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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홍여사] 효도는 '셀프'라는 아내...

잠용(潛蓉) 2015. 8. 20. 07:28

효도는 '셀프'라는 아내... 병든 시부모를 모른 척해도 되나요?
조선일보 | 홍여사  | 입력 2015.08.20. 04:06
 
'효도는 셀프'라는 말이 요즘 자주 들립니다. '효도'라는 전통적 가치에 '셀프'라는 편리한 외래어를 갖다 붙이니 어딘지 좀 불편하면서 싸늘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외면하는 '효'의 길을 며느리·사위에게 기대하긴 어렵더라는 현실을 이만큼 잘 드러내는 표현도 없지 싶습니다. 병든 부모를 모셔오지 못하고, 나 홀로 집 떠나 부모 곁으로 가야 하는 반백의 아들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세태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쓸쓸함만은 어쩌지 못하는 그들. 빨랫감을 나르고 반찬을 챙기는 그들의 낯선 모습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홍 여사 드림

 

환갑 나이쯤 되면 인생 숙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육십대는 살아온 중에도 가장 부대끼고 고된 나이인 것만 같습니다. 십여년 전에 퇴직했지만, 마냥 놀고먹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기에 저는 근근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적성 따지지 않고 그저 나가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요. 아들은 장가를 갔지만 벌이가 시원찮아서 걱정, 서른 중반의 딸은 아직 짝을 찾지 못해 걱정입니다. 또한 팔십대의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니, 저는 여전히 '아들'이고 '장남'인 셈입니다. 편히 모실 여건도 능력도 안 되면서, 나이만 이렇게 허옇게 먹은 채로 노모를 손 놓고 바라봐야 하는 심정이 답답하고 쓰라립니다.

 


20여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어머니를 저희 집으로 모셔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부간의 불화가 너무 심해서 5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분가를 해야 했지요. 중간에 낀 제가 볼 때는 서로 조금 참고 이해하면 될 일인데, 대립하는 당사자들은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털털하고 느린 성격인 아내는 깔끔하고 성미 급하신 어머니 눈 밖에 났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당신이 젊어서 매운 시집살이한 것을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갚아주다시피 하셨지요. 그 당시 누님 두 분이 어서 분가하라고 성화를 할 정도로, 어머니는 며느리를 모질게 대하셨습니다.

 

그 뒤로 15년을 혼자서 살아오신 어머니였습니다. 그동안 저희 부부는 가끔 어머니를 찾아뵙거나 집으로 모셔오곤 했고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어머니가 부쩍 기력도 없으시고, 여기저기 편찮으시다고 하십니다. 바쁜데 올 거 없다,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시던 양반이 사흘이 멀다 하고 저를 찾으십니다. 그러나 밤중에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면, 어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런저런 얘기나 하시고….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당신이 급하게 전화를 한 것도 잘 모르실 때가 있더군요. 우리 어머니도 어쩔수 없이 정신이 흐려지시는구나 싶어서 서글퍼지곤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와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살펴 드리고 싶지만, 아내에게 그런 얘기를 꺼낼 수도 없습니다. 이혼 불사하고 싫다 할 게 분명하니까요. 함께 사는 딸이 아마 더 길길이 뛸 겁니다. 몸도 약한 제 엄마 고생시키지 말라고요. 할머니가 예전에 어떻게 했느냐고 또 묵은 얘기를 꺼내겠지요. 아내를 휘어잡을 힘도 없고, 어머니에게 눈칫밥 드리기도 싫어서 결국 저 혼자 자식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내에게 말을 했지요. 앞으로 당분간 어머니 집으로 퇴근해서 지내다가 주말에 집에 다녀가겠다고요. 그리고 어머니 증세가 더 심해지면 지금 다니는 일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요. 그러자 아내는 선뜻 그러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는 아내가, 월급 받아오는 게 아쉬워서라도 생각을 다시 해볼 줄 알았습니다만, 그건 저의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현재 어머니와 함께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증세는 하루하루 조금씩 나빠져 갑니다. 낮에는 간병보조인이 다녀가기도 하고 자원봉사자도 들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점점 더 아들만 찾으시고, 밤에는 잠도 안 주무시면서 저를 붙잡고 옛날이야기를 반복하십니다. 집에는 주말에 다녀옵니다. 빨래도 내놓고, 반찬도 챙겨옵니다. 아내는 마치 제가 어디 가서 일하고 온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맞아주고, 군소리 없이 반찬을 챙겨줍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안 보이네요. "괜찮으셔?" 하고 한번 형식적으로 묻고는, 제가 대답을 하든말든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 곁에서 지내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아내의 발걸음은 더욱 뜸해졌습니다. 딸은 아예 관심이 없고요. 아내는 어머니한테 덴 상처가 있어서 그렇다 쳐도 딸아이는 어째 그리 무심할까요? 어릴 때는 할머니가 얼마나 귀하게 여기던 손녀인데…. 그래서 작심하고 딸아이를 불러 야단을 쳤습니다. 너는 어떻게 할머니 한번 찾아뵐 생각을 안 하느냐고요. 야단을 치다보니 저도 흥분해서 안 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긴 엄마라는 사람부터 기본 도리를 모르는데 자식이 도리를 알 리가 없다고요. 그 말에 아내가 발끈해서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느냐고 하고, 막말로 부모도 부모 나름이라고 합니다. 해묵은 옛일을 들추며 분통을 터뜨리더니, 아내는 말합니다. 요즘 세상에 효도는 각자 알아서 하는 거라고요. 부모·자식은 천륜이지만, 며느리 사위는 쌓은 정만큼이고, 들인 공만큼이랍니다. 그동안 실컷 구박만 하다가 이제사 와서 찾지를 말랍니다.

 

논리로는 못 당할 말이지만, 저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부부가 살 맞대고 살면서 어떻게 서로의 부모를 모른 척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관심은 가져줘야 하고, 늙고 병든 부모에 대한 아픔은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머니를 봐서가 아니라 남편을 봐서라도요. 이 나이에 보따리 싸들고 두 집을 들락거리는데, 식구들은 누구 하나 신경쓰는 사람도 없으니, 인생 육십년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늙은 어머니 한 분만 제게 남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조선일보 홍여사]

 

※ 이메일 투고는 mrshong@chosun.com홍 여사 답변은 troom.premiu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