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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남북통일

[어떤 이산가족 이야기] '72년 간 쌓여온 이산가족의 한과 슬픔'

잠용(潛蓉) 2014. 8. 31. 16:04

[생존자들-한 평범한 이산가족 이야기①]

72년만에 만난 큰오빠
“아빠, 이제 평양에서 제사 음식 맛나게 드세요”

[오마이뉴스] 2014.08.05 15:06 l 최종 업데이트 2014.08.05 15:57 l 정하원(bluewter) 

 

◇ 현재 7만 명 가량 남아있는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혀지기를 십 수년째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이산가족 현상은 상봉행사 때만 피상적으로 잠시 보여지다가 잊혀지기에는 너무 아쉬운 비극이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가족들과 완전히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이미 지난 60년간 대부분이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혀 버렸고, 남쪽에 아직 남아있는 7만 명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살아있는 현재가 아닌 교과서에서만 나오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을,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시대, 남북분단, 6·25 전쟁과 같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 2014년 4월 경북 영주시 안정면에서


 

▲  내줄리. 2014년 4월 3일.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관련사진보기
 

4월 초의 야산은 아직 황량하다. 벌거벗은 소나무 가지 사이를 헤치며 일곱 명의 식구들이 잿빛 산을 총총히 걸어 올라간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사촌 오빠가 앞서 걷고, 중년의 자매 찬수씨와 순조씨가 방금 꺾은 긴 나무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세 사람 한참 앞으로 아직 겨울 점퍼를 입은 순조씨의 남편과 젊은 조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고 있다. 산기슭 동네 내줄리를 출발한 지 20분이다 되도록 다들 별 말이 없다. 소나무 숲 사이로 봉긋하게 솟은 작은 빈터에 두 자매까지 간신히 올라서고 나니 점심 때가 한참 넘었다. 따스한 햇빛 아래 두 자매 아버지의 산소 위 봉분이 깔끔하다. 아직 누런 겨울 잔디로 덮여 있긴 하지만 곧 초록 싹을 틔울 것도 같다.

 

"산소가 깔끔허네… 조카들 이렇게 봐줘서 너무 고맙네…"

찬수씨가 말했다.

순조씨의 아들 승일씨가 싱긋 웃고는 들고 온 비닐 봉투에서 주섬주섬 "백두산들쭉술"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는 노란 술 한 병을 꺼낸다. 종이컵에 노란 술을 가득 따라 봉분 위로 훠이훠이 뿌렸다. 그렇게 몇 잔을 봉분 위의 누런 잔디가 흠뻑 젖을 때까지 뿌리고 또 뿌렸다. 

"그렇게 보고싶어 하던 큰 아들이 보낸 술을 받으시니 저 위에서 아버지가 좋아서 춤을 추시겄어."

순조씨의 남편 형배씨가 말하자 다들 피식 웃으며 절할 채비를 한다. 

"아빠, 이제 우리가 제사 안 지내고 큰 오빠가 한대요. 올해부터는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시요~"

고개를 숙이며 순조씨가 말했다.

 

산소 앞에 엎드린 여섯 명의 등 뒤 저 너머로, 아직 눈에 덮인 소백산 정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시간 내줄리. 큰오빠가 70년을 그리워했던 고향집 마루에 찬수씨와 순조씨의 큰언니인 순옥씨가 우두커니 앉아있다. 한때 큰오빠 무릎에 앉아 꺄하하 웃음을 터뜨리던 여덟살 박이 계집애는 이제 마을 바로 뒷산을 올라가기도 힘이 부치는 80세 할머니가 되었다.

"아버지 이제 한 푸셨겠네…"

 

순옥씨는 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소백산을 마주보고 있는 이름 없는 야산 기슭의 이 고향 마을은 그동안 많이 변했다. 게딱지같던 삼십여 개의 초가집들은 대 여섯 개의 슬레이트 지붕의 입식 집으로 바뀌고, 동네 구석마다 뛰어다니던 어린 아이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노인들만 지키고 있는, 예나 지금이나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산마을이지만 4월마다 활짝 피는 벚꽃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72년 전 오빠가 떠나던 그날도 벚꽃이 이렇게 눈처럼 흩날리는 4월이었다. 오빠가 다시 고향 동네를 볼 수 있을까? 순옥씨는 두 달 전 기억을 떠올렸다.

 

2013년 2월 북한 금강산

 

▲  2013년 2월 25일. 북한 금강산.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부시다. 넓은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노래가 귀에 윙윙 울린다.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진다. 검은 차림을 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오자 곧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진다.

"아이고 형!"
"누님, 누님, 우리 누님!"
"아버지?!"

 

정신없이 서로를 안고 금세 느티나무 뿌리처럼 엉킨 채 운다. 순옥씨는 옆에 앉은 여동생 찬수씨의 팔을 꼭 붙든 채 고개를 빼고 연회장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금세 알아보았다. 순옥씨와 똑같이 하얗고 동실한 얼굴. 실처럼 길고 가느다란 눈. 얇고 가느다란 입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봉 신청서에 붙은 손톱만한 사진 두 개를 번갈아 바라보던 적십자 아가씨들이 하던 말이 맞았다.

"어머 할머니, 똑같네요 똑같아. 볼 것도 없어." 

 

까만 양복에 회색 중절모를 쓴 작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다가와 순옥씨가 있는 9번 테이블 앞에 섰다. 까만 양복이 눈물 너머 흐릿하게 어룽거리는 듯 싶더니 순옥씨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순옥씨는 비척비척 다가온 노인의 팔을 붙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주저앉았다. 

"오빠아. 오빠아."

