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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광복 70주년] 우표에서도 홀대받는 '독립운동가'

잠용(潛蓉) 2015. 8. 14. 18:51

[광복 70년] GS 동화약품 효성 가문, 독립운동 조력자로 활동

'독립운동 자금줄'이던 이 기업들, 지금은?

머니투데이ㅣ김지산 기자 | 2015.08.13 11:31

 

↑ 경남 진주시 승산마을 허만정 옹 생가에 있는 '금강산'/사진=머니투데이DB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는 '금강산'이라는 이름의 돌더미가 쌓여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할아버지 효주(曉州) 허만정 선생이 곤궁한 소작농과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줄 때 인근 방어산에서 돌을 가져오게 해 마당에 쌓게 했는데 작은 돌산이 됐다. 그는 '재화를 얻을 때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노동의 가치를 일깨워주려 했다. 효주는 허투로 돈을 쓰는 법이 없었다. 독립운동 자금도 그렇게 나왔다. 진주 만석꾼이던 그는 은밀히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는가 하면 독립과 '민족 부흥'의 원천은 교육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진주여고를 지었다.

 

허만정의 아버지 지신정(止愼亭) 허준은 경주 최부자, 백산 안희제 등과 공동 출자해 만주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백산상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의로운 데 부를 아끼지 않았던 허씨 일가의 이타적 DNA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크고 작은 기부활동에 소리 없이 참여해 2008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는 허 회장을 '아시아를 대표하는 이타주의자 4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 임시정부 조직을 위해 작성 배포한 국민대회선포문.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 동화약품 전 사장이 참여했다./사진제공=동화약품


독립운동사를 얘기할 때 '까스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을 빼놓을 수 없다. 활명수는 상품 종류를 막론하고 한국기네스가 인증한 국내 최고(最古) 브랜드다. 118년 역사의 까스 활명수는 1897년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개발했다. 그는 궁중 의학에 조선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으로부터 얻은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소화제 활명수를 만들었다. 급체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침술과 탕약에만 의존했던 당시 활명수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920년대 활명수는 설렁탕 두 그릇 값인 50전에 팔렸다. 비싸게 팔아 남긴 마진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갔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동화약품 본사인 '서울연통부'는 상하이 임시정부 연락책이었다.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에 연루돼 두 차례 옥고 끝에 48세에 숨을 거뒀다. 1960년대 탄산을 주입하면서 오늘날 '부채표 까스 활명수'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효성은 중국 저장성 자싱시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 보존과 임시정부 기념활동 지원을 위해 2007년 지원금을 전달했다./사진제공=효성

 

경남 함안 출신인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열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학교)에 입학, 스무살인 1926년 순종황제가 의문을 죽음을 맞자 '6·10'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로 인해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주일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조홍제 창업주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아들인 조석래 회장을 무릎에 앉히고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에 맞춘 애국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효성 창업주의 독립운동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효성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이 3년6개월간 피난처로 사용하던 중국 저장성 자싱시 가옥을 보존하기 위해 2007년 자싱시에 지원금을 전달했다. 2013년부터는 6·25 참전 국가유공자들의 집을 수리해주는 '나라사랑 보금자리'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추모식에 대통령 헌화 안하는 이유는?
머니투데이 | 박용규 기자  | 입력 2015.08.14. 10:03

 

손인춘, '훈장 등급 재심사 제도' 도입 법안 발의

1919년 3.1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 열사의 추모식에는 대통령이 헌화하지 않는다. 1962년 유관순 열사에게 주어진 훈장(건국훈장 독립장)이 대통령 헌화를 받을수 있는 등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의 훈장 등급이 낮아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현행 상훈법에는 재심사 규정이 없어 이마저도 안되는 상황이다. 지난 10일 손인춘 새누리당 의원은 상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역사적 평가가 현저하게 바뀐 서훈자들에 대한 재심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유관순 열사처럼 과소평가 됐거나 과대 평가된 경우를 바로 잡게 하자는 취지다.

 

↑ 29일 오후 충남 천안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3.1운동을 기리는 `제30회 3.1절 기념 봉화제'가 열렸다.

