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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명시감상] '청노루' - 박 목월(朴木月) 작시

잠용(潛蓉) 2015. 2. 1. 22:47

 


'청 노 루'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청록집>(1946. 6.)에서 - 



(음악/ Spring Breeze(봄바람)/ Kenny G)



◇ 자작시 해설- 박목월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내가 희구한 것은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맑은 눈”이었다. 나이 50이 가까운 지금에는 나의 안정(眼睛)에도 안개가 서리고, 흐릿한 핏발이 물들어 있지만 젊을 때는 그래도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눈으로 님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사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심정으로 젊음을 깨끗이 불사른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 심정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을 그리게 하였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청노루’가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었다. 물론 푸른빛 노루는 없다. 노루라면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털빛을 가진 동물이지만, 나는 그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다시 말하자면 동물적인 빛깔에 푸른빛을 주어서 정신화된 노루를 상상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리목 속잎이 피는 계절이 되면 노루도 ‘서정적인 동물’이 될 것만 같았다.

또 청운사나 자하산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느 해설서에 “경주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을 보았지만 이것은 해설자가 어림잡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기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가 창작한 산명이다. 나는 그 무렵에 나대로의 지도를 가졌다. 그 어둡고 불길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강원도를 혹은 태백산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내가 은신할 수 있는 한 치의 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태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라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 박목월 지음 <보라빛 소묘> 중에서.

◇ 박목월 약력 (朴木月 1916.1.6~1978.3.24)

 

 

본명은 영종(泳鍾). 경북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 중학교 재학 중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 협회 회장이 되었다.

시집으로는 합동시집인 <청록집>(1946)을 비롯해서 <산도화>(1955), <난(蘭)?기타(其他)>(1959),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구름에 달 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등이 있다. 1953년 홍익(弘益)대학 조교수, 1961년 한양(漢陽)대학 부교수, 1963년 교수가 되었다.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에 선임되었고, 1968년 한국시인협희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이 되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수상경력은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고, 시집에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시》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