기억도 흐릿한 큰 오빠다. 여덟 살 이후로 본 적도 없다. 하얗고 해사한 얼굴에 늘 웃는 얼굴. 머리가 좋아서 늘 학교에서 일등을 했다던 우등생. 엄마 아빠의 보물. 동네 사람들이 하나 같이 부러워하던 똑똑하고 잘생긴 큰 아들. 할머니, 엄마, 아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가 평생 전해주던 큰 오빠의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기억이 되었다. 그렇게 순옥씨는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이곳에 나왔다. 

 

큰 오빠를 평생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할머니, 엄마, 아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는 지난 70년간 차례대로 죽었다. 오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들의 얼굴이 같이 떠올랐다. 이곳엔 내가 아니라 그들이 있어야 했다.

"오빠. 오빠. 오빠."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북에서 나온 가족 중 최고령자인 89세 오빠는 어디 몸이 불편한 듯 한쪽 입꼬리가 굳어 있다. 입술을 달싹여 보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눈시울이 빨개지는 듯 싶더니 살짝 검버섯이 난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고향에서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 두 명이 만났다. 70년의 시간 동안 하나하나 하늘로 떠나버린 가족들의 한과 소망을 어깨에 지고.

 

1942년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소백산 험한 산밭을 벗어나 조금만 나가면, 푸른 소나무들이 무성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협곡. 자동차는 고사하고 달구지도 들어갈 수 없어 건조기에나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 따라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곳. 게딱지같은 초가집들 3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김영 김씨 집성촌의 맨 위 산비탈 집이 순옥씨네 집이었다.

할머니, 엄마, 아빠, 열일곱의 큰오빠 수덕, 열세살 둘째 오빠 팔성, 열 살 셋째 오빠 창덕, 여덟 살 순옥. 가진 것이 없었지만 어차피 다들 가난한지라 서러울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작은 초가집이지만 그래도 방이 세 개나 되고, 동네에 많지 않던 디딜방아도 하나 있었고, 마당도 컸다. 봄이면 소작 받은 논에 모를 심고, 밭에는 보리, 수수, 콩, 보리… 이름도 다 기억나지 않을 온갖 잡곡들을 해다 심었다. 여름엔 나무에서 삼을 벗겨 삼베옷을 해 입고, 겨울엔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을 해 입었다. 밤낮 길쌈을 해서 이십 리가 넘는 영주장, 풍기장에 옷감을 내다 팔면 그럭저럭 일곱 식구 입에 풀칠을 할까 말까, 늘 배가 고팠지만 다들 그랬으니 불평할 일도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매일매일 착한 소처럼 묵묵히 일했다. 늘 해가 뜨기 전 새벽녘에 논밭으로 떠났던 부모님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무명옷이 땀과 흙에 물든 채 아침보다 굽어진 듯한 등을 두드리며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곤 했다. 두 사람 다 크게 싸우지도, 크게 웃지도, 집안 어른들 앞에서 맘껏 아이들을 귀여워하지도 못한 묵묵한 촌로였다. 한번은 아직 아기였던 첫째와 텅 빈 집에 홀로 남게 되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아들을 무릎에 폭 앉혔다. 수덕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동그랗게 뜬 눈을 내려다보며 "까꿍!"하며 웃다가, 갑자기 시어머니가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아기를 평상 마루 가운데로 밀쳐두기도 했다.  

 

수덕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 아버지는 똑똑한 장남이 자기처럼 평생 흙만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열한 살이 되던 해, 삼십 리 넘어가야 있는 작은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 근처 순흥 소학교에 다니게 했다. 해주는 것도 없었는데 곧잘 학교에서 일등을 했다. 학교가 쉬는 주말, 삼십 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수덕이 고향 동네로 돌아올 때쯤이면 동네 어귀에서부터 "형! 형!" 을 외치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둘째 팔성은 아버지를 닮아 조용하고 차분했고, 셋째 창덕은 누구를 닮았는지 장난기가 많고 까불까불해서 성격은 천양지차였지만 둘 다 큰 형을 무척 좋아했다.

 

가을이 되어 할아버지가 심어준 뒷뜰 배나무에 첫 물 배가 주렁주렁 달릴 때쯤이면 둘은 침만 꼴깍 삼키며 주말에 큰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행여 누가 배를 따기라도 할라치면 형이 올 때까지 손대지 말아야 한다며 생난리를 치곤 했다. 두 꼬마가 "할머니! 오늘은 형이 집에 왔으니 함께 배를 따먹자요!"하면 할머니가 손수 따준 배를 다들 둘러앉아 먹곤 했다. 가을 햇살에 따뜻하게 달궈진 평상 위에 앉아 배를 씹다보면, 어느새 어린 순옥이 큰오빠의 무릎에 성큼 올라앉아 끈적끈적한 손으로 오빠의 목을 끌어안곤 했다.

 

"오빠! 이제는 가지 말고 우리 함께 살자, 응?"

하고 오빠와 볼을 비비다가 또 그 팔에 매달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 수덕도 싱긋 웃으며 여동생의 헝클어진 땋은 머리 위를 쓰다듬곤 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살자.' 여덟 살 여동생이 무심코 한 그 말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그때 17세의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


[생존자들-한 평범한 이산가족 이야기 ②]

고향을 떠나 원산으로

“이웃에게 빌린 그 돈, 평생 후회로 남았다”
[오마이뉴스] 2014.08.09 20:12 l 최종 업데이트 2014.08.09 20:12 l 정하원(bluewter)

 

1942년 4월 12일,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수덕은 내줄리 마을 어귀의 철쭉나무 앞에 섰다. 옷가지와 노잣돈 6원이 든 괴나리봇짐이 열일곱 살 소년의 삐쩍 마른 등에서 할랑거렸다. 수덕이 경성으로 올라가 고학을 해보겠다고 하니 할머니, 어머니가 몇날 며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들에게 어렵사리 빌린 거금이다.

