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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국민가곡] '바위고개'(1934) - 이서향 작사, 이흥렬 작곡

잠용(潛蓉) 2013. 4. 14. 16:37

 



“바위고개”(1934)
(이서향 작사/ 이흥렬 작곡/ 노래 바리톤 김성길)


< 1 >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 2 >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 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 3 >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 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바위고개 바리톤 지춘섭 노래)

 


바위고개 - 김성길 노래


바위고개 노래 백남옥


(바위고개 - 바리톤 정광빈)


(바위고개- 서울남성합창단, 조상욱 편곡)

 


◇ 민족의 애환 깃든'바위고개'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입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고개이지만,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모든 국토가 바위고개입니다.”라고...

 

그래서 이 노래의 원래 작사자 이서향은 <바우고개> 가사에서 <무궁화>를 조선을 상징한다고 금기시되던 시절이라 이것을 <진달래>로 바꾸고, <일제 식민지 시절의 핍박받는 국민들>은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던 머슴>으로 둘러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 지명 중에 바위고개는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중 낙동강변의 경북 칠곡군과 달성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없어진 작은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바위고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능선의 허리가 잘려서 고개는 없어지고 신작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위고개에 얽힌 가슴아픈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하늘에서 장차 우리나라에 크게 쓰일 장수 한 사람을 이 바위 속에서 키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잃합방과 더불어 일제의 마수가 여기까지 뻗치게 되었습니다. 일본관헌이 전설을 듣고 이 바위고개에 와 보니 듣던대로 낙동강 물줄기를 한 눈에 굽어보고 있는 이 고개와 바위가 범상치 않게 보였습니다.

일본 관헌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바위 한복판을 내려치자 바위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치면서 장대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고개 능선이 반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거의 다 자란 아기장수가 가슴에 칼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장수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는 온 산과 바위를 물들이고 아래로 흘러내려가 낙동강 강물까지도 핏물로 붉게 물드렸습니다. 한편 아기장수가 죽을 때 건너편 바위에서는 한 마리 흰 용마가 뛰어나와 온종일 울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자 아기장수의 피로 물들었던 그 산에는 여기저기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진달래 꽃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kbsartsong)

 

◇ 내 어머니의 노래 '바위고개' /고정일

 


어머니의 노래를 들은 건 딱 한번이었다. 50년도 더 흐른 지금도 박꽃 같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 노래는 내 안에서 깊고 쓸쓸하게 울린다. 산내들과 온 마을이 눈 속에 잠긴 외갓집에서 보내던 그 겨울. 다섯살이던 나를, 마을 아이들은 ‘서울뜨기’라고 놀려댔다. 나는 그만 서울 집에 돌아간다며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오산 읍내로 가는 산고개를 달렸다.
“정일아, 정일아!” 지쳐 헐떡이는 나를 뒤쫓아 부둥켜 안는 엄마의 눈엔 물기가 배어났다. “애들이 네가 귀여워 그러는 거야. 엄마가 까치밥 볶아줄게.” 산등성이 햇살 바른 곳엔 겨울잠 자며 한가득 열매를 단 까치밥풀이 무성했다.“까치가 겨울에도 통통하고 예쁜 건 이 까치밥을 먹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수수이삭보다 작은 자주색 까치밥을 훑어 앞치마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나를 업고 망월리 산모롱이를 내려가며 자장가처럼 노래를 불러줬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허공으로 잔잔하게 흩어지는 아름답고도 슬픈 엄마의 노래 가락은 등에 기댄 내 몸을 애잔한 울림통으로 만들었다. 엄마의 하얀 목을 감은 두 팔에 꼭 힘을 주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몇년 뒤 나는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한국전쟁과 1.4 후퇴... 온 마을이 포화로 무너지고 불타는 아비규환 속에 나는 애타게 엄마를 불러댔지만 피섞인 잿더미만 쏟아져내렸다. 타다 남은 옷조각 위에 어머니와 동생들 뼈를 추려 담는 아버지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한 자루도 채 되지 않는 그것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끝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열 여섯살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와 스물여섯에 동족상잔의 제물이 되신 어머니. 당신은 그 뒤로 내 꿈속에서 살아온다. 한 낮도 저녁도 아닌 풍경이 눈 앞에 부유하듯 떠오른다. 바람 한점, 소리 한점 없다. 모든 것이 희부윰하게 가물거린다. 저만큼 망월리 산모롱이를 한 여인이 걸어간다. 쪽진머리 옆으로 도톰한 귓밥, 동그스름한 볼, 반달같은 이마, 상큼한 두 눈, 부드럽게 솟은 콧망울... 아, 아, 엄마...!
말은 언제나 목구멍에서만 맴돈다. 하얀 얼굴의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볼에 얼굴을 부빈다. 둘의 뺨에는 뜨거운 회한과 그리움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뭔가를 말하려던 엄마는 내게 손을 내민 채 슬픈 얼굴로 멀어져가고… 노래 소리만 아득히 귓가에 남는다.

