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1941) 윤동주(尹東柱) 지음/ 낭송 임국희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이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 鏡, 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였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茂盛할 게외다.” (1941.11.5)
☞ 밑줄 친 부분은 낭독에서 누락되었음, 일부 한자는 관리자가 추가했음
☞ 원시 출처: ‘윤동주유고집’ 연변대학출판사(1996) ----------------------------------------
* 우리가 이 영롱할 만큼 아름다운 시를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의 다정다감한 동심과 순정한 동경과 식민지 조선청년의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별빛 아래 어우러져, 이 땅의 감수성을 깊이 흔들어왔다. 별을 헤는 유행가들. 릴케와 프랑시스 잠에 대한 열광을 돋웠고, 패, 경, 옥이라는 낯선 이름들까지도 초등학교 단짝친구들처럼 그립도록 만들었다. 질곡의 시절에 북간도와 조선의 하늘을 우러르며 별들로 소통했던, 감미로운 리리시즘(lyricism)은 조금도 낡지 않은 채 감동을 문, 빛줄기가 되어 내 이마 위로 내려와 앉는다. [빈섬 이상국ㆍ시인]
*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책자 출간이 어려웠던 때 마루를 뜯어내고 시를 감춰 보관해주었던 친구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의 시는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항일운동 중 투옥되어 27세의 나이에 별세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 아름다운 생의 이력과 주옥같은 시편들은 슬픈 민족사를 넘어 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영원한 별빛으로 빛나고 있다. [임혜신ㆍ시인]
◇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일제강점기 짧은 일생을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고민하던 시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얼마되지 않는 그의 시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이 끝나는 날 만주 북간도의 용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그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에 유학하였으나, 학교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자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서울에 유학하여 1941년에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해방을 몇달 앞두고 1945년 2월에 2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그의 유해는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라고 하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윤동주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함께 고뇌하는 심오한 한 시인의 삶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사후에 동료와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처녀작은 <삶과 죽음> <초한대>이다. 발표된 작품으로는북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쓰여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한편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뒤 1948년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담은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 본> <조개 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시로서,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시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주요작품으로 《서시(序詩)》,《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등 시집을 남겼다. (류재택)
윤동주(尹東柱)의 시 ‘별 헤는 밤’은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25세)인 1941년 작품으로 어린 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되새기며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열망을 담은 시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산문형식으로 씌어져 도도한 물결과도 같은 내재율(內在律)을 지니고 있어 읽는 이와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출처: 네이버 백과]
◇ '별 헤는 밤' (1941, 윤동주) [이해와 감상] 별을 통하여 고향과 유년기의 추억, 어머니에 접근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타향(서울)에서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아름다웠던 고향(북간도)의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한편의 시(詩)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반부는 현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후반부는 고뇌와 소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별’은 곧 회상의 매체이며, 동경하는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전체 10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과거의 추억, 현재의 고뇌, 미래의 희망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즉, 제 1-7연(과거와 추억), 제 8-9연(현재의 고뇌), 제 10연(미래의 희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는 별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작가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전반부와, 산문적인 리듬으로 어머니와 유년기의 친구, 고향의 산천을 동경하는 중반부, 그리고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별은 하나의 거울로 이해되는 것으로 자의식(自意識)을 바라보는 도구인 것이다. 또한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봄날(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시인의 강렬한 의지가 표현되었다.
[윤동주의 작품세계]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의 특성은 고요한 내면 세계에 대한 응시를 순결한 정신성과 준열한 삶의 결의로 발전시킨 데 있다. 초기의 동시(童詩)는 일상생활에 대한 애정어린 관찰과 화해의 세계를 구축하며, 산문을 통해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표현한다. 그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고 자책적이며, 어떤 경우 자기 분열의 상태에까지 이르기도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음에 그 가치가 있다.
그의 생애를 마감할 무렵인 일본 유학 시절의 시는 비로소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그의 생애의 흐름과 일치하며 발전한다. 즉 개인적 자아성찰에서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을 확대하는 것이다.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며 자신의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잃지 않은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종말에 대한 희생적 예언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시세계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기독교적인 원죄의식과 종말관이 뒷받침되기도 한다.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윤리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詩心)으로 노래하였다. 그의 시에는 절박한 시대상황 속에서 순교자적 신앙의 길을 선택한 한 청년의 끝없는 자기 성찰의 자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은 항상 '부끄러움'을 수반한다. 이 '부끄러움'의 감정은 현실적인 문맥에서 이해하자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성의 결여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시를 단순화시키는 결과가 된다. 왜냐 하면, 그의 '부끄러움'은 좀더 근원적인 것, 말하자면 절대적인 윤리의 표상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그런 유(類)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끄러움'은 삶과 시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계기마다. 그리고 그의 시마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십자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순결한 순교자적 의식으로 수렴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부끄러움'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아름다움과 그의 삶이 지닌 투명한 인간성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작자 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북간도 명동(明洞)에서 기독교 장로의 장손으로 출생.어릴 때 이름은 해환(海煥). 용정시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평양 숭실중학, 용정(龍井)의 광명중학 등에서 공부했고,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릿쿄(立敎)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 때 귀향하기 직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강(福岡)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하였다. 그의 시는 소년다운 순결한 의식과 기독교적 참회의 정신을 의식의 바탕에 깔고 있다.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출처: http://www.seelotus.com/)
◇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 용정시 명촌마을)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수도 연길시에서의 취재활동 중 빈 시간을 이용하여 길림성의 옛 수도인 용정에 있는 시인 윤동주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연변지역 친일파의 선봉에서 활동한 조두남이 작곡하고 윤해영이 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용정의 노래를 표절 한 것이 더욱 정설이라는, 오랜 세월 우리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가곡 ‘선구자’의 가사인,
“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海蘭江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의 한 대목인 일송정과 해란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비암산(飛岩山)을 올라보니, 한 눈에 들어오는 용정의 자그마한 시가지와, 갈수기에 말라버린 해란강이 보이기는 하나, 一松은 전설 속의 나무가 되어버렸으며 자그마한 소나무 한 그루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정 비암산에서 내려다 본 해란강과 용정시)
이 일송정 정자는 60여 년 전 항일혁명 근거지의 비밀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이 모여 활동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송정의 一松은 일제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말려 죽이고 정자 역시 파괴했는데, 1990년에 복구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나, 정확하게 조사를 못해서 사실관계는 알 수가 없다.
용정시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는 龍井 우물 부근에 있는 용정제일중학교 교정에는, 과거 윤동주 시인이 다닌 대성중학교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윤동주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대성중학교 출신의 윤동주, 문익환 등 유명인사와 항일운동가 들을 소개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序詩 서시>는 일부학자에 의하여 구절 자체가 항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고, 또 다른 평론가들은 기독교적, 염세론적 의미로 해석되어지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인 윤동주가 항일독립투사냐 아니냐, 라는 정반대적인 의견이 양립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율)
(북간도 용정시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
◇ 문학으로 항일 정신을 일깨우다가 옥중에서 순국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서시’ ‘별 헤는 밤’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여 민족적 문학관을 확립하고, 일제의 징병제를 반대하다 피체되어 옥중 순국한 윤동주(1917.12.30~1945.2.16) 선생을 탄생 90주년을 맞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1936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후 광명중학교에 진학하여 시(詩) 작품을 통한 항일 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았다.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 되는 1941년부터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했으며, 그 해 11월 졸업을 앞두고 그때까지 써놓은 시 중 18편을 선별, 거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엮었다. 그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 뒤, 그 해 10월 도지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피체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하였다.
평생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했던 그의 민족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않게 치열하였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죽음의 늪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민족의 제단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성 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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