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1582 학번의 동기모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582 학번의 동기모임 경향신문ㅣ2012.01.04 12:00 수정 : 2012.01.04 12:04 ▲ 1582학번의 동기모임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있다. 가운데 4명은 정1품 관직에 있었던 윤방, 오윤겸, 이귀, 김상용 등이다. 오른쪽 2명은 정2품인 이홍주와 정경..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후견인 누구를 택할 것인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후견인 누구를 택할 것인가? 경향신문ㅣ2011.12.28 21:24 ▲ 후견인 누구를 택할 것인가? 기원전 1046년. 무왕이 은(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업 스트레스’ 탓일까. 무왕은 불과 2년 뒤 사망하고 만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성왕이 뒤를 잇는다. 천하는 불안했..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다 경향신문ㅣ2011.12.14 21:19 ▲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다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시성 완잉셴)의 사당 옆 마당에서 정(鼎), 즉 청동솥 하나가 발굴됐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었던 셈이다. “국보급 유물이..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경향신문ㅣ2011.12.07 21:03 ▲ 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벌주로 원샷 3잔’ ‘무반주 댄스 몸개그’ ‘신청곡 부르기’…. 문무왕대(674년)에 조성된 경주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 궁중연회장이었다. 1974년. 이 연못 바닥에서 ‘1..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경향신문ㅣ2011.11.30 21:06 ▲ 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已).”(<..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갑골 민주주의는 어떨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갑골 민주주의는 어떨까? 경향신문ㅣ2011.11.23 20:52 . ▲ 갑골민주주의는 어떨까? 2008년 6월.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나왔다. 소의 견갑골로 점(占)을 친 흔적이 완연한 갑골(甲骨)이었다. 부여는 백제와 고구려의 조상이었다. <..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무인(巫人), 혹은 무당(巫黨)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무인(巫人), 혹은 무당(巫黨) 경향신문ㅣ2011.11.16 21:36 ▲ 무인(巫人), 혹은 무당. .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는 점(占)을 끔찍이 사랑했다. 어느 날 무제가 며느리를 들일 날짜를 잡고 역술인 7명을 불렀다. 한데 7인7색이었다. 오행가는 “좋다(可)”고 했고, 풍수가..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전국시대 ‘풍자개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국시대 ‘풍자개그’ 경향신문ㅣ2011.11.09 21:01 . ▲ 전국시대 ‘풍자개그’ 전국시대 초나라에 우맹(優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골계가(滑稽家), 지금으로 치면 개그맨이었다. 어느 날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뒤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우맹이 나섰다. 그는 ..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立立立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立立立 경향신문ㅣ2011.11.02 18:34 ▲ 立立立. “망측스럽게….” 2000년 4월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야릇한 유물이 출토됐다. ‘남근(男根)’목간이었다.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 흔적의 역사 2019.12.18
[흔적의 역사] 궁정동 안가와 파가저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궁정동 안가와 파가저택 경향신문ㅣ2011.10.26 21:37 수정 : 2011.10.26 22:32 ▲ 궁정동 안가와 파가저택 조선시대 때 ‘파가저택(破家저澤)’이라는 형벌이 있었다. 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그 집을 헐고, 집터에 연못을 팠던…. 대역죄나 존속살인 등 삼강오륜을 위배한 .. 흔적의 역사 2019.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