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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

[불교가요] '輪廻의 수레바퀴' - 정강스님 노래

잠용(潛蓉) 2015. 1. 24. 20:49

 



'輪廻의 수레바퀴' / 정강스님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영원한 實體는 없~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영원한 나의 것도 없네.


因緣 따라 모였다가

인연 따라 헤어지는 것
세상 만사 空한 것을

어허, 이제 나는 알았네 ) (두번)

 

 ( 輪廻의 수레바퀴

끝이 없이 돌고 돌아라
六道輪廻 수레바퀴

끝이 없이 돌고 돌아라 ) (반복)

 

 

 


"업(業)과 윤회(輪廻) "

 

 

◇ 불교의 연기법과 업보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지혜로운 자는 이와 같은 참된 이치로 업을 본다. 지혜로운 자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로서, 업과 그 과보(果報)를 잘 안다”라는 경구이다. 불교의 중심 가르침인 연기를 보는 자는 바로 업보를 아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 업을 설하고 있는 유명한 경전은 부처님께 인생사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인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떠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는 지위가 낮고 높기도 합니까? 왜 사람들 가운데는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병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모습이 추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까? 그리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하고, 천하기도 하고 귀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합니까?"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업’ 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경전 전체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다른 경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거나 또는 되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업으로 바라문이 되지 않기도 한다.” 또는 “업으로 인해 농부가 되고, 업으로 인해 수공업자가 되고, 업으로 인해 장사꾼이 되고, 업으로 인해 하인이 되기도 한다. 업으로 인해 도둑이 되고, 업으로 인해 무사가 되기도 하고, 업으로 인해 사제가 되고, 업으로 인해 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업은 마치 세상사와 인생사의 수레바퀴 핀과 같다는 비유로 “세상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도 업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들이 업에 매어 사는 것은 마치 수레가 바퀴 축의 고정핀에 매어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업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업보설은 세상사와 인간사를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의 문제로 보는 것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업보설의 입각점이다. 달리 말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사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새롭고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업설(kammavāda, 業說)은 합리적인 ‘인간의 행위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흔히 업을 사주팔자와 같은 어떤 운명적인 법칙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처음 의도했던 업에 대한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히려 이러한 오해를 염려하시고 부처님은 업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意圖:cetanā)를 업이라고 언명한다. 누구든 의도가 일어나면 신구의(身口意)에 의해 업을 짓는다.” 이 경구는 불교적 정의의 업설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여기서 업에 대한 설명어로 사용된 의도 즉 "cetana"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긴 ‘의도’를 뜻하여 영어로는 intention, volition, will, active thought, determinate thought 등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업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다. 뜻하는 바는 행위이되 의지가 개입된 행위, 다시 말해 "의도가 개입된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행위는 가치있는 행위로서 결과[報]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때문에 업은 항상 보(報)와 함께 이야기 되며 선악(善惡)과 같은 가치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와 같이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언급된다. 이러한 점에서 업설을 굳이 정의하자면 신의설(神意說)이나 운명설(運命說) 그리고 우연설(遇然說)과는 전혀 다른, 자기자신의 ‘의지설(意志說)’로 이름할 수 있다. 그래야만 자신의 업보(業報)가 공정하게 성립된다. [조준호/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