의 심문이 얼마나 엉터리고, 또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거사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조일 관계와 관련해서 결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심리에 있어서 재판장을 비롯하여 변호인과 통역까지 일본인만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대한에서 변호인이 와 있으니 이 사람에게 변호를 허가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변론 등도 그 요지만을 통역해서 들려 주기 때문에 나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이 봐도 이 재판을 편파적이라는 비방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검찰관이나 변호인의 변론을 들어 보면, 모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 방침은 완전무결한 것이며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부당하다. 나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토가 통감으로서 시행한 시정방침의 대요를 말하겠다.

1905년의 5개조 보호 조약에 대한 것이다. 이 조약은 황제를 비롯하여 대한 국민 모두가 보호를 희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토는 대한의 상하 신민과 황제의 희망으로 조약을 체결한다고 말하며 일진회(一進會)를 사주하여 그들을 운동원으로 만들고, 황제의 옥새와 총리대신의 부서가 없는데도 각 대신을 돈으로 속여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토의 정책에 대해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크게 분개하여 유생 등은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이토에게 건의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의 인민들은 신뢰하며 일본과 더불어 동양에 설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이토의 정책은 이와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최익현(崔益鉉)이 그 방책을 냈다가 송병준에 의해 잡혀서 쓰시마에서 구금돼 있던 중 사망했다. 그래서 제2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방책을 냈지만 이토의 시정방침이 변경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황제의 밀사로 이상설(李相卨)이 헤이그의 평화회의에 가서 호소하기를, 5개조의 조약은 이토가 병력으로 체결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처분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그 회의에 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토는 한밤중에 칼을 뽑아 들고 우리 황제를 협박해서 7개조의 조약을 체결시켜 황제를 폐위시켰고, 일본으로 사죄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 부근의 상하 인민들은 분개하여 그 중에 활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민과 군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무기를 들고 일본 군대와 싸워 ‘경성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십수만의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셨는데, 나라의 위급존망에 즈음하여 수수방관하는 것은 국민된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점점 격분하여 오늘날까지 일본군과 싸우고 있으며 아직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로인해 십만 이상의 대한 국민이 학살됐다. 그들 모두 국사에 힘쓰다가 죽었다면 본래 생각대로 된 것이지만, 모두 이토 때문에 학살된 것으로, 심한 사람은 머리를 노끈으로 꿰뚫는 등 사회를 위협하며 잔학무도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장교도 적지 않게 전사했다. 이토의 정책이 이와 같이 한 명을 죽이면 열명,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의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어, 시정방침을 개선하지 않으면 대한의 보호는 안 되는 동시에 조일간의 전쟁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토 그는 영웅이 아니다. 간웅(奸雄)으로 간사한 꾀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간사로 꾀한 ‘조선의 개명은 날로 달로 나아가고 있다’고 신문에 싣게 했다. 또 일본 천황과 일본정부에 ‘조선은 원만히 다스려 날로 달로 진보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 동포는 모두 그의 죄악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즐기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대한 국민은 십수 년 동안 도탄의 괴로움에 울고 있기 때문에 평화를 희망함은 일본 국민보다도 한층 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일본의 군인, 상인, 도덕가, 기타 여러 계급의 사람과 만난 이야기는, 내가 조선에 수비대로 와 있는 군인에게 ‘이같이 해외에 와 있는데 본국에 부모처자가 있을 것이 아니가. 그러니 분명히 꿈속에서도 그들의 일은 잊혀지지 않아 괴로울 것이다.’ 라고 위로 했더니, 그 군인은 ‘본국 일이 견디기 어렵지만 어쩔 수는 없다’라며 울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동양이 평화롭고 조.일간에 아무 일 없기만 하면 수비대로 올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 라고 물으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가 있으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수비대로 온 이상 쉽사리 귀국할 수 없겠다.’ 라고 했더니, 그 군인은 ‘일본에는 간신이 있어서 평화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음에 없는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토 따위를 혼자서는 죽일 수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이다.’라고 울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농부와의 이야기는, 그 농부가 조선에 왔다는 당시에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가 말하기를 ‘조선은 농업에 적합하고 수확도 많다고 해서 왔는데,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안심하고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전에는 일본도 좋았지만 지금은 전쟁 때문에 그 재원을 얻는 데 급급하여 농민들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농업은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 있자니 이와 같아 우리들은 몸둘 곳이 없다’라고 한탄하며 호소했다.