 

집안의 자랑이던 장손이 소학교를 지나 보통학교까지 1등으로 졸업했지만 학비를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 일은 농사뿐. 그러나 할머니부터 어머니까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난이 등짝에 철썩 붙어 떨어질 날이 없었던 집안에서 공부 잘하는 장손은 유일한 보물이자 희망이었다. 총명한 수덕이는 이 시골에서 우리처럼 썩으면 안 되는 거였다.

 

"니를 공부시켜 주지 못하는 것만 해도 가슴이 아픈데 벌써부터 호미자루를 쥐여주겠나?"

할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이웃들에게 6원을 빌어온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이후 몇 달간 낮이면 이웃들의 밭을 매고 밤이면 이웃들에게 줄 옷감 길쌈을 했다. 그 돈을 마련해준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할머니는 얼굴에 가득한 주름 사이로 흐르는 눈물을 무명 치맛자락으로 꼭꼭 찍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침울하게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고, 남동생 팔성, 창덕과 여동생 순옥만 평소와는 다른 낯선 표정의 형과 부모님을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덕아, 니 부디 꼭 성공하고 돌아오라."

할머니가 말했다.

"늘 건강하고, 꼭 성공해라."

 

노파는 힘줄이 툭 튀어나온 삐쩍 마른 손으로 손자의 부드러운 손을 꽉 그러잡은 채 한참 동안 놓지 않았다. 할머니의 손이 풀어지자 이내 수덕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봄마다 온 동네에 흐드러지는 철쭉꽃의 바다를 돌고 돌아 수덕의 모습은 저 산 아래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는지, 가족들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는지, 가족들이 마을 어귀에서 얼마나 오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1943년, 경성 

 


▲ 1940년대 한국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 군인들 ⓒ Pitori.net 
 

얼마나 맞았을까?

일본말로 외치는 욕설과 고함소리가 귀를 때린다. 여러 개의 군화발이 머리로, 어깨로, 배로, 등으로, 팔로 쉴새없이 우박처럼 쏟아진다. 아까 연속으로 맞은 뺨이 얼얼한 건 느껴지지도 않는다. 옷이 찢어진 것도 같은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군화발을 피하느라 살필 겨를이 없다. 한쪽에서 채인 몸이 저쪽으로 구르면 저쪽에서 또 채여 이쪽으로 구른다. 군화발에 차여 바닥의 흙이 매캐하게 일어난다. 입안에서 흙과 피 맛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다.'

 

수덕이 경성으로 올라온 지 꼬박 일년이 넘었다. 고학으로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고향의 부모님을 호강시키고 싶었는데. 지금 원하는 건 그저 따뜻한 쌀밥 한 그릇. 그리고 매서운 일본 순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뿐이다. 집도 절도 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열일곱 소년이 고학으로 성공한다는 건 세상 모르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 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늘 배가 고팠다. 경성에 올라오자마자 한강 옆 흑석정에 있는 피복공장의 운반공으로 취직했다. 일반 자전거의 두 배 큰 운반용 자전거에 일감과 제품을 가득 싣고 경성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일. 만짐을 지고 고개를 올라갈 때면 앞 바퀴가 허공에 뜨면서 뒤로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고, 내려갈 때는 두발을 뻗치고 제동손잡이를 잡아도 목 뒤에 와 닿는 짐들이 금방이라도 와락 온몸을 덮칠 것 같았다.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철제 자전거를 몰고 종일 흑석정 고개를 수십 번씩 올라갔다 내려 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점심쯤 이미 녹초가 되지만 종일 먹는 건 곰팡이 낀 콩과 보리 한줌을 섞어 끓인 죽, 멀건 소금국 반 그릇. 일당으로 받는 85전을 한 달 내내 모아봐야 월 25원의 하숙비 내기에도 급급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꿈꾸며 배고픔에 멀뚱멀뚱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

 

일본 순사도 잘 찾아오지 않았던 산골짝 고향마을과 화려한 도시 경성은 달랐다. 일제 말, 경성거리마다 흘러 넘쳤던 순사들은 수덕의 허름한 운반 자전거가 대로에서 걸치적거린다 싶으면 득달같이 따귀를 때리고 파출소로 끌고 갔다. 파출소에서 시시덕거리는 순사들 사이를 쉼 없이 오가며 장작도 패주고 물도 길어주며 며칠을 보내면 간신히 풀려나기를 십 수 번. 

 

지금도 그렇다. 일본군 행렬이 다가오는 앞길을 우연히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득달같이 달려온 군인 몇 명에게 돌아가며 따귀를 맞고, 이렇게 군화발로 맞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가고 없다.

"으...."

 

온통 두들겨 맞은 몸을 도저히 금세 일으킬 수가 없다. 흙 바닥에 누워 무심코 쳐다본 하늘은 한없이 청명했다. 고향 내줄리에서 바라보던 파란 하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고향을 떠날 때 할머니가 몇 번이고 당부하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

 

1944년 3월, 경성발 나진행 열차

 


▲ 일제시대 증기기관차 ⓒ 아리랑 문학관 
 

빼액~ 증기기관차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 쌀쌀한 3월이지만 여객칸을 꽉 채운 사람들의 열기로 기차 안은 후텁지근하다. 아까부터 구름색이 뭉근하더니만 이내 부슬비가 추적추적 차창 유리를 때리고 흘러내린다. '뭐 내 마음 같구로...' 수덕은 차창 밖을 우울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지금 경성을 출발해서 고향 반대쪽으로 160km 떨어진, 북쪽의 흥남으로 가고 있다.

