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병역비리, 병역면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병역비리, 병역면제 경향신문ㅣ2013.01.02 10:29 수정 : 2013.01.30 11:51 ▲ 조선 숙종대의 군역기록부. 요즘의 병적기록부이다. 총청도 관찰사 휘하의 병사 3878명의 신상명세가 기록돼 있다. /토지박물관 제공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이란은 '악의 축' 아니라 '혈맹'이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란은 '악의 축' 아니라 '혈맹'이다 경향신문ㅣ2012.12.26 16:50 수정 : 2013.01.30 11:52 ▲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입이다.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경기용 스틱을 두 손에 쥐고 있다. 최근 발굴된 <쿠쉬나메>에..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다 경향신문ㅣ2012.12.19 10:44 수정 : 2013.01.30 11:52 ▲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을 묘사한 <쿠쉬나메>의 내용. /이희수 교수 제공 “양금이, 양금이(Janggumi).” 2008년 초, 테헤란 등 이란 답사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솔로 대첩', '솔로 대책'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솔로(solo) 大捷', '솔로(solo) 對策' 경향신문ㅣ2012.12.12 10:13 수정 : 2012.12.13 15:52 ▲ 김준근의 <조선풍속도>. 혼례를 마친 첫날 밤 신부집에 꾸려진 신방에서 족두리를 쓴 신부가 상을 받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 “복사나무의 어..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해귀'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해귀'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경향신문ㅣ2012.12.05 10:47 수정 : 2012.12.05 12:14 ▲ 명나라군의 철수를 기념해 그린 <천조장사전별도>에 보이는 흑인용병 4명. 몸집이 너무 커서 말에 타지 못하고 수레에 탔다는 기록에 완전히 부합되는 그림이다. 잠수해서 ..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 장물아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자기 장물아비 경향신문ㅣ2012.11.28 10:26 수정 : 2013.01.30 11:54 ▲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은 도굴품인 이 ‘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자’를 95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든 겁니까?.. 흔적의 역사 2019.12.22
[흔적의 역사] 화냥년, 호로자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화냥년, 호로자식 경향신문ㅣ2012.11.21 09:28 수정 : 2012.11.22 10:55 ▲ 인질로 붙잡혀간 소현세자 부부 등의 숙소였던 심양관. 병자호란으로 약 60만명의 조선인이 붙잡혔으며 이 중 반은 여성들이었다. /경향신문 자료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 흔적의 역사 2019.12.21
[흔적의 역사] 치욕의 병자호란 속 귀중한 1승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치욕의 병자호란 속 귀중한 1승 경향신문ㅣ2012.11.14 10:33 수정 : 2013.01.30 11:56 ▲ 겸재 정선이 그린 백전. 유림군이 대첩을 거둔 곳이다.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7년 1월30일은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 흔적의 역사 2019.12.21
[흔적의 역사] 마오쩌둥 아들과 밴플리트 아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마오쩌둥 아들과 밴플리트 아들 경향신문ㅣ2012.11.07 11:03 수정 : 2012.11.07 19:54 ▲ 마오쩌둥· 마오안잉 부자의 즐거운 한때. 마오안잉은 두번째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양카이후이와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이었다. . “소하(蕭何),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다. 공신 가운데.. 흔적의 역사 2019.12.21
[흔적의 역사] 세종은 '해동 요순'이 아니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세종은 '해동 요순'이 아니었다 경향신문ㅣ2012.10.31 10:25 수정 : 2012.11.01 14:12 ▲ 조선 말기의 형장. 자백할 때까지 때리는 고문의 일종이기도 했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뭐라 이름을 짓지 못하여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 했다.” 1450년 세종.. 흔적의 역사 2019.12.21