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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념일

[경축 3.1절] '先烈하, 不肖한 이 나라를 보소서!'

잠용(潛蓉) 2013. 2. 28. 18:07

“先烈하, 不肖한 이 나라를 보소서!”

[잠용] 2013년 02월 28일 18:07 구성

 

△ 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치신 장한 선열(先烈)들. (독립기념관 소장)

 

‘일제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드디어 전국민이 1919(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세계적으로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이를 민족 해방의 절호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1918년 11월 여운형·김규식·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는 한편,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국내외 민족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1918년 12월 미국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이승만 등을 파리 강화회의 에 파견하기로 결의했으나, 미국 당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개항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도쿄[東京]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 청원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이 준비한 운동계획은 독립선언과 일본에 대한 독립청원을 병행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원칙에 따라 운동을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언서, 파리 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드디어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서울을 시작으로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운동을 계획·준비한 종교계의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따로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 원래 33인은 독립선언식을 종로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합의했었다.

 

그러나 33인은 공원에 모인 학생·시민 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들어가서 자신들이 세운 비폭력 원칙을 깨뜨릴 경우, 일본·미국 등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걱정하여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독립선언식은 대중의 반일감정이 자연 발생적으로 폭발하는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운동의 후속조치로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모여 시위를 했다. 3월 상순 이후에는 대도시에서만 주로 전개되던 만세시위가 각 지방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은 5월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 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최고조에 이르렀다. 운동이 급속히 확산된 데는 지식인·청년·학생층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서울 등 도시지역에서 유포된 선언서,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하는 데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다. 경기도 부천의 혈성단, 대구의 혜성단, 조치원 청년단 등이 그 예이다. 이들과 함께 광범한 민중이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에서는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렸으며 전차 종업원, 경성 철도 노동자 등은 파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항의했다. 서울·평양·선천 등지에서는 상인들이 철시(撤市) 투쟁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횃불시위와 산 위에서의 봉화시위가 벌어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시위를 확산하는 만세꾼이 등장했다.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시위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 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일본측 발표)

 

국내에서의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간도·연해주·미국 등지에서도 동조하는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다.

만주와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최초였으며,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서의 독립선언 경축대회로부터 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독립선언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 주로 모금활동을 통해 임시정부의 재정이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선전활동을 지원했다

(이상 인터넷 자료)

 


△ 윤봉길 의사,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 폭탄의거(1932. 4. 29)에 대한 진실
 


△ 간악한 일본 경찰의 총칼 앞에서 맨주먹으로 저항한 우리 선조들: 3.1독립운동 기념부조 - 서울 탑골공원

 

‘3.1절 노래’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기미년(己未年) 삼월 일일 정오(正午)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太極旗)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漢江) 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 이 날을 길이 빛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