 

개정안의 주요내용은 훈장 또는 포장을 받은 사람의 해당 공적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현저히 달라진 경우에 훈격의 종류 및 해당 훈격에서의 등급 조정을 할 수 있는 조항을 신설했다. 훈격조정은 중앙부처에서 요청하고 국무회의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하는 방식이다. 손 의원실 관계자는 "유관순 열사 추모식을 위해 대통령 헌화를 요청했으나, 훈장 등급상 받을 수 없고 재심사 규정도 없다는 보훈처 답변에 해당 법안을 준비했다"면서 "1962년에 정해진 기준으로 주어진 훈장인데 세월이 많이 지나 역사적 평가가 바뀐 경우에는 훈격조정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법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손 의원실의 해당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 결정 이유와 훈격상승을 위한 재심사 가능성에 대한 서면질의를 했다. 당시 보훈처가 제출한 서면답변서에서 "1962년 독립유공자 포상 당시 독립운동의 기여도와 희생도에 따라 결정됐으며 한번 정해진 서훈은 재심사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재심사 제도 도입외에도 개정안 발의의 촉매가 된 서훈기준도 논란이다. 상훈법 3조의 서훈 기준은 서훈대상자의 공적내용과 국가사회에 미친 효과의 정도 및 지위 등을 참작하여 결정한다"고만 규정돼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가 내놓은 공식적인 기준은 독립운동 활동 기간이나 옥고를 치른 기간이다. 활동 또는 수형 기간이 8년이상이 돼야 건국훈장 1~3등급 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보훈처는 독립운동이 국내외 각지에서 다양하게 전개돼 기간외 세부적인 기준을 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훈처가 활동기간 등의 기준은 대략적인 일반기준이며 활동내용이 다른 개별공적을 수평적으로 단순 비교할 수는 없고 같은 옥고기간이라도 활동성격, 의의 등에 따라 훈격에 차등이 생길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박용규 기자 ykpark@mt.co.kr]

 

[광복 70주년 맞아 국내 우표 3058종 분석]
우표 세상서도 홀대받는 독립운동가

[한국일보] 2015.08.12 05:17 수정: 2015.08.12 10:53

 

해방 이후 등장인물 8명, 총 17종 불과
김구 4종 최다… 안중근ㆍ이준 각각 3종
전두환 30종ㆍ박정희 23종에 비해 초라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암살'이 최근 흥행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우리 현대사는 항일 투쟁 중 최후를 맞거나 살아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그의 후손들을 외면해 왔다.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하고 있어 동시대의 사실적인 자료로 인정받는다’는 우표의 소재로서도 독립운동가들은 홀대를 받았다.

 

본보 멀티미디어부가 우정사업본부의 ‘한국우표포털서비스(K-stamp)’에서 제공되는 국내 발행 우표 3,058종을 일일이 살펴봤더니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우표는 겨우 17종, 등장인물도 8명에 불과했다. 그 중 백범 김구 선생이 4종으로 가장 많았고 안중근의사와 이준 열사가 각각 3종, 윤봉길 의사(2종), 안창호 선생(2종)이 그 뒤를 이었다. 유관순 열사, 이봉창 의사, 서재필 박사가 등장한 우표는 단 1종씩이다.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30종, 박정희와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각각 23, 10종의 우표에 등장한 것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수준이다. 역사 속 위인 중 세종대왕은 13종, 이순신 장군은 5종의 우표에 등장했다.

 

 

 

 

 

[광복절 기념우표의 변화상]

 

 

↑ 왼쪽부터 '해방조선기념(1946.5.), 해방일주년기념(1946.8.15), 광복10주년기념(1955.8.15)우표 

↑ 왼쪽부터 광복 20주년, 30주년, 40주년, 50주년 기념우표

 

↑ 광복60주년(왼쪽)과 70주년 기념우표

 

↑ 1961년 발행된 광복절 기념우표(왼쪽)와 1981년 발행된 광복36주년 기념우표 

 

[해방 후 처음 발행된 광복절 기념우표]

日서 찍어 '아이러니'

지난 4일 발행된 광복70주년 기념우표에 백범 김구 선생이 등장했다. 해방 이후 11차례에 걸쳐 27종의 광복기념우표가 나왔는데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방 후 최초로 발행된 ‘해방조선기념우표(1946년 5월 1일)’는 모순적이게도 일본정부인쇄국에서 인쇄했다. 국내에서 인쇄된 광복기념우표는 3개월 후 선보인‘해방일주년기념우표’가 최초다. 광복기념우표는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1961년 군사정부는 5년이나 10년 주기로 발행하는 관례를 깨고 광복16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우표는5ㆍ16군사정변을 4ㆍ19, 8ㆍ15와 함께 한반도를 지켜나갈 혁명적인 역사로 묘사하고 있다. 제5공화국 역시 1981년 ‘36년간의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지 36년이 됐다’는 의미를 앞세워 광복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경제성장에 힘을 쏟던 1965년(20주년)과 1975년(30주년) 발행한 우표에는 공장의 굴뚝과 고속도로 등 산업화 이미지를 싣고, 40주년 기념우표에는 독립정신을 남북통일로 발전시키자는 의미로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담았다. 태극기와 환호하는 시민들의 도안은 50주년에, 60주년 기념우표에는 임시정부청사와 독립선언문 등 민족의 발자취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