아무리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아 고민하던 열 아홉살 수덕에게 직장 동료가 흥남의 화약공장은 벌이가 더 좋을 거라고 조언해 주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자원이 풍부하던 북쪽에는 화약과 군수품 공장이 많았고, 전쟁 와중에 일손은 늘 부족했다.

 

흥남 화약공장에서의 벌이는 예전보다 좋아서 푼돈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일본인 반장들에게 수시로 얻어터지고 동료들도 그렇게 맞는 걸 묵묵히 볼 수밖에 없던 건 고역이었지만. 어쨌든 모은 푼돈으로 고향의 부모님에게 편지도 쓰고 동생들에게 보낼 선물도 샀다. 점잖고 차분한 둘째 동생 팔성이를 위해서는 연필과 공책을 샀고, 극성맞은 장난꾸러기 셋째 동생 창덕이를 위해서는 호루라기를 사서 보냈다.

 

그 후 몇 달간, 조용하던 내줄리 계곡에는 시도 때도 없이 호루라기 소리가 의기양양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놀란 산새들이 나무에서 푸드득 날아오르면 동네 어르신들 몇몇이 얼굴을 찌푸리며 "창덕이 저눔저눔..." 하고 혀를 차시곤 했지만 아무도 아이를 혼내지는 않았다. (* 다음 회에 계속)

 

[생존자들-한 평범한 이산가족 이야기 ③]
큰아들 못 보고 떠난 부모님

“부엉이가 울면 어머니는 잠들지 못했다”
[오마이뉴스] 2014.08.13 14:23 l 최종 2014.08.13 14:23 l 정하원(bluewter)

 

1945년 8월 15일, 흥남 화약 공장
유난히도 후텁지근하던 8월 15일 오전 11시, 공장 휴게실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좁은 휴게실에 앞쪽은 일본 직원들, 뒤쪽은 한국 직원들이 점점 들어차면서 더운 숨과 땀냄새로 숨이 턱턱 막혔다.

"갑자기 왜 여기로 모이라는건데?" "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낮 12시가 되자 휴게실 맨 앞 나무책상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직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뒤쪽에 서 있는 수덕씨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곧 휴게실 앞쪽에서 쿨쩍쿨쩍 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일본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걸어 나갔다.

 

"일본 놈들이 전쟁에서 졌다더라! 무조건 항복했다더라!"

누군가 외쳤다. 복도에서는 일본인 처녀 직원들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현장 사무실에서는 한국인 직원들이 벌써 두두두두 책상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곧 흥남에서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전쟁이 끝나니 한국인 직원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수덕씨가 내줄리를 떠난 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요맘 때면 매미 소리가 요란하던 동네 앞 개울물에 동네 또래 친구들과 발을 담그고 방금 캔 감자를 쪄 먹곤 했는데...

 

그 감자 맛이 그리웠다. 아니,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아직 부족했다. 이렇게 내가 공부도 못하고 돈도 못 번 채 돌아가면? 백여 년이 넘게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호미질밖에 더 하겠나. 나도 나지만 동생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평생 다같이 고된 밭일만 하다가 죽기밖에 더 하고? 평생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호강 시켜 드리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덕씨는 가진 건 똑똑한 머리밖에 없는 가난한 스무 살 청년이었고, 금의환향의 꿈은 아직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그 시절 혈혈단신 시골을 떠나 도시로 상경했던 이 땅의 수많은 똘똘한 장남들처럼, 그도 어떻게든 온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아직은 고향에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지금 이곳 흥남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1951년 가을,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 출격하는 편대 폭격기 ⓒ 미 국방부 한국전쟁 아카이브 
 

왜애애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빨간 별이 날개 양쪽에 그려진 비행기들. 저번처럼 인근 마을에 뭘 떨어뜨리고 가는 게 아닌가 불안하다.

"퍼뜩 안 드가고 뭐하노?!"

아버지가 역정을 내신다.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리던 순옥씨는 아기를 업고 얼른 초가집 안으로 냉큼 들어갔다. 며칠 전에도 산에 파놓은 굴에 온 동네 사람들이 대피했다가 답답해서 하루 만에 다 뛰쳐나왔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싶기도 하다.

 

6·25 사변이 터지고 나서도 내줄리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근처 마을에는 폭탄이 떨어져서 집이 몇 개 무너지고 불탔다는데, 이 산구석에는 부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지 양놈이고 빨갱이고 국군이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다들 '불안하니 피난을 가야 안 하겠나' 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봤지만 한 삼십여 리 좀 나가고 나서 귀찮다며 이틀 만에 때려 치고 죄다 돌아와 버렸다. 먹을 게 부족했지만 어차피 예전부터 심심찮게 배 곯고 살던 시절이라 더 힘들 것도 없었다.

 

인근에 군대가 지나간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은 행여 몰라 계집애들은 다 집에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시곤 했다. 댕기머리의 열 여섯살 순옥씨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늦둥이, 이제 갓 돌이 된 막내 여동생 순조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방에 들어가 빼꼼히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행여 군대 행렬이 인근을 지나간다고 하면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두고 동구 밖까지 나와 그 대열을 지켜보곤 하셨다. 혹시라도 그 속에 큰오빠가 있을까, 흙먼지와 땀에 젖은 얼굴로 터덜터덜 흙길을 지나가는 앳된 군인들의 철모 아래 얼굴을 먼 발치에서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마지막 한 명이 지나가면 그제서야 자리를 뜨곤 하셨다.

 

사변이 터진 이후 큰오빠와의 연락은 끊겼다. 사변이 터지기 석달 전, 3월에 보낸 흥남에서 보낸 편지가 마지막이었다. 남북이 완전히 갈라져 버렸는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없고,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으랴 싶었다. 난리 중이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흥남은 기차 타고 몇 시간이면 가는, 조금 먼 도시에 불과했다. 38선이라는 말도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낯설고 일시적인,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관념, 그냥 단어에 가까웠다. 그 세 글자가 순옥씨 가족을 비롯한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는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이 되기까지는 오랜 체념의 시간이 필요했다.

