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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명시감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 이상화 작시

잠용(潛蓉) 2015. 2. 6. 16:42

 


(MV 봄이 오는 소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이상화 (李相和 1901~1943, 대구출신)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넘의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곱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램이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데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것네.

(1926년 개벽지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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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신령이 지피다; 봄 신명이 나다, 흥이 나다,

'봄 신령'은 신명과 같이 쓰인다. 


[출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지에서 잠용

 

 


(사진 보리밭: 네모의 사랑만들기)

 


감상/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의 의미

 

이 작품의 서정적 자아는 봄이 찾아들기 직전의 들판을 거니는 한 사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와 어조가 이런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봄의 들판에 서서 시적 자아가 가장 처음으로 제기하는 것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의구심이다. 이 때의 봄이 계절적인 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계절적인 봄을 말한다면 그런 의문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서정적 자아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욕구 또는 의지를 가진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시적 자아는 들판을 걸어간다. 시적 자아의 눈에 비치는 들판의 모습은 전통적인 삶의 터전이요 가장 한국적인 요소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들에 대한 시적 자아의 극진한 애정 또한 느낄 수가 있다. 이 땅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기에, 아름다운 들판을 걸어가면서 자기가 현재 '빼앗긴 들'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환기하게 된다. 그는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자기의 영혼을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내닫는 내 혼'이라고 자조섞인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이 고백은 실제가 시적 자아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시점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인한 혼돈의 표현일 것이다.

 

그 혼돈에 휩싸여 그는 계속 이 들판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봄신명이 지폈다 보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들놀이' 끝에서 시적 자아는 시의 첫 부분에서 제기한 답을 스스로 구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가 그것이다. '빼앗기겠네'라고 하는 것은 '빼앗긴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을 동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표현은 '지금은'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앞으로는 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봄을 빼앗기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포함하고 있다. 즉 '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시적 자아는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olivier21 / 2006.04.27]


문화산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영남일보] 2014-06-06 ㅣ 인터넷뉴스팀 기자

 

젊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나는 40여년 전 자식들 교육문제로 대구로 나왔다. 아내는 고향인 성주와 가까운 지금의 ‘다사’나 ‘성서’에서 살자고 했지만, 나는 범어네거리 주변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범어네거리 근처에는 정미소가 있었고, 수성들판은 대부분 농토였다. 광활한 수성들판을 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희열감을 느꼈다.

 

들녘에 파릇한 싹이 돋아, 수확기가 되어 넘실거리는 물결을 이루기까지 수성들은 사시사철 늘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특히 범어네거리 근처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존경하는 이상화 선생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등장하는 들녘의 모티브가 된 곳이 바로 수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매일 집에서 수성못까지 수성들을 걸으며 상화의 시를 암송했다. 수성들이 연출하는 경이로운 풍경을 보면서, 상화의 시혼을 느끼는 것은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주택개발의 바람이 불면서 수성들은 빌딩과 주택으로 채워졌고, 자연히 나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몇 년 전 나는 신문에서 수성못둑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비가 세워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주택가가 된 옛날의 그 수성들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상화의 시비를 보고 말겠다는 욕심이 나의 심장을 마치 거선의 기관처럼 뛰게 한 것이다. 드디어 수성못에 도착했는데 수성관광호텔과 마주보는 못둑에 집채만 한 바위가 놓여있었다. 청옥빛 수성못물을 내려다보며 우리 민족의 혼이 힘차게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은 마침 바람이 불어서 수성못 물은 계단물결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나의 시흥도 늙은 가슴에서 붉게 뜨겁게 불타올랐다.

 

지난 5일, 상화고택에서 민족시인 상화의 시혼과 민족정신을 기념하는 ‘상화문학제’가 열렸다. 지역의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화가 남긴 주옥같은 시를 낭송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이상화 시인상’ 시상식도 함께 가졌다. 이처럼 상화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사들이 대구에서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화의 흔적을 찾아 대구로 몰려온다면 정말 흐뭇할 것이다. [배철 수필가]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의 생애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 夢幻病>(개벽, 1925)·<비음 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시낭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