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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민족가요] '荒城의 跡' (황성 옛터 1932) - 남인수 노래

잠용(潛蓉) 2013. 7. 30. 11:39


황성의 옛터 (南仁樹 1959)

 

‘荒城의 跡’(황성 옛터 1932)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원곡

 

(1)

荒城 옛터에 밤이 되니 月色만 고요해
廢墟에 서린 懷抱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2)

城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芳草만 푸르러
世上의 虛無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3)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山을 넘고 물을 건너서 定處가 없이도.


아아 한 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 터야 잘 있거라.

 

(일제의 군화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1930년대 개성 만월대 모습)



 

◇ <황성옛터>와 李애리수(1910~2009 개성출신)

 

 

경기도 개성 출신인 李애리수의 본명은 李음전. '애리수'라는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애리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 활약하면서 막간 가수로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소박한 창법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세때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의 적, 나중에 황성옛터로 고침>으로 국민가수로 등극한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고려의 옛 궁궐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노래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국민들의 마음을 적셨다. 특히 이 노래는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1931년 <메리의 노래>, <라인강> 등의 노래를 담은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 이애리수는 다음해 <황성의 적>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은 5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5만장이라면 현재 기준으로 500만장에 육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래서 일본은 이 노래를 통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상기할까 걱정해 경찰이 이 음반을 발매 금지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애리수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애리수는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딴따라' 취급 받던 가수와 엘리트였던 대학생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독약을 마시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구출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은 노래 <버리지 말아주세요>를 만들어 불렀다. 그의 애처로운 노래를 들은 배씨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배씨 부모의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의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지금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중음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져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스크랩] 이애리수와 황성옛터

[동아일보] 2009년 04월 02일(목) 오전 02:57

1930년대는 신파극이 대중 오락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연극을 보고 돌아가야 서울을 제대로 구경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공연은 ‘종합선물 세트’로 구성됐다. 희극 한 편, 비극 한 편에 ‘막간 연극’이 곁들여졌고 중간에 여배우가 나와 노래도 불렀다. 아직 ‘유행가’라는 개념도 없던 1930년 무렵 서울 종로에 위치한 단성사 무대에 앳된 모습의 이애리수가 걸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성(荒城)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3절로 이뤄진 노래가 애조를 띠고 퍼져나가자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발을 굴렀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면서 1932년 ‘황성의 적(跡)’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레코드로 취입됐다.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로는 경이적인 5만 장의 레코드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니 반응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가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노래를 금지했지만, 취입 당시 22세이던 이애리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불리며 일약 스타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가수였다.

▷ 이 곡은 전수린 씨가 개성의 고려왕궁 터를 한밤중에 찾아가 얻은 착상(着想)으로 작곡했다. 폐허로 변해버린 왕궁 터에는 달빛만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영화를 누렸던 옛날과 비교해 회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내린 비를 보며 악상이 떠올라 작곡을 했다”고 회고했다. 작사는 극작가와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던 왕평이 했다.

▷ ‘애리수’는 서양 이름인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9세 때부터 연극 무대에 섰던 그는 ‘황성옛터’ 이후 절정의 인기를 누리다 1930년대 중반 종적을 감췄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살을 두 번 시도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됐던 그가 경기도의 한 요양시설에서 살고 있음이 알려진 건 지난해였다. 그가 그제 99세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한을 달래줬던 스타 예술가를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에게서 대중문화 여명기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했던 것도 못내 아쉽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황성의 적’ - 이애리수 취입(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