 

1955년 내줄리

사변이 끝난 후에도 동네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그냥저냥 입에 풀칠은 하고 사는 집안 형편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집안의 식구는 늘어서 순옥씨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생겼다. 둘째 오빠는 결혼해서 올케언니도 들어왔다. 그러나 집안의 가장 빛나던 보석 같은 큰오빠는 없었다. 식구들도 점점 희망을 버렸다. 남과 북은 확연히 갈라지고, 이제는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수덕씨가 집을 떠난 지도 벌써 13년이나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늘 조용하고 말이 없었던 부모님은 말수가 더 없어지셨다. 그러나 매일 밤 어머니는 묵묵히 아들을 기다렸다.

 

순옥씨가 늦둥이 막내 동생을 포대기로 등에 업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까무룩 잠에 빠져들다 보면 옆 사랑방에서 들리는 차르륵 찰탁찰탁, 차르륵 찰탁찰탁 하는 어머니의 베틀 소리. 밤 공기 속 리듬을 타며 자장가처럼 들리는 베틀 소리 너머로 증기기관차 소리가 들린다. 매일 밤 열시에 영주역을 지나가는 청량리발 안동행 증기기관. 혹시라도 큰아들이 그 기차에서 내려 내줄리까지 걸어와 문이라도 왈칵 열까 어머니는 매일 밤 기다리셨다. 산 아래에서 기관차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두 식경은 지나서야 비로소 베틀 소리도 멈추고 사랑방의 호롱불도 꺼지곤 했다.

 

늘 말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장날이면 큰 아들을 종종 찾곤 하셨다. 십여 리는 떨어져 있는 풍기장,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영주장이 끝나고 햇빛이 살풋하게 산 너머로 내려갈 때쯤 되면 노을을 등에 지고 터벅터벅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아른아른했다. 그러면 또 무슨 돈으로 술을 드셨는지 불콰해진 얼굴로 마당에 들어오셔서는, 어머니에게 생전 안 하던 큰소리를 치곤 하셨다.

 

"자네가 그때 그 차비를 해주는 바람에..."
"우리 장손을 내쫓은 거 아이가!"
"그래서 나가 죽을 때까지 못 보고 죽는 거 아이가!"

 

그렇게 본인도 익숙하지도 않은 큰소리를 몇 번 외치고는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저녁 내내 나오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끄응' 하고는 자리를 뜨셨지만 화를 내지 않으셨다. 어쩌면 어머니도 똑같은 후회를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의 길쌈 소리는 더욱 늦게까지 들리곤 했다. 기관차 소리가 영주역을 지나가고 두 식경이 한참 지나도록 사랑방의 호롱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그렇게 순옥씨의 큰 오빠는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유령처럼 가족들의 기억 속을 맴돌았다. 마치 열 손가락 중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간 것처럼, 그러나 잘려나간 사지가 아직도 거기 존재하는 양 여전히 간지럽고 아프다고 느끼는 환상통처럼. 가족들에게 큰오빠는, 존재는 없어졌지만 통증으로만 여전히 남은 손가락이 되었다.

명절이면 통증은 조금 더 커지곤 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 덕에 명절이면 집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손님들이 돌아간 명절날, 보름달 아래 산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그런 밤은 유난히도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영주역에서 들리는 기관차 소리에도 더 들떠 보였고, 집 뜨락 바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내다보시다가도 이내 멍하니 밤하늘의 달로 시선을 돌리곤 하셨다.

 

요새같이 좋은 시절이 아닌지라 보면서 그리워할 사진 한 장이 없었다. 보고 싶어도 머리 속에서 그려 볼 뿐, 기억 속의 얼굴이 흐려지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밤 하늘의 보름달만 멍하니 바라보셨다.  그렇게 그리움만 안고 아버지는 1959년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아들을 보기 전엔 절대 눈을 못 감는다고 하시던 어머니도 6년 후 결국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하나 하나 내줄리를 떠났다. 둘째 팔성씨만 남아 고향집을 지키고, 나머지는 부산, 서울, 대구로 직업을 찾아, 결혼을 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순옥씨는 결혼을 해서 인근 안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오빠의 기억은 점점 흐려져 가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다음 회에 계속]


[생존자들-한 평범한 이산가족 이야기 ④]

"아이고 오빠, 다 돌아가셨어요"

주님과 장군님 오간 상봉장... "그래도 다행이다"
[오마이뉴스] 2014.08.23 18:20 l 최종 업데이트 2014.08.23 18:20 l 정하원(bluewter)


1970년 평양시

작은 아파트 창 밖으로 보이는 추석 보름달이 둥실하다. 벌써 45세가 된 수덕은 몇십 년째 가족들 없이 보내는 명절이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세월이 지날수록 가슴은 더 쓸쓸하기만 하다. 고향의 가족들과 헤어진 지 거의 30년이 됐다. 할머니, 엄마, 아빠, 동생들의 얼굴조차 이제는 가물거린다. 만날 수 없다는 것보다 이제는 기억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더 서글픈 나이가 되어 버렸다. 왜 이렇게 됐는지, 왜 다시 만날 수 없는지 묻는 것도 이제 지겨울 만큼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버렸다.

 

그동안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광복 이후 공산당에도 가입했고 당에서 보내주는 학교에서 공부도 했다. 똑똑했던 수덕씨는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 농업성의 농업 담당 공무원이 되었다. 참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아들 하나, 딸 넷도 낳았다. 평양에 작은 아파트도 생겼다. 어릴 적 내줄리를 떠나 곰팡이 낀 콩과 소금국으로 연명하던 17세 소년이 원하던 꿈 그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수덕씨 곁에는 꿈을 이룬 그를 자랑스럽게 바라봐 줄 부모님도, 동생들도 없다.