다음으로 상인과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조선은 일본 제작품의 수요가 많다고 듣고 왔는데 앞의 농부의 이야기와 같이 도처에 의병이 있고 교통이 두절되어 살 수가 없다며,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으니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죽이고는 싶지만, 어떻든 평화로워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의 이야기라는 것은 예수교 전도사의 이야기이다. 나는 먼저 그 자에게 말을 걸어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인이 전도가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그가 ‘도덕에는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학살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천제(天帝)의 힘으로 개선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해서도 일본인이 동양의 평화를 희망하고 있는 동시에 얼마나 간신 이토를 미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본인에게도 이런데 하물며 조선인에게는 친척이나 친구를 죽인 이토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조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대한의 의병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선한다면 조일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희망하고 있다. 변호인의 말에 의하면, 광무 3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대한 국민은 청국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니 본건은 대한의 형법대전(刑法大典)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며, 대한 형법에 의하면 처벌할 규정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부당하며 어리석은 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 남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대한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끝)

재판장은 “이것으로써 심리를 모두 마칠 것을 알리고, 판결은 오는 14일 오전 10시에 언도하니 출정하라” 하고 폐정했다.

1910년(明治 43) 2월 12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요이치(渡邊良一), 재판장 마나베 주조(眞鍋十藏)


[마지막 모습]

▷ ‘하르빈가’ (哈爾濱歌- 안응칠(安應七, 重根) 지음)
이 시는 거사를 앞두고 안의사가 직접 지은 일명《하르빈가》이다. 귀절귀절 장부의 굳은 기개와 동포애와 독립의 염원이 스며 있다.


[사진] 안의사가 거사 직전에 직접 짓고 손수 기록한 ‘하르빈가’ 내용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처세혜 기지대의)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시조영웅혜 영웅조시)
때가 영웅을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웅시천하혜 하일성업)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東風漸寒兮 壯士義熱(동풍점한혜 장사의열)
동풍이 점점 차짐이여, 장사의 의가 뜨겁도다.
忿慨一去兮 必成目的(분개일거혜 필성목적) 분개하여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鼠竊兮 豈肯此命(서절서절혜 개긍차명) 쥐도적 쥐도적이여,어찌준 이 목숨을 바칠고.
豈度至此兮 事勢固然(개도지차혜사세고연)
어찌이에 이르렀는가, 사세가진실로 그렇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동포동포혜속성대업)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萬歲萬萬歲 大韓同胞(만세만만세대한동포)
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안응칠 작가(安應七 作歌)

 

 

▷ 마지막 가는 길, 어머니의 격려

일본은 안의사 저격사건 재판에서 국제법과 국제관례를 모조리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불법적 재판을 자행하였다. 안중근은 이러한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며 “오늘 내가 당하는 이 일이 생시인가 꿈인가? 나는 당당한 한국 국민인데 오늘 일본 감옥에 왜 갇혀 있는가? 더욱이 일본 법률의 재판을 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한 사람인가? 재판관 마음대로 하라. 나는 아무튼 대답하지 않겠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안중근은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의사의 태도에는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의사의 사형 선고 소식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다. 어머니 조씨는 아들의 사형소식을 전해 듣고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살아서 나라와 민족에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거라.”

어머니의 이 놀라운 애국심이 아들에게 큰 용기를 주어 결국 항소를 포기하게 한다. 어머니의 편지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에 ‘그 아들에 그 어머니’ 라는 기사로 실렸다. 참으로 세상에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는 부모의 마음이런만 안중근의 어머니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아들의 숭고한 희생이 행여 빛을 바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어머니의 조국사랑은 아들 안 의사 못지 않게 깊고 뜨거웠다. [사진] 안 의사의 어머니 조씨부인.
그리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어머니께 보낸 편지는 이러하다.

‘어머님전 상서’
“불초 자식이 감히 어머님께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업드려 바라옵건데 저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드림을 용서해 주십시요. 이슬처럼 허무한 이 세상에서 자식에 대한 정을 이기지 못하시고 저같은 불효자를 너무나 염려해 주시니, 훗날 천국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며 기도하옵니다.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가 천주님의 섭리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저의 장남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어 천주님께 바치는 몸이 되도록 해주십시요. 이 밖에도 드릴 말씀이 많사오나 훗날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올 때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들 도마 올림”

▷ 남긴 유언
“독립을 찾거든 시신이라도 고국으로 보내주오”

 

 

의사는 3월 26일 오전 10시 정각 뤼순 형무소 사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때 그는 고향에서 어머님이 손수 만들어 보낸 한복을 입고, 몸 속에는 '예수성화'를 지니고 있었다. <동양 평화를 원한다>는 최후 염원을 남기고 10분간 묵상기도를 드린 다음 조용히 사형대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안의사가 두 동생을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대한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도 그때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사진] 서울 장춘단공원 내 안의사 묘역. 왼쪽 비석이 없는 가묘가 안의사를 위한 것이다.