 

[우표로 읽는 시대상]

 

↑ 왼쪽부터 말라리아 박멸운동 기념우표(1962.4.7), 파월장병 원호기금 첨가우표(1967.6.20)


 
↑ 왼쪽부터 어린이 저금 우표(1964.12.20), 새마을운동 10주년 기념우표(1980.4.22),

국산자동차 시리즈우표(1983.2.25) 
 

↑ 왼쪽부터 가족계획 홍보용 우표(1979.5.7), 출산장려 우표(2008.5.8), 정보통신의 날 기념우표(2013.4.22) 
 
[기금 모으기 위한 '첨가우표']

못살던 60, 70년대 수시 발행

 

적어도 인터넷과 이메일이 보급되기 전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 실생활과 밀접하게 사용된 까닭에 우표는 정부 정책을 홍보하고 국민을 계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산업화와 국토개발이 절실했던 시기엔 공장 노동자를 그린 보통우표(1949년)를 시작으로 수력발전소(1955년), 저축장려(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념우표(1960년대 중반)와 경제부흥시리즈우표(1971년) 가 발행됐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기념우표에 이어 80년대엔 국산 자동차와 선박시리즈 우표도 등장했다.

 

액면가에 일정액을 더해 판매하는 첨가우표는 나라경제가 어렵던 시기 다양한 기금을 모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해구제를 위한 첨가우표를 60~70년대 수시로 발행한 것을 비롯해 ‘파월장병지원기금 첨가우표’도 발행했다.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과 울진, 삼척 침투사건 직후 ‘헬리콥터헌납기금 첨가우표’가 발행되었는데, 당시 헬리콥터를 군에 헌납하기 위한 모금이 각계에서 이어졌다.

 

1970년대 ‘둘만 낳자’는 표어를 넣은 가족계획 우표는 출산율이 급격히 하락한 2000년대 들어 출산장려(2008)나 다둥이 가족의 이미지를 강조한 우표(2011)로 변화했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할수록 느리고 불편한 우편과 우표의 역할은 축소되어 왔으나 우표는 빠르고 편리한 전기 통신기술의 발전을 일관되게 축하하고 기념해 왔다. 국제전기통신연합(UIT)가입부터 한국전기통신 100주년, 정보통신의 날 기념 우표 등 1957년부터 2013년까지 총 23종의 기념우표가 꾸준히 발행되어 왔다.

 

[황당하고 뜬금 없는 우표들]

 

↑ 성급한 통일의 꿈 ‘국토통일기념우표'

 

해방 이후 남북한이 통일된 적이 있었던가.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 11월 20일 남한 정부는‘국토통일기념우표’를 발행한다. 국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자 성급하게 통일을 꿈꿔버린 정부의 상황판단 능력이 의심스럽다. 마치 일등 공신처럼 우표에 등장한 이승만 전 대통령도 눈에 띈다. 우정당국의 대통령 사랑은 휴전 이후에도 이어지는데 이 전 대통령의 80회, 81회 탄신 기념우표가 1955년과 56년 각각 발행되기 이른다.

 

[아웅산 테러에... 거짓말 된 '순방우표']

 

↑ 전두환대통령 호주, 뉴질랜드, 인도, 스리랑카 방문 기념우표4종(1983.10.8)

 

1983년 10월 서남아 및 대양주 5개국 방문에 나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첫 방문국인 버마(현 미얀마)에서 아웅산 테러사건이 일어나 예정됐던 호주, 뉴질랜드, 인도, 스리랑카, 브루나이 순방을 전격 취소했다. 전 전대통령의 순방에 앞서 발행된 우표들은 결과적으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기념하는 거짓 우표가 되어 버렸다.

 

↑ MB정부 4대강 사업 기념우표 눈살

 

4대강 사업은 시작부터 그 효과와 폐해를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민적 합의 없이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인 이명박 정부는 과연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우표까지 발행했을까?

 

↑ 해양경찰창설 60주년 기념우표(2013.9.10)

 

2013년 9월 해양경찰 창설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됐지만 이듬해 세월호 참사 초기 대응에서 심각한 결함을 드러낸 해경은 결국 해체되고 만다. [박서강 기자 류효진 기자 최민영 인턴기자 (숙명여대 법학부 4)
그래픽=강준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