 

어린 아이들이 추석 때 "아빠, 우리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요? 명절에는 왜 아무것도 안 해? 삼촌과 고모는 어디 있어?"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늘을 올라다 보며 "저 보름달 안에 있단다..." 하고 씁쓸하게 말하곤 했다. 만날 거라는 희망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점점 빛이 바래갔다. '어쩌면 전쟁 중에 다 죽었는지도 모르지. 꿈에 그리는 내줄리 고향도 전쟁통에 폭격을 맞아 다 없어졌을 수도 있어.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마 다 돌아가셨겠지.' 가슴 속 체념의 무게는 납처럼 무거웠다. 부모님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기일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수덕씨의 소원은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제삿날을 알게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  김수덕 할아버지 (중앙) 이 남쪽의 가족들에게 보낸 가족사진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2001년 영주시 안정면

큰오빠가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내줄리 고향집은 그대로였다. 사라진 큰형을 대신해 장남이 된 팔성씨는 다른 집들이 슬레이트 개량집으로 바뀌어도 고집스레 옛 모습 그대로 남겨놓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 큰 형이 돌아오면 금세 알아볼 수 있게... 순옥씨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여섯 낳는 동안 고향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부산으로 흩어진 가족들은 명절마다 내줄리로 돌아왔다. 가끔 큰오빠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었다.

 

2001년 봄, 갑자기 적십자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집으로 날아온 하얀 편지 한 장과 난초 화환, 가족사진 한 장. 수덕씨였다. 분단 후 최초로 이루어진 이산가족 서신교환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내려 온 300통의 편지 중 하나였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아"로 시작하는 수덕씨의 편지. 나는 잘 있다고, 동생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둘째 팔성씨부터 다섯째 막내 순조씨까지 돌아가며 종이가 누레지고 구석이 닳아 접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자리에 새 살이 돋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갑자기 살아온 수덕씨를 만나는 것은 온 가족의 숙원이 되었다. 당장 둘째 팔성 오빠를 대표로 이산가족 신청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금방 만나게 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 후 13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열 여섯 번의 상봉행사가 열리는 동안 가족들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순옥씨가 어두운 거실에 앉아 멍하니 TV 뉴스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껴안고 흐느끼는 이산가족의 얼굴 속에서 할머니, 엄마, 아빠, 큰오빠가 보였다. 결국 팔성씨는 형을 보지 못하고 2007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상봉의 책임은 셋째 창덕씨에게로 내려왔다. 형이 사 줬던 호루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던 장난꾸러기 열두 살 소년은 이제 70대 노인이 됐다. 이북의 형님을 만나겠다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모아 매달 은행에 저금하곤 했는데, 결국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창덕씨도 2011년에 죽었다. 장손 손자를 그렇게 귀여워 했던 음식 솜씨 좋으신 할머니도, 장날만 되면 술에 취해 큰아들을 찾았던 아버지도, 밤마다 속절없이 베틀 앞에 앉아 영주행 기차 소리만 기다렸던 어머니도, 평생 형을 대신해 맏아들 노릇을 했던 둘째 오빠도, 어린 시절 형이 사준 호루라기를 평생 기억했던 셋째 오빠도 다 죽었다.

 

남은 건 이제 가물가물한 첫째 오빠의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78살 막내 여동생뿐이었다. 그리고 2013년 9월, 13년을 기다린 전화 한 통. 70년을 거쳐,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쳐 둘째 오빠, 이어서 셋째 오빠, 그리고 첫째 오빠를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인 첫째 딸에게로 흘러온 온 가족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2014년 2월 금강산...

"그래도 다행이야"

"오빠, 오빠."

순옥씨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어 오빠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오빠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나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팔성이랑 창덕이는?" 

 

오빠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팔성오빠는 돌아가신 지 한참 됐고 셋째 오빠는 제사 두 번 지냈어요..."

순옥씨가 말하자, 오빠는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한 오촌 당숙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아이고 오빠, 다 돌아가셨어요..."

둘 다 말끝을 흐린 채 손만 어루만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2014년 2월 금강산 이산가족상봉에서의 수덕씨 (가운데) 와 순옥씨(왼쪽)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오빠는 주머니에서 볼펜과 작은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초가집, 할아버지가 뒤뜰에 심어 주셨던 배나무, 앵두나무, 어머니가 밤마다 하염없이 베틀을 돌리던 사랑방, 가을이면 아버지가 곡식을 찧던 마당의 디딜방아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렸다. 혹여 기억이 날아갈세라 지난 70년 동안 방안에서 정성스레 그려왔던 것처럼.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115살이시고, 어머니는 113살이셨을 건데..."

오빠가 나직하게 말하자 세 자매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랬었나?' 거의 50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은 순옥씨와 두 동생에게는 흐려져 가는 과거의 기억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했고,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산소는 본 적도 없고, 제사 한 번 드려 보지 못한 오빠에게 부모님의 존재는 아직도 매일 복기하는 간절한 '현재'였다. 그에게는 70년의 한을 풀 최소한의 끝맺음이 필요했다. 

"종이를 가져와라. 부모님 기일을 적어놔야지."