언덕 위에 핀 꽃 진달래 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필자: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가곡 '바우고개'(원 곡명) 작사자는 내 남편

 

월북자 이유로 금지곡 될까봐 숨겨와
월북 연출가 이서향씨 아내 백난영씨가 밝혀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가곡 '바위고개' 1절)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대표적인 가곡 가운데 <바우고개>는 그 동안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작고)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작사자는 월북한 극작가겸 연출가 이서향(李曙鄕 본명 榮秀, 1915∼?)이 작사한 것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 이문학회 마루에서 포즈를 취한 백난영 여사

 

이서향의 아내 백난영(白蘭英 86)씨는 최근 발행된 이문학회(以文學會) 회보 <이문회우> 제 5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바우고개>는 남편이 14세이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다 지은 것으로, 훗날 남편의 친구인 이흥렬 씨가 작곡해 주었다는 얘기를 남편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이서향과 이흥렬 두 사람은 원래 동향(함남 원산) 출신으로 어릴적 친구 사이였다.

<바우고개>의 작사가가 이서향에서 이흥렬씨로 뒤바뀐 것은 이서향이 월북한 이후부터다. 이후 출간된 모든 음악서적에는 <바우고개> 작사자가 이흥렬로 둔갑돼 있다. 그러나 해방 전에 출간된 각종 자료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엄연히 이서향으로 나와 있다. 한 예로 1934년 도쿄(東京) 상문사(桑文社)에서 간행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가곡 <행복>과 함께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서향(曙鄕)으로 분명히 나와 있으며, 또 1939년 6월 8∼9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全) 조선창작작곡발표 대음악제> 팸플릿에도 마찬가지로 나와 있다.

 

▲ 1934년에 간행된 <이흥렬작곡집(제1집)>에는
'바우고개'의 작사자가 曙鄕으로 나와 있다.

 

음악계의 한 인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얘기였으나 아무도 이를 내놓고 거론하기를 꺼려했던 사안"이라고 털어놨다. 백 여사는 "한동안 월북작가들의 이름조차 거명할 수 없었던 시대여서 이같은 사실을 밝힐 수 없었지만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 동안 '빨갱이 마누라'라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발벗고 나서서 밝히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 니혼대(日本大)에 유학하여, 국문학과와 예술학과를 졸업한 이서향은 귀국 후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최고의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한 이서향은 6·25 당시 서울에 내려와 부인 백 여사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 일로 백 여사는 나중에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작곡자 이흥렬은 생전에 자신이 <바우고개>의 작사자임을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이서향의 가족을 설득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백 여사와는 동서지간이자 이서향의 친동생인
음악가 이호섭(李瑚燮·전 중앙대교수. 작고)의 부인 이화용(李和蓉, 80 경기 고양시 화정 거주) 씨는 "남편의 국민학교 시절 음악선생이었던 이흥렬 씨가 생전에 더러 집으로 찾아와서 (바우고개 작사 문제와 관련)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이 씨는 "아마 (바우고개가) 금지곡으로 낙인찍힐 것을 이흥렬 씨가 두려워했던 것 같았다"며 "그러나 이제는 원작자를 정확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에 대해 이흥렬 씨의 아들인 이영조(李永朝·58)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은 "이같은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는 "사실일 경우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1940년 4, 5월경 이서향과 찍은 약혼사진

 

남편이 월북한 이후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마저 꺾여버린 백 여사는 "남편 생각을 할 때마다 '이런 억울한 일도 있나'싶어 회한에 사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白麟濟) 박사의 맏딸로 경기여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백 여사는 미군정 시절부터 탁월한 통역(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온 재원으로 한동안 숙명여고 교사를 지냈으며, 이후로는 유명인사들의 영어 개인교수를 하며 지내왔다.

지난 해부터 백병원이 세운 경남 김해시 소재 인제대학교 생활관에 머물면서 해외 입양아 모국유학생들의 모국교육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슬하에 1남(영균·미국 LA거주·공인회계사)을 두고 있는 백 여사는 자신의 회한의 인생 회고기를 <이문회우>에 연재해 오고 있다.

(이문학회:http://cafe.daum.net/imoon, 전화:766-8269) 
(원문: 오마이뉴스, 2001.12.11 18:24 정운현 기자(jwh59)

 

◇ 작곡자 이흥렬 (李興烈 1909~1980)

작곡가. 함경남도 원산 출생.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1931년에 귀국하여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경 경성보육학교에서 홍난파와 함께 일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 <이흥렬 작곡집>, 1937년에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하였다. 널리 알려진 곡으로 <봄이 오면>, <바위고개>, <자장가> 등이 있으며, 가곡, 동요 등 400여 곡을 작곡했다. 서라벌예대 교수, 숙명여대 음대교수를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9년과 1961년에 대한민국 문화상과 서울시 문화상,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상,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 등이 있다. [출처: 야후백과]

 

☞ 조미령 김승호 주연의 영화‘바위고개’(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