 

▷ 만세 충혼의 넋이 되어

한편, 안의사의 임종 소식이 국내외에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사의 순국에 대한 추도식이 열렸다. 당시 청 나라 원세개(袁世凱)는 안의사의 최후의 소식을 듣고 그 영령 앞에 다음과 같은 조시(弔詩)를 보내왔다.

平生營事只今畢(평생영사 지금필)
死地圖生非丈夫(사지도생 비장부)
身在三韓名萬國(신재삼한 명만국)
生無百世死千秋(생무백세 사천추)

“한평생 벼르던 일 지금에야 끝내셨구려.
‘죽는 마당에 살 길을 도모함은 장부가 아니라’고 하셨지.
몸은 비록 조선에 있어도 이름은 만방에 떨쳤고
백년을 못 살아도 죽어서는 천추에 남겠네.”


조국의 운명이 칠흑(漆黑)과 같이 암담했던 시절, 안중근 의사는 열화와 같은 의기로써 조국광복의 성업을 위해 한 목숨 민족의 제단(祭壇) 앞에 아낌없이 바치고 섬광처럼 사라졌다. 이제 수많은 우리의 선열(先列)들과 더불어 충혼(忠魂)의 넋이 되어 저 밤하늘의 북두(北斗)처럼 우리를 지켜보며 음우(陰祐)하고 있을 것이다.

[후세에 남긴 빛나는 유뮥]

 

 

 



안 의사가 남긴 유묵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먼저 짧은 일생을 살면서 그의 정신적 지표(指標)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귀절이 있어 소개한다.

▲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로움을 보거든 그것이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롭거든 네 목숨을 주어라”


* 안중근 의사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뤼순 감옥에서 쓴 이 글귀는 《논어》헌문편(憲問篇)에 나온다. 제자 자로(子路)가 스승에게 인간 완성에 대해 묻자, 공자는 “지혜, 청렴, 무욕, 용감, 예능을 두루 갖추고, 예악으로 교양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에는 이익을 보면 먼저 의를 생각하고(見利思義),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칠 줄 알고(見危授命), 오랜 약속일지라도 전날의 자기 말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久要不忘 平生之言) 이것도 인간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크기 31x141cm, 부산 동아대학교도서관 소장. 보물 제 569-6호)

▲ 歲寒然後知 松栢之不彫 (세한연후지 송백지불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송백의 절개를 알 수 있으리라”


* 《논어》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귀절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겨울 추운 때를 당한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낙엽지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이 모두 혼탁해지면 그 때서야 선비가 더욱 돋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속인들이 부귀를 그처럼 중히 여기는 데 비해 선비는 그 부귀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공자의 말씀과 같이 “군자는 세상을 마친 뒤에도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언행을 삼가한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 귀절을 쓴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擧世混濁, 淸士乃見. 豈以其重若彼, 其輕若此哉. “君子疾沒世, 而名不稱焉”) (크기 31 x 134cm,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장. 보물 제 569-10호)

▲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수사심여철, 의사임위기사운)
丈夫雖死心如鐵(장부수사 심여철)
義士臨危氣似雲(의사임위 기사운)

“장부는비록 죽어도 그 마음은 무쇠와 같고
의사는 위기에 임해도 그 기개가 뜬 구름과 같다.”



* 큰일을 위해 자기 한 목숨 초개와 같이 여기는 장부의 철석같은 의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 전날 국내외 동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생을 하였으나, 마침내 그 목적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산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 대한이 자주독립을 다시 되찾는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노라.”


2천만 동포들에게 남긴 이 유언은 의사가 사형 집행 전날인 1910년 3월 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그 전문게재되었다.

 

 

[관련 사이트] (※ 보시려면 제목을 클릭해 주세요^^)

 

1. 안중근의사 기념관 2.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3. 대한국인 안중근 4. 겨레의 인물-안중근 의사 5. 이 달의 독립운동가6.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7. 안중근 의사 관련 사진8.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장군(大韓義軍 參謀中將 安重根 將軍9. 안 의사의 친필(일본 원선사 소장) 10. 안중근의사유묵(서울시문화재) 11.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12.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1) 13.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2) 14.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3) 15.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4) 16. 안중근 의사 연보 17. 안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브라우닝 권총 18. [안의사 항일유적지](상)-피로쓴 대한독립, 단지동맹 19. [안의사 항일유적지](중)-세계를 뒤흔든 총성, 하얼빈 의거 20. 하얼빈과 안중근 21. 안의사 유해발굴 시작 22. 왜 유해를 찾아야 하는가? 23. 안중근에 대하여 24. 일송정과 해란강 25.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6. 여순 감옥

 


(테너 박인수 노래)

 

□ 배경음악/ 조두남 작곡 ‘선구자’ - 인천시립합창단 노래

□ 내용구성/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