 

오빠가 말했다. 순옥씨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인 10월 초 닷샛날, 4월 3일을 꾹꾹 눌러 적었다. 오빠는 종이를 양복 주머니 속에 천천히 깊숙이 찔러 넣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평생 소원을 풀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70년간 꿈꿔왔던 만남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한 80대 노부부는 60년 만에 만났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 앞만 바라본 채 어색한 침묵만 이어갔다. 남쪽에서 같이 나온 아들이 어색하게 "서로 이야기를 하셔야죠" 했지만 긴 시간의 수많은 사연을 나누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음을 아는지 서로의 눈은 다른 곳만 응시할 뿐 말이 없다.

 

몇몇 북에서 온 가족들은 '위대한 당과 장군님의 업적'에 대해 쉼없이 이야기했다. "위대한 장군님이 인민들 속에 들어가서 험한 길을 가고 있는데...그걸 몰라서야 되겠나"라고 한 여자가 소리치자 남쪽 가족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입으로만 웃었다. 남쪽에서 나온 한 여자는 북에서 나온 조카를 붙잡고 "인간은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몇 십여 년을 충실한 당원으로 살아온 수덕씨와 매주 일요일 교회 예배를 빠지지 않는 순옥씨는 서로 손을 그러잡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도 쉴새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어색하게 침묵을 지키는 가족들, 당의 업적과 주님의 은혜를 외치는 이들, 분주히 오가며 접시를 나르는 젊은 북한 종업원들,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 살피는 기자들, 테이블 사이를 그림자처럼 조용히 오가는 검은 양복의 북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의 마음은 1942년 영주 내줄리에 가있었다. 

 

두 시간의 상봉이 끝나고 순옥씨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오빠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 2001년부터 다시 만나는 꿈을 수 없이 꿨다. 지금도 꿈은 아니겠지.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갑자기 화장실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열려 있는 화장실 빈 칸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중년 여자 한 명이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께를 연신 주먹으로 치고 있다.

 

"오지 말 걸 그랬어..."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가족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고 변해 있었단다. 60년 전의 해사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한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얇은 한복 아래 검게 탄 손마디가 툭툭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만나지 말 걸 그랬어..."

 

눈물에 젖은 뺨을 연신 손으로 훔치는 여자를 한참 바라보다 순옥씨는 조용히 화장실을 떠났다. 그날 밤, 순옥씨는 호텔방 침대에 옆으로 누워 어두운 창문 너머 쌓인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로 양 쪽으로 사람 키만큼 쌓인 눈 위로 또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있다. 문득 순옥씨는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그래도 다행이야..."

순옥씨는 이내 혼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회에 계속]


[생존자들-한 평범한 이산가족 이야기 ⑤]
이산가족 상봉 마지막 1시간

“이산가족 상봉장, 누구도 꺼내지 못한 그 말”

14.08.31 10:15l최종 업데이트 14.08.31 10:15l정하원(bluewter

2014년 2월 북한 금강산

이틀에 걸친 10시간의 만남. 할머니, 엄마, 아빠, 두 오빠를 거쳐 순옥씨에게로 내려온 수 많은 사연들을 풀어 놓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90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수덕씨 가슴에 쌓여온 한을 풀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

"어떻게 지냈어?"

 

이 한마디로 길고 긴 70년의 한 서린 사연을 서로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두 사람 다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수백, 수천 개의 질문은 조용히 묻은 채, "고모들이 평양에 오시면 후하게 대접하겠다"는 수덕씨 아들의 너스레를 들으며 웃고,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식을 떠먹여주고 서로 미소를 지었다. 절망과 한탄으로 보내기엔 주어진 10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리고 2월 25일 9시, 마지막 1시간의 만남. 둥근 테이블 앞에 앉은 수덕씨는 아들이 가져온 종이가방에서 종이묶음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나중에 읽어 봐라."

 


▲ 수덕씨가 남긴 에세이 ⓒ 정하원

 

순옥씨는 36장의 종이묶음을 손가락으로 차라락 넘겨본다. 단풍이 만개한 사진이 붙어 있는 맨 앞장에 오빠의 호적상 이름인 "김휘영"과 "동생들과 자식들에게"라고 쓰여 있다. 첫 페이지 "오늘은 2011년 추석날이다"로 시작되는 오빠의 글.

"아마 지금쯤이면 저 멀리 남녘땅, 내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과 조카애들도 조상의 묘소를 찾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집안의 장손이라고 떠받들려 자란 나는 부모님 생전에 술 한 잔, 밥 한 그릇 대접은커녕 묘소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이 가슴이 미어지는 상 싶다."

 

"이제는 나이 탓인지 기억력도 낮아지고 혀가 굳어져 말을 잘 번지기가 힘들어 지나온 한 생을 돌이켜 보며 자식들에게 훗날이라도 친지들을 서로 잊지 말라고 변변치 못한 글을 여기에 몇 자 적어 놓는다."

가족의 기억, 고향의 기억이 사라질까 두려워 빼곡히 적어놓은 오빠의 90년 삶이 이 안에 있다. 순옥씨는 책자 맨 뒤에 붙어있는 수덕씨의 젊은 시절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수덕씨 얼굴 옆 배경에는 '고향의 봄' 가사가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윽고 "북측 가족들 일어나셔서 밖에 있는 차량에 탑승하십시오"고 안내방송이 나오자 테이블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높아진다. 오빠는 천천히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다.

 

"…우리는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나직이 말하는 수덕씨의 눈이 온통 새빨갛다. 순옥씨가 눈가에 가져댄 손수건은 흠뻑 젖어 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볼 날을 기다리며 우리 웃고 살자."

오빠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세 여동생의 손을 일일이 꼭 잡아본다. 그리고 천천히 호텔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호텔 앞길에 쌓인 하얀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막내 순조씨는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다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말이 가족이지 사실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이라 자기를 반겨줄까, 상봉에 나오기 전에는 내심 뻘쭘했었다. "난 안 갈 거야, 오빠가 '저 사람은 누군고?'하면 어떡해?"하고 농을 하곤 했는데, 그런 막내가 막 버스에 오르려는 오빠의 손을 마지막으로 끌어당긴다.

"오빠, 100살까지 문제 없어. 걱정하지 마."

당부인지 바람인지 모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 2014년 2월 25일. 마지막으로 손을 잡는 수덕씨와 순옥씨.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북한 가족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가족들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남한 가족들은 너도나도 버스 옆에 매달려 창을 향해 손을 한껏 내뻗는다. 수덕씨가 버스 창가에 앉자마자 순옥씨도 팔을 한껏 뻗어 오빠의 손을 잡는다.

"오빠, 다음에 만날 때까지 꼭 살아있어야 돼."

오빠는 잘 움직이지 않는 왼쪽 입술을 씰룩쌜룩 움직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창 너머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오빠의 입술이 "울지 마라…"하고 말하는 것 같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빠의 힘없는 손은 이내 순옥씨의 손을 놓친다.

 

검은 구름 덩어리처럼 버스를 둘러싸고 통곡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족의 손을 기어이 놓친 백발의 할아버지가 하늘을 바라보며 "이건 정말 아니지!"하고 고함을 지른다. 버스가 점점 속도를 내고 시야에서 사라져 가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눈 쌓인 계곡에 울려 퍼진다. 두 동생의 부축을 받고 휘청거리며 서 있는 순옥씨 눈에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버스 뒤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본다.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적시고, 그녀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본다. 안녕. 우리는 웃으며 헤어지자.

 

2014년 4월 경북 영주

순옥씨와 두 자매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TV와 뉴스를 본 지인들에게서 쏟아지던 전화도 이제는 좀 잠잠해졌다. 북한 땅을 밟았다고 궁금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금강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오빠와의 시간이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 오빠는 더 이상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령이 아니다.

 

서울 종로 광장시장 한 귀퉁이의 의상실. 주인 순조씨는 옷감이 널려 있는 옷 가게 구석의 소파에 걸터앉아 오빠의 책을 또 펴 본다. 10부를 복사해서 가족들끼리 나눠 가진 이 책을 막내 순조씨는 수없이 읽어보았다. 평생 본 적도 없고 추억 하나도 없는지라 가족이랍시고 만나기도 뻘쭘했던 큰오빠인데, 이제는 큰언니 순옥씨가 어떤 마음으로 70년을 기다렸는지 알 것도 같다.

 

"내 나이 팔십이 훨씬 넘어 이제는 구십 살의 문턱에 있다. 흘러간 세월과 더불어 지나온 한 생을 돌이켜보며 형제들과 만나 하고 싶은 많고 많은 사연의 이야기. 한마디도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내 대에 형제들을 만나지 못하면, 나를 대신하여 자손들이라도 남남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이 늙은이의 소망을 담아 몇 자 남긴다."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화통화라도 됐으면 좋겠는데…" 순조씨는 페이지를 넘기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 수덕씨가 남긴 글을 읽는 순옥씨 ⓒ 정하원

 

며칠 후 경북 영주, 순옥씨도 집에 홀로 앉아 똑같은 책을 펴본다. 노안 탓에 글이 잘 들어오지 않지만, 안경을 쓰고 몇 자 힘겹게 읽어 내려가 본다.

"…죽어서도 고향에 가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네 어머니와 같이 있도록 하였다가, 조국이 통일되면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묻힌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눈이 점점 어두워져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덮고 오빠의 사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사진 속 오빠의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수덕씨와 순옥씨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만일 순옥씨가 죽으면 둘째 찬수씨가, 둘째가 죽으면 막내 순조씨가 이 가족의 소망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막내 순조씨도 가고 나면? 그들의 자식들이 이 아픔을 이해할까? 얼굴도 본 적 없고 공유하는 추억 하나 없는 자식들의 북한의 사촌들과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순옥씨의 대학생 손녀, 중학생 손자가 그럴 수 있을까? 잘린 손가락의 환상통 같은 그 그리움을 그 아이들이 이해할까?

 

상실의 기억이 없는 아이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유령처럼 홀연히 찾아와 잘려나간 손마디 끝을 꾹꾹 쑤시는 그 통증을 그 아이들이 이해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순옥씨의 세대는 이렇게 소리 없이 저물고 전쟁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의 숙원을 이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해맑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수덕씨와 순옥씨가 가졌던 한 맺힌 간절함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가슴이 문득 답답하다. 영차, 순옥씨는 몸을 일으켜 집 현관문을 연다. 4월 중순의 햇살이 눈부시게 따스하다. 꼭 요맘때쯤이었다. 72년 전 오빠가 고향을 떠난 것이. 오빠는 70년간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아직도 보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상봉 만남에서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씁쓸한 현실을, 아마 오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초록색 철제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돌담 옆 흰 매화와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담장 앞 장꽃도 진홍색 꽃을 터뜨렸지만 담장 너머, 마을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소백산 정상은 아직도 하얗게 눈에 덮여 있다.

"언제나 저 눈이 녹으려는가..."

순옥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백산을 바라보다 집 앞 길을 천천히 건너 담장 하나 없이 환히 열려있는 안정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휘휘 걸어 들어갔다. 햇살이 쏟아지는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산책 삼아 천천히 걷는다.

 

수업이 끝났는지, 8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학생들 한 무리가 앞다투어 학교 건물을 뛰쳐나온다. 지저귀는 새처럼 까르르 대는 아이들이 할머니 옆을 뜀박질쳐 지나간다. 순옥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4월의 눈부신 햇살이 순옥씨의 하얀 머리와 아이들의 동그랗고 까만 정수리 위에서 반짝거린다.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정상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저기 쌓인 저 눈도 이제 곧 녹